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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폭풍전야 (1)



우연히 목격한 아내의 불륜현장이 잊히지 않는다.
예쁘긴 하다.
다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놈의 팔짱을 끼며, 수줍게 웃고 있어. 이가 갈릴 뿐이다.
오래전 첫날밤, 그때의 아내 얼굴이 오버랩 된다.
벌떡.
“후-우.”
또 엿 같은 꿈이다.
약 한 달 전, 처음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나서 자주 꾸는 꿈이었다.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듯 역겨움이 밀려온다.
영등포에 위치한 한 오피스텔.
성현이 임시로 얻은 보금자리였다.
장기 지방 출장을 핑계로 집을 나온 지 한 달.
불륜에 대한 자료를 모으며, 구역질 나는 아내의 외도의 종지부를 찍어줄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마음껏 비웃어 주고 침을 뱉어 주리라.
자신의 외도가 성현에게 발각당한걸 모르는 아내는 지금 아주 신이 나있었다,
그리고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크게 사람한테 데이고 나서인지, 불현듯 찾아온 슬럼프는 매사에 무기력하고, 체력 또한 저하시켰다.
스스로에게 쉬어가라고 점검하라고 준 마음에 하프 타임이라 생각한 성현은 결단을 내리고 사표를 냈다.
딱 6개월 반년만 쉬어갈 생각이었다.
샤아아아.
간단한 샤워를 하고 나온 성현은 습관처럼 아내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내의 스마트 폰에 심어놓은 위치추적 프로그램이 현재 아내의 위치와 지난 동선을 알려줬다.
“낮에 그 지랄을 하고 다시 나다니지는 않았네. 기다려라 철저하게 부셔 줄 테니.”
아내의 이동 동선을 확인하고, 혼잣말을 한 성현은 잠든 사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술 한잔하자는 친구 손정한의 메시지가 5통이 넘게 도착해 있었다.
초중고는 물론 군 복무도 같은 곳에서 한 죽마고우였다.

