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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7화

부서지는 마음 4

햇빛을 반사하며 성스러운 빛을 사방에 흩뿌리는 아름다운 물빛 검이 치켜올려졌다.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하얀 가면이 현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힘이 빠진 손에서 검이 흘러나와 바닥에 닿으며 카랑, 소리를 냈다.
‘죽는 건가?’
그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이 세계에서 시체 따윈 남지 않는다. 모두가 회색으로 굳어지다 황금색 빛무리가 되어 소멸할 뿐이다. 친구 목록에도, 파티 목록에도, 그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는 한, 기록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영원히.
“빌어……먹을…….”
그들이 죽은 것은 그의 탓이었다. 그의 사정 때문에, 그가 자신의 사정을 유리에게 말했기에 유리는 조금 무리하다는 것을,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모두가 따랐다.
살릴 수 있었다. 망설이지 않았다면 ORP는 죽지 않았다. 유리를 감싸고 날아오는 창을 막았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다. 베오가 죽을 때도, 수정이 죽을 때도,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그리고 이제 자신도 죽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소멸한다. 이 세상에서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 역시 어떠한 기억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겠지.
이기적인 망설임에 대한 형벌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검이 떨어진다. 허공에 물빛 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물빛의 검은 떨어져 온다. 검은 자신을 머리부터 양단하겠지. 일격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에 이은 추가타는 충분히 현성의 HP를 모두 날려 버릴 것이다.
이대로 이기적인 망설임에 대한 속죄를…….
그리고 그 찰나에 한 소녀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카강!
수호자의 검이 땅을 내려쳤다. 간발의 차이로 빗나간 검은 석재 바닥을 쪼개며 파고들었다. 수호자가 잘못 겨냥한 것이 아니다. 현성이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켜서 피한 것이다.
“빌어먹을……!”
목소리가 떨린다. 팀원 모두를 죽이고도 자신은 죽을 수 없다. 물밀 듯이 밀려드는 자기혐오에 미쳐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설령 죽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빌어먹을……!!”
이가 까득, 갈렸다. 놓아버린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온몸에 힘을 넣었다. <환몽의 수호자>의 검이 세로로 휘둘러진다. 현성은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온몸의 힘을 실어 그 일격을 받아쳤다.
까가앙!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굉음이 거칠게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충돌하며 흩뿌려진 불꽃이 주변을 한순간 밝게 비췄다. 현성의 힘에 밀려 <환몽의 수호자>의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아마 이 전투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면 경악을 숨기지 못할 위력. 스킬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참격만으로, 정예급 몬스터를 힘으로 튕겨내 버린 것이다.
단 일격만으로 두 팔의 근육이 툭툭 단선되어 간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떻게’라는 의문도 없었다. 자신이 발휘한 초월적인 힘의 정체는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그저, 지금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부딪치는 것뿐.
“미안해…… 잠시만…… 빌릴게…….”
메뉴가 움직인다. 손으로 조작할 필요도 없이 그저 뇌의 생각만으로 현성의 시야에서 메뉴가 움직이고 선택된다. 조작하는 것은 공용 인벤토리. 그곳에서……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해 준 청년이 사용하던 검을 선택했다.
차가운 강철의 날이 햇살을 반사해서 빛을 흩뿌렸다. ORP의 검을 쥔 것은 왼손. 두 손에 검을 한 자루씩 든 현성은 닥쳐오는 기사를 향해 공허한 시선을 보냈다.
기사의 아름다운 물빛 검이 가로로 휘둘러진다. 현성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그 공격을 회피하고 순식간에 기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에 들린 푸른 검이 휘둘러졌다. 시동기인 <초승달 베기>가 <환몽의 수호자>의 어깻죽지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깊게 갈랐다. 그에 이은 3연격 스킬인 <삼단 베기>는 각각 목, 심장, 복부를 베어 갈랐다. 그러고 나서 8연격 스킬인 <쾌속 연격>이 목에 2격, 심장에 3격, 복부에 3격을 각각 가했다.
단 2초, 그 안에 12연격의 연계가 들어갔다. 적의 남은 HP는 약 10%. 광포화 상태에 들어간 <환몽의 수호자>가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고가 가속한다. 온몸의 인지 기관이 가속한다. 적의 검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아니, 이것은 사고의 가속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미리 ‘보고’ 있을 뿐.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다듬어진 직감이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발휘되고 있었다.
적의 다음 공격을 예측한다. 발을 어디에 디딜 것인지, 검은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는지, 베기인지, 찌르기인지, 방어인지. 모든 행동을 미리 보고 행동한다.
그것은 이미 단순한 예측의 영역이 아니었다. 적의 모든 움직임을 사전에 정확히 ‘보고’ 대응하는 그것은, 이미 예지의 영역에 닿아 있었다.
오른손의 검을 내려친다. 왼손의 검으로 찌르고, 오른손에 쥔 검으로 옆구리를 깊게 벤다. 자신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내려쳐지는 검을 오른손의 검으로 튕겨내며, 동시에 왼손의 검으로 적의 심장을 뚫는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며 섬광이 되어 찔러오는 검을, 빙글 몸을 돌려 회피하며, 이검(二劍)에 의한 연속기를 그 빈틈으로 때려 넣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의 난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조차 그의 뇌에서 녹아내려 간다. 검을 휘두르는 그 속도는, 그 힘은 그야말로 그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완전히 품으로 파고든 현성은 어느새 자신의 인지조차도 쫓아가기 힘든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사의 검이 폭포처럼 내려쳐진다. 현성은 몸을 빙글 돌려 그 공격을 회피하고 왼손의 검을 <환몽의 수호자>의 복부에 깊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찔러 넣은 검을 뽑으면서 동시에 오른쪽 검으로 몸통을 깊숙이 갈랐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뇌가 불타는 것 같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 양팔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고, 폐는 기능을 잃은 듯 숨을 빨아들이지 못한다. 두 다리의 모든 근육이 단선된 것만 같다. 통증이 완화되는 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수준의 통증.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직감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공격의 대가이다.
