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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0화

(Prologue) 평범한, 그러나 특별한

‘바벨탑’ 87층, 던전의 끝. 그 높이만 10m에 가까울 거라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 앞에 약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가죽 갑옷에 검을 들고, 누군가는 이야기 속의 마법사가 입을 법한 로브를 입고 오른손에는 두꺼운 책, 즉 마도서를 들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풀 플레이트 아머와 방패를, 누군가는 활을, 누군가는 창을 들고 있었다.
연령대는 적게는 10대 중반에서부터 많게는 40대 중반까지, 폭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들은 전쟁터로 들어가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맨 앞에 서 있던 청년, 현성이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모두 각자가 든 무기를 치켜들었다. 현성은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휘는 맡긴다, 카인.”
“Roger that.”
녹빛 머리에 녹빛 로브, 그리고 목재로 만들어진 긴 지팡이를 든 남자, 카인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감 있는 태도에 현성은 입가를 밀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짧지만 무엇보다도 무거운 한마디가 떨어지자 모두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현성은 검을 든 오른손으로 철문을 살짝 밀었다.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굳게 닫힌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거대한 원형의 방이 나타났다.
지름 약 200m, 높이 100m에 달하는 거대한 방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방의 크기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방의 주인, 그 거대한 존재감에 모두의 주의가 집중되었다.
아름다운 은빛 매였다. 날개도, 몸도 모두 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깃털로 덮여 있었다. 날개를 접고 잠을 자듯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지금조차 몸높이가 10m는 되어 보였다. 은빛 매의 머리 위로 고유명이 떠올랐다.
<흐래스벨그(Hræsvelgr)>. 그 뜻은 ‘시체를 삼키는 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이 가진 버프들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일정 수준까지 아군에게 가해지는 대미지를 차단하는 <세이크리드 월>,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전반적인 스탯을 증가시키는 <블레스>, 마법 방어력과 속성 내성을 증가시키는 <숲의 가호> 등, 다종다양한 능력을 지닌 버프들이 모두의 몸을 감쌌다.
그 모든 축복들을 받고서, 아름다운 푸른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로 몸을 감싸고 거대한 타워 실드와 장검을 든 청년이 포탄처럼 은빛 매, <흐래스벨그>를 향해 튀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모든 멤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를, 10m 사정권 진입. 후위 부대 위치 완료. 시작해.』
지휘하는 ‘드루이드’ 청년, 카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카를이라 불린 청년은 돌진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며 검을 뒤로 뺀 자세로 반경 10m 내의 적을 도발하는 <가디언>의 스킬, <하울링>을 사용했다.
물빛 파동이 카를의 반경 10m 범위의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카를이 발한 파동은 자고 있던 은빛 매를 덮치고, 난데없는 공격을 당한 <흐래스벨그>는 붉게 빛나는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키이이이이이!!!!!!!
<흐래스벨그>가 포효했다. 듣는 것만으로 고막을 터뜨려 버릴 듯한 소리로 울부짖은 아름다운 은빛 매는 본격적으로 그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30m는 족히 돼 보였다. 루비처럼 아름다운 붉은빛으로 빛나는 눈이 카를을 포착했다. 카를이 사납게 미소 지으며 외쳤다.
“와라, 닭대가리! 도축해서 치킨으로 만들어주지!”
키야아아아아아!!!
카를의 외침에 흐래스벨그는 귀청을 터뜨릴 듯한 포효로 대답했다.
카를의 검이 붉은빛으로 빛나더니, 약 5m 길이의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했다. 카를은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흐래스벨그>를 깊게 베었다. 자신에 대한 적대치를 크게 상승시키는 가디언만의 공격 스킬,<팬텀 블레이드>다.
『적대치 최대. 원거리 공격진들 공격 개시. 전위직들, 접근해.』
카인의 지시가 떨어지자, 형형색색의 공격이 은빛 매에게 쏟아졌다. 번개도 있고, 화염도 있으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도, 섬광처럼 보이는 저격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몸으로 받아내며, <흐래스벨그>는 눈앞의 중갑 전사에게 집중했다. 그를 부리로 쪼고, 날개로 후려치고, 발로 밟아가며 공격을 이어가던 <흐래스벨그>는 그 거대한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캬아아아아아!!