* * *

쨍!
“캬! 술맛 좋다.”
일사천리로 만나게 된 둘은 차게 얼린 사케를 연거푸 들이켰다.
통우럭 사시미에 사케는 진리라 할 만했다.
“그러니까 이해란이 정말 도준혁을 만난다고?”
의미 없는 여자 연예인의 신상을 털고 정치 이야기로 술잔을 들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최 하사 이놈은 통 연락이 없네.”
손정한이 술잔을 들다 말고 말했다.
“동원이 상사 단지가 언젠데 아직 하사냐. 그리고 이번 해외 파병은 좀 빡센가보다. 이해해야지 작전 수행 중일 텐데.”
“그래도 그렇지 나야 그렇다 쳐도 너한테는 연락 한번 할 법한데. 뭔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냐. 무슨 일 있음 동기 중에 누구라도 연락해줬겠지. 입방정 떨지 마라.”
군에 남은 동기들도 있고, 후임들도 많았다.
최 상사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성현에게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아 참, 이거나 받아라.”
정한이 ‘휙’ 하며 작은 상자를 던졌다.
“이건 뭐냐?”
엉겁결에 받아든 성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생일 선물. 지난주 터키 출장 갔다가 형이 큰맘 먹고 질렀지. 겁나 비싸게 주고 구한 거다.”
‘또 냐? 똑똑한 놈인데 이럴 때 보면 아주, 하······.’
외국 원정까지 가서 바가지 쓴 친구가 안타까웠지만, 이런 사람도 있어야 장사꾼도 먹고살지 하며 그러려니 했다.
딸깍.
제법 묵직한 상자를 열어보자 팔찌가 촘촘한 에어셀로 포장되어 들어있었다.
“호오!”
수십 개의 구슬을 엮여 만든 수공예 작품이었다.
“······너 이거 혹시 얼마 주고 샀냐? 이거 뭐로 만든 건지는 알고 산 거야?”
예상치를 웃도는 퀼리티에 성현은 내심 감탄하며 말했다.
부친이 살아계실 당시 금은방을 하셨고, 감정을 어깨넘어로 보고 배운바가 있어 팔찌의 가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으응, 왜? 크흠. 그게 사실 노점 하는 어린애가 동생이 아프다고 하잖아. 좋은 일하는 셈 치고 돈도 좀 넉넉히 주고 샀어. 무려 100달러짜리다.”
성현은 정한의 말을 들으면서 좀 더 면밀하게 팔찌를 살폈다.
‘이 녀석이 알고 산건 아니네. 아무래도 팰러사이트 운석 공예품 같은데.’
성현은 팔찌를 빛에 비춰보고 그 투과도를 살펴봤다.
‘최상급! 누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여하튼 운 하나는 타고났다. 제대로 감정받고 말해주는 게 좋겠다.’
“인마 그래도 네 생각하면서 산 거야. 없는 돈 쪼개서 샀구만······.”
정한의 말에 짓궂은 웃음을 짓는 성현이었다.
속 깊은 말을 하지 않아도,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냥 알 수 있다.
‘안다, 인마. 이건 평범한 물건이 아냐. 그러니 마음만 받으마. 처분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성현은 분에 넘치는 물건임을 생각해 전문가를 찾아 감정하고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선물해준 정한에게도 보상 차원에서 일부는 줄 작정이었다.
“하여튼, 넌 인마 친구 잘 둬서 존나 좋은 줄 알아.”
“헐, 요즘은 고맙다는 인사를 그따위로 하냐.”
정한은 성현의 속뜻을 모르고 나름 약이 올라 말했다.
성현이 오른 팔목에 팔찌를 차자 맞춘 듯 알맞은 착용감이 맘에 쏙 들었다.
불편함도 없고, 쉽게 빠질 만큼 헐겁지도 않다.
‘괜찮은데.’
흐뭇하게 팔찌를 들여다보는데 문뜩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성현은 묘한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 특성 각성 준비 ]
“······.”
“왜 그래?”
성현이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자 정한이 물었다.
“너, 넌 이거 안 보여?”
“뭐를? 왜 그래 인마. 무섭게.”
성현은 다급히 손세수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팔찌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급히 빼보지만, 눈앞에 나타난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 특성 각성 준비 ]
눈을 끔벅끔벅 떠보지만 그대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야, 어디가?”
정한이 불러보지만 성현은 대꾸조차 없이 뛰어갔다.
어푸, 어푸.
화장실 세면대에서 거칠게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여전히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문구가 보인다.
뚝뚝.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상의를 적시지만, 황당한 충격에 닦을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거 안보이냐고! 이거··· 어라? 어디 갔지?”
방금까지도 눈앞에 떠 있던 글귀가 거짓말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너, 술 많이 약해졌네.”
정한이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찬다.
‘게임을 너무해서 그러나? 이 나이에 벌써 이럼 어쩌냐.’
성현은 최근에 푹 빠져있는 게임 때문이라 생각하고 혼란한 정신을 수습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강인한 육체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믿는 성현이었다.
게임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당장 게임을 접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체력 단련에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나름 건전한 취미 생활을 계속하려 했다.
“아 미안, 미안. 장난이야 장난. 여하튼 고맙다. 쓰바. 그래도 너 밖에 없네. 내잔 한잔 받아라.”
성현은 분위기를 바꾸려 리액션을 크게 하며 말했다.
“짜식 실없기는. 자 마시고 죽자.”
한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현은 정한을 부축해 택시에 간신히 태우고 5만 한 장을 기사님에게 건넸다.
“너 이씨, 인생 그따그로 살지마아. 인마. 너 이씨. 내가 시바. 어. 내가 끄윽.”
택시에 타고서도 정한이 횡설수설 말하지만 취중에 하는 말인지라 주어가 없었다.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네. 걱정 마슈.”
성현은 한참을 서서 떠나는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다.