하지만 그따위 것들에 굴복하여 주춤하는 일은 없다. 직감으로 적의 공격을 ‘보고’, 스테이터스 수치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힘과 속도로 적의 몸통을 가른다.
<환몽의 수호자>가 도약해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중단 자세를 취했다. 물빛의 검이 푸른 광채를 머금었다.
준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신속과도 같은 속도로 <환몽의 수호자>가 돌진해 오며, 그대로 푸른 섬광을 그리며 장검을 현성에게로 내려쳤다.
“큭……!”
두 검을 교차시켜 그 일격을 받아내자, 입에서 피를 토하듯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가드했음에도 HP가 주욱 깎여 나갔다.
일격이 무겁다. 금방이라도 팔에 힘이 풀려 일도양단당할 것 같은 느낌을, 현성은 받고 있었다.
너무 꽉 깨물어서 이가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깨물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조금씩 적의 검이 밀려 나온다.
“A……AAAAAAAAAA────!!!”
키이이이이이잉───!!
감정을 터뜨리듯이 터뜨린 힘은 두 자루의 검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환몽의 수호자>의 일격을 튕겨냈다. 단번에 적의 자세가 무너졌다. 힘에 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겠지.
적의 몸통이 텅 비었다. 그 빈 틈으로 현성의 검이 빨려 들어가듯 뻗어졌다.
오른손으로 발해진 <초승달 베기>가 적을 양단할 기세로 쏘아지며 연속기의 시작을 알렸다.
왼손에서부터 시작한 3연속 공격기, <삼단 베기>는 <환몽의 수호자>의 양 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에 깊은 검흔을 남겼다.
오른손에서부터 발해진 8연격기, <쾌속 연격>이 좌우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좌우 옆구리와 복부를 난자했다.
겨우 자세를 다잡은 <환몽의 수호자>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진다. 현성의 몸이 공중으로 도약하더니 한 바퀴 핑글 돌며 그 원심력을 이용해 <벼락>처럼 두 검을 내리쳤다.
그에 이어 몸이 한 바퀴 회전하며 왼쪽 가슴에 2격, 왼쪽 옆구리에 2격씩, 총 4격의 검격을 가했다. 이제 남은 HP는 약 1%.
현성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흰빛을 머금었다. 자신의 마지막 일격이자 이 스킬 연계의 종료기로서 <일섬>이 그의 오른쪽 검을 빌어 발해진다. 이것이 마지막 일격. 이제 자신은 더 이상 MP도, 사용 가능한 스킬도 없다. 이 일격이 끝나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지막 힘을 짜내 발하여진 <일섬>이 <환몽의 수호자>의 목 왼쪽 언저리를 뚫고 심장을 통과하여 허벅지 끝까지 깊숙하게 갈랐다.
그리고 남은 HP를 보자 0.5% 미만. 아직, 남아 있었다.
“아…….”
순간, 하얀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이 히죽, 웃은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최후의 일격이 떨어진다. 자신의 남은 HP는 30% 미만. 이 일격을 막을 방어 스킬이나 회피 스킬을 쓸 스태미나도, 튕겨내거나 반격할 MP도 없다. <일섬>의 사용 후 딜레이가 찾아와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피할 수 없는 죽음. 하지만…….
몸이 움직인다. 왼손에 들린 검이 칼날을 빛내며 휘둘러진다. 발동되는 스킬은 쿨타임이 3초 정도 남은 스킬인 <일섬>.
시야 하단에 표시된, 남은 쿨타임을 표시하는 숫자가 ‘3’에서 ‘5’로 고쳐진다. 그와 동시에 <일섬>이 발동되어, 흰빛을 뿌리며 <환몽의 수호자>의 명치에서부터 고간까지 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다.
우뚝, 물빛의 검이 현성의 어깻죽지에 닿기 직전에 멈춰 섰다.
정적이 흘렀다. 현성의 마지막 일섬을 받아낸, 신들의 정원을 지키는 수호자는 황금의 빛무리가 되어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했다.
주변에 아이템이 흩뿌려지고, 잠시 후 빛의 덩어리가 되어 현성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현성은 검을 내려친 그 자세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끝났……다…….”
쉰 목소리로, 현성의 입에서 허탈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렇다. 끝났다. 첫 번째 관문의 개방도, 그리고…… 그의 팀원들도.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던 ORP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자기들끼리도 시비를 걸며 티격태격하던 베오와 수정도 떠올랐다. 조용하고 냉정한 듯하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정이 많은 유진의 얼굴도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동안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힘이 되고,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던 유리의 얼굴도 지나갔다.
그들은 이제 없다.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의 재촉 탓에 이곳에 들어왔고, 그리고 그의 망설임 탓에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 있다.
“아…… 아아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언어능력을 잃어버린 입에서 끔찍한 괴성만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