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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4화

New Family 1

틸문의 첨탑 위로 흰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하늘을 나는 그 비둘기의 시선으로 본다면 틸문이라는 도시는 흰 눈이 쌓인 고요한 숲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대부분의 건물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희고, 모습도 정형화된, 소위 얌전하게 생긴 건물들이었다. 그리고 10만 명이라는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만약 시끌시끌하고 화려한 현대의 대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면 혹시 성직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은 화려하지 않고 정갈했으며, 시끄럽게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주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아무리 조용한 도시라 한들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쌓이기 마련이고, 그것을 해소할 공간은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면 진탕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떠드는 주정뱅이들의 ‘성지’가 곳곳에 존재했다.
그리고 최근, 이 세계를 찾아온 ‘이방인’들도 틸문 시의 경건한 분위기에 질려서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곳, ‘악마의 휴가증’이라는 다소 엉뚱하게도 들리는 이름의 식당은 그러한 성지들 중 하나였다.
“스물다섯이요?”
놀란 현성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서 울렸다.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게 안에서 자신의 목청을 자랑하듯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상당히 소란스러웠기에 그의 목소리는 민폐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되게 놀라시네요. 제가 좀 동안이기는 하죠?”
유리가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로서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대학교 입학 면접 때는 물론, 신입생 OT 때도, 아르바이트 면접이나 기업 인턴 면접에서도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술집에 가면 신분증을 제시해도 아르바이트생이 믿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본인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녀의 외모는 굉장히 어렸다. 피부마저도 젖살이 덜 빠져 하얗고 매끄러워서 누가 보아도 예쁜 소녀의 얼굴이었다. 때문에 유리는 그러한 반응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응? 여기 동안이 어디 있는데? 발육 부진은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놀려 대는 것은 그녀가 가진 이해력의 범주를 넘어가는 행위였다.
유리는 생긋 웃으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동안을 찾는’ 시늉을 하는 베오의 목을 그 가냘픈 팔로 힘껏 졸랐다. 그러고는 화사한 웃음을 띤 얼굴로 물었다.
“베오야, 다시 한 번 말해볼래?”
“껙껙…… 왜! 누나 발육 부진 맞잖아! 암만 봐도 초딩…… 꺽!”
“응∼ 그렇구나∼ 우리 베오가 아직 덜 맞았구나∼”
“꺽꺽…… 나는 폭력과 압제에 굴하지 않는다! 발육 부진 만세!”
베오는 사뭇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필사적으로 유리를 놀려 댔다. 비장한 표정을 짓느라 얼굴이 새파랗게 지릴 정도였다. 유리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베오의 목을 졸라대고, 그 모습을 보고 옆에서 수정[Crystal]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사실, <메이지>인 그녀의 근력으로는 아무리 힘껏 목을 졸라봐야 <버서커>인 베오에게 고통이 전해질 리가 없다. 결국 제풀에 지친 유리가 팔을 풀자 베오는 그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까워! 누나가 조금만 더 팔이 길었으면 정말로 아팠을 텐데! 너무 아깝다! 그치, 누나?”
“야, 그만해! 언니 울겠어! 내 일곱 살 사촌 동생처럼 으앙∼ 하고!”
미친 듯이 웃고 있던 수정까지 눈물 맺힌 눈으로 가세했다. 동갑내기 두 소년, 소녀의 정신 공격에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유리의 이마에서 힘줄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힘줄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즈음, 유리는 그 누구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짓고 쿠당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마치 <스피어맨>이 이러하랴 싶은 속도로 뛰어오른 유리는 순식간에 두 팔로 베오의 목을, 두 다리로는 수정의 목을 감고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위력은 <메이지>가 가질 수 있는 근력 스테이터스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장난삼아 끅끅거리며 숨 막힌 척을 하던 아까와는 달리, 정말로 여유가 없어진 베오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컥…… 컥……! 누…… 누나! 살려……! 컥……!”
“끅…… 끄르륵……!”