* * *

“아저씨 불 있어?”
성현은 뜬금없이 나타나 불 달라는 이를 바라봤다.
‘이건 또 뭐냐?’
성현이 어이없는 눈으로 당돌한 여 고딩을 쳐다봤다.
고운 목소리를 가진 예쁘장한 여자애가 나 침 좀 뱉었소, 하는 표정을 본 적 있는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없어? 그럼 돈은 있어? 돈 좀 있으면 나랑 놀던가.”
성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여자애가 말했다.
“하······.”
기가 찬다. 기가 차.
담뱃불 빌리러 와서 원조까지 흥정한다.
“아-. 됐어. 하여튼 꼰대들 하고는······. 쳇!”
아주 건설적으로 사는 선량한 고딩께서 자기 말 만 하고 또 다른 사냥감을 찾는지 주변을 어슬렁댄다.
그러다 어리벙벙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성현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다가왔다.
“아저씨. 나 맥주 한 캔만 사줘.”
성현은 팔짱을 끼고 이 어린 중생을 어떻게 교화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나 사줘.”
무슨 맡겨둔 물건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기세가 사뭇 등등하다.
“가자.”
“으응?”
“가자고. 사달라며?”
“칫, 그럴 거면서 버티긴.”
성현은 여자애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이씨. 지금 장난해!”
“원료는 같은 거야. 뱃속에서 잘 숙성시키면 똑같아. 내가 해봐서 알아. 너도 출출할 텐데 이것 좀 먹자.”
성현이 건넨 보리차에 여자애가 화를 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현은 사가지고 온 음식들을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자신도 놀아봐서 안다 많이 놀아본 애들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랬다.
저 나이 때는 세상이 쉽게 보이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는 줄 안다.
그러다 나이 들고 철이 들면 세상이 녹록치않음을 알게 되고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물론 훈계를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가르치려 데려온 건 아니었다.
그저 길거리를 배회하는 여자애의 일상에 이런 어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일종의 유희라 생각했다.
“아. 진짜. 내가 이거므은게. 아즈씨. 꿀꺽. 정성을 봐서 먹어 주는 거야.”
삶은 계란, 컵라면, 김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 조그만 입을 통해 다 들어간다.
‘요즘 애들은 다 이리 맹랑한가?’
옆에서 보지만 정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천천히 먹어 김밥 하나 더 줘?”
말보다 행동이 빠른 애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가져가 몇 번 씹지도 않고 목을 넘긴다.
어디서 이런 물건이 나왔는지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은 뭐니?”
“왜, 동성동본일까 봐? 이제라도 생각 있어? 난 괜찮아 하룻밤에 그런 건 왜 물어. 누가 꼰대 아니랄까 봐.”
순간 욱했지만 참았다.
지금 성현은 착한 어른 코스프레 중임에 자중했다.
“너 학년은··· 아니다. 몇 살이냐?”
학년을 묻기보다 나이를 물었다. 혹시 모른다. 고등학생이 20살을 넘겼을 수도.
“내가 미성년자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그럼 맥주 하나 사주나?”
민증을 보여줄 애로 보이지도 않고, 속인 데도 알 길이 없다.
이번 질문도 패스.
“그럼, 집은 어딘데?”
“왜 알면 우리 집 같이 갈려고? 보기보다 엉큼한 꼰대시네.”
꿈보다 해몽이 좋다. 그리고 슬슬 임계점에 다다름을 느낀다.
“······크흠. 그럼 학교는 어딘데?”
“왜 다른 친구 소개시켜줘? 내가 스타일이 아냐? 나 보기보다 가슴도 커. 한번 만져볼래?”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말하는 투가 진짜 만져보라는 듯하다.
성현은 입을 닫았다.
평타, 평타, 평타. 크리티컬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심적으로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다.
“야! 이해미 뭐하고 쳐 자빠졌냐? 이게 지금 너 개기냐?”
껄렁한 걸음으로 세 명의 여자애들이 다가왔다.
조선 시대 양반보다 행세깨나 하는 8자 걸음이다.
한 명은 머리를 배배 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친구들이 뭘 하든 거울만 보며 자기치장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을 걸어온 애는 껌을 짝짝 씹으며,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애 이름이 해미였나 보네.’
해미는 불안한 눈을 들어 자기를 부르는 여자애들을 바라봤다.
“이 꼰대는 뭔데? 물주야?”
“이-욜. 이해미 물주 하나 물었냐? 근데 이년이 왜 대답이 없어.”
“아, 아니에요.”
민증에 잉크 자국도 마르지 않았을 애들이 머리에서 필터링 기능이 마비된 듯 말을 찍찍 내뱉었다.
“하아······.”
성현이 깊은 한숨을 내어 쉰다.
문뜩 몸에 사리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쥐방울만 한 애들이 아주 혀가 반 토막이다.
‘확 마! 키다리 아저씨 흉내 좀 냈더니. 별일을 다 겪네. 휴우-.’
성현이 착하고 심약해서 참는 게 아니었다. 냉철하고 필요 이상의 행동은 절제하고 있어 그런 것뿐이다.
‘내 자식도 아닌데. 훈계해본들······.’
“야. 빨랑 텨와 오늘 중으로 신고식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뒤지려고. 진짜 그러다 쳐 맞는다.”
“네. 언니··· 지금 가요. 아저씨 고마워. 쪽.”
불현듯 해미가 자신의 볼에 선명한 립 마크를 새기고 냅다 뛰어간다.
“진짜 요즘 애들 무섭네.”
성현은 얼떨떨한 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중얼거렸다.
잠시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모두 나름의 사정은 있는 법.
“자라나는 새싹은 즈려밟아줘야 더 잘 큰다.”
식물에 한해서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괜찮겠지?”
잠시 해미라는 여자애가 뛰어간 길을 돌아본다.
내심 걱정이 된다.
해미라는 애는 말은 툭툭 거칠게 하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했고 눈빛 또한 맑았다.
그 가진바 심성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에 나타난 세 명의 여자애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성현이 알아볼 정도의 독기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