“아프지도 않잖아? 그니까 더 맞아야지?”
“누…… 누나…… 탭……! 탭탭! 살려……!”
확실히 이번에는 위력이 달랐다. 둘은 눈까지 뒤집어가며 고통을 호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화사한 분노로 인해 자신이 가진 스테이터스의 벽을 깨부수고 둘에게 목조르기를 선사하고 있는 유리는 전혀 팔을 풀 생각이 없었다. 베오는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항복 선언까지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가 버린 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현성의 앞에 앉은 단발 여성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잔에 술을 따랐다. 이름은 유진. 레벨 18의 <스피어맨>이라고 했다. 옆에서 벌어지는 난장판과 그녀의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 대비되어 오히려 무심하거나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유진은 술이 채워진 잔을 현성에게 내밀며 짧게 말했다.
“마셔. 환영주야.”
“아…… 네…….”
“말 놔. 동갑이니까.”
“네…… 아니, 응…….”
그녀에게는 기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 기묘한 기에 눌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유진은 그런 현성의 얼굴을 살짝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로 살피고는 옆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흘긋 보며 말했다.
“저건 곧 익숙해질 거야. 매일 있는 일례행사 같은 거라서. 그보다는…….”
유진은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따르고 현성을 향해 내밀었다. 건배를 하자는 제스처였다.
“파티 가입, 환영해.”
유진의 입가에 살짝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성은 착각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만큼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미소였다.
현성이 건배를 하려는 순간, 햇볕에 타서 옅은 구릿빛을 띤 털북숭이 손이 뻗어와 두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그 직후에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헤이∼ 누님! 저기 고딩 둘이랑 초딩 하나는 그렇다 쳐도, 나까지 따돌리면 안 되지! 나도 같이 한잔합시다!”
본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구릿빛 피부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고 굵은 털, 조금 굽은 등에 툭 튀어나온 입과 움푹 들어간 눈, 얼굴 가장자리를 덮고 있는 구레나룻 등 원시인 내지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닉네임마저 ORP.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내지 ‘오랄피’를 줄인 머리글자라고 했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었다. 유진은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시크하게 내뱉었다.
“술 먹기엔 진화가 덜됐어. 500만 년쯤 뒤에 와.”
“아∼ 누님! 고릴라도 대마초를 씹는데, 오랄피(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술 먹지 말란 법은 없지! 나도 한잔 주쇼!”
유진의 말을 그는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똑같이 놀림받는 처지인 유리의 태도와는 달랐다. 물론 두 경우의 질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유진의 태도가 굉장히 신랄하고 냉정해서 오히려 더 상처를 받을 것 같은데도 그랬다. 하지만 그의 닉네임이 ORP,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 것을 보면, 본인도 조금은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 덥수룩하게 난 구레나룻 수염을 밀어 올리며 히죽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유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ORP가 내민 잔에 쪼르륵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대마초 씹지 말라고 주는 거야.”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님!”
ORP는 능청을 떨며 잔을 받았다. 그런 후, 현성 쪽으로 고개를 돌려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형씨, 내가 한 살 어리니까 말은 편히 하시구요, 파티 가입을 환영하며 건배나 합시다!”
이 외모로 스무 살이라니…… 현성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피부 상태,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룻, 구릿빛 피부 등 어디를 보아도 최소 서른은 너끈히 넘을 것만 같은 외모였다.
말투도 스무 살짜리 이제 갓 성년이 된 청년에게 어울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무슨 사극 영화의 백정이나 혹은 시대극 깡패들이나 쓸 법한 말투 같았다. 외모 나이를 나눠 줄 수 있다면 10년을 뚝 떼어다가 유리에게 주면 딱 맞겠다고, 현성은 생각했다.
탕, 소리를 내며 세 개의 나무 잔이 부딪쳤다. 투명한 녹색을 띤 술을 현성은 조금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곧 목구멍 너머로 홀짝 넘겼다. 알싸한 술 특유의 느낌과 함께 기묘하게 시원하면서 달콤한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사과 향과 비슷한 것 같았다.
“먹을 만하지?”
유진의 질문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끌벅적하고,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술집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다행이네.”
그 말을 하며 유진은 살짝, 아주 살짝 웃었다. 워낙 표정이 없는 그녀였기에 그 작은 표정 변화도 굉장히 크게 보였다. 옆에서 그 표정을 본 ORP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 누님, 보다 보면 은근히 소심하다니까! 입맛에 안 맞을까 봐 걱정한 거잖수!”
“시끄러.”
유진은 한마디 말로 그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이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오자, 기묘한 매력이 풍겼다.
그때, 유리가 그들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변에서 술잔을 하나 찾더니, 유진에게 힘없이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줘……. 힘쓰니까 목이 마르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유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쪼르륵,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유리는 단숨에 한 잔을 다 마셔 버리더니 ‘후아’ 하고 숨을 골랐다.
“저 망할 자식들…… 체력은 더럽게 좋아요, 아주…….”
그 ‘망할 자식들’은 현재 산소 부족으로 술집 바닥에 기절해 있었다. <메이지>가 육탄전으로 <버서커>를 저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위대하다고 평가될 만한 업적이지만, 그녀 스스로는 그런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십 대의 저력은 위대했다. 곧 십 대 둘은 침을 질질 흘리며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하며.
“술!”
“술!”
“…….”
저럴 때 보면 정말 마음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둘은 함께 테이블로 척척 걸어와 앉고는 각자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베오와 수정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생, 즉 미성년자였다. 그런 둘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술을 요구하자 현성은 어이가 없어져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유진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말없이 그 둘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망설이던 현성이 결국 유진에게 물었다.
“저기…… 둘 다 미성년자 아니야?”
“맞아.”
“그런데 마셔도 돼?”
“응.”
“아…… 저기…… 그러니까…….”
그녀의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현성이 되레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옆에서 유리가 나서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이 세계에서는 열여섯 살부터 성인이더라고. 그래서 음주도 열여섯 살부터 가능해. 한국에서랑은 기준이 다른 거지.”
그 말을 듣고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중학교 당시 배운 과거 역사들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예전에는 10대 후반이 결혼 적령기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 세계도 중세와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야.”
유진이 짧게 덧붙였다. 옆에서 베오와 수정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고롬∼ 고롬. 따라서! 우리의 음주는 합법이란 말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이거지!”
그 웃는 얼굴을 보니 고등학생다워서 귀엽기는 했다. 현성은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보나마나 원래 세계에서도 몰래몰래 술을 구해다가 마셨겠지.
그런 둘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현지도 저 아이들처럼 몰래 술을 먹고 다니진 않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곧 부정했다. 천사 같은 동생이 그런 일탈을 저지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여동생은 엇나가지 않고 천사처럼 착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형적인 팔불출 오빠의 망상일 테지만, 그 스스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 자, 잡담은 그만하고! 건배합시다, 건배! 현성 형씨 환영 파티잖수!”
ORP가 언제 채웠는지 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분명 한 잔밖에 먹지 않았을 텐데 이미 두 볼이 붉어져 있었다. 그다지 술이 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 술은 결코 약한 것도 아닌데 한 번에 많이 들어가는 탓에 취하기 쉬운 술이기는 했다.
ORP의 말에 유리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이미 마셔 버린 사람―현성과 유진, 그리고 유리 본인―들의 잔을 유리 본인이 직접 채워주고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안타깝게도 남들이 앞으로 내민 높이만큼밖에 안 됐다.
“자, 그럼 짠하자, 짠! 우리 파티에 새로 들어온 현성이를 위해 건배!”
“건배!”
타앙!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리고 나서 각자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현성도 그 기묘한 단맛이 나는 술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방금 전, 건배사에서 유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지만, 현성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연상이다. 그것도 네 살이나. 그러니 그렇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