『범위 공격! <팔라딘>들은 범위 방어 전개! 전위직들은 측면으로!』
다시 떨어진 카인의 지시. 원거리 공격계, 회복계 직업들과 함께 이동한 <팔라딘>들은 방패를 앞세워 후위직들을 보호하듯 나섰다. 그들의 방패가 황금빛으로 변하더니, 곧 황금빛 방어막이 전면에 전개되었다.
그 직후, <흐래스벨그>의 날개가 공중에서 크게 퍼덕였다.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흐래스벨그>의 전방에 거대하고 강력한 돌풍이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듯한 기세로 불어닥쳤다.
가장 앞에서 공격을 막던 가디언 카를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후위 직종들을 지키던 <팔라딘>들도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그 공격을 버텼다. 돌풍이 멈추고 <흐레스벨그>가 내려오자 흙먼지가 걷히며 카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HP 감소량 약 30%. 카를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오자마자 회복계 직업들의 회복 스킬이 그를 휘감았고, 곧 시야 아래쪽에 표시된 HP 게이지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돌풍 공격 카운트 시작. 공격 재실시.』
『카인, 전위직들 위치 완료. 공격 시작한다.』
『Roger. 시작해. 돌풍 공격의 전조 동작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니까, 즉시 측면으로 피하고.』
카인의 말이 떨어지자, 어느새 다가온 전위직들의 무기가 은빛 매에게 휘둘러졌다. 돌풍처럼 회전하는 창이 강철보다도 단단한 은빛 깃털을 꿰뚫고, 붉은빛을 머금은 할버드의 육중한 도끼날이 깃털을 부수고 그 안의 피부를 찢었다.
<흐래스벨그>가 울부짖는다. 고막을 터뜨릴 것만 같은 소음 공해를 일으키며 거대한 은빛 매는 거대한 오른발을 들어 방패를 든 청년을 겨누고 오른발을 내려찍었다.
그 직전, 현성의 검이 <흐래스벨그>의 왼쪽 다리를 갈랐다. 은빛 선을 허공에 그리며 휘둘러진 현성의 검은 <흐래스밸그>의 다리 힘줄을 도려냈고, 지탱하던 다리의 힘줄을 잃어버린 <흐래스벨그>는 굉음과 흙먼지를 퍼뜨리며 지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층 더 거세어진 공격이 지면에 쓰러진 은빛 매에게 쏟아졌다. 바위조차 녹일 고열의 화염이 그 몸을 불태웠고,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혹한의 바람은 끊임없이 매의 몸을 괴롭혔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은 계속해서 매의 몸을 관통하며 상처를 남겼다.
그 공격을 뿌리치려는 것처럼 <흐래스벨그>의 거대한 돛과도 같은 날개가 휘둘러졌지만, 바닥에 엎드린 채 성급하게 휘두른 일격일 뿐이었다. 근접 부대는 그런 어설픈 일격 따위는 가볍게 회피하며 더욱 무겁고 날카로운 일격을 그 몸에 꽂아 넣어 적의 죽음을 시시각각 앞당겼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무기를 휘두르고, 활시위를 당기고, 마법을 영창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게임을 한다는 즐거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바벨탑’. 무한한 부활의 은총을 받는 이 세계에서, 단 한 번의 죽음이라도 진짜가 되는 유일한 장소. 그렇기에 그들은 이 싸움에서 그들의 작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목숨을 걸었다.
마치 판타지 세계의 일원 같은, 또는 거대 괴수와 맞서는 영웅들의 모습을 한 그들 중 이세계(異世界)의 주민은 없었다. 그들은 영웅도, 전사도, 판타지 세계의 기사들도 아니었다.
각자가 각자의 삶을 가진, 누구보다도 평범한 이들이었다. 학생도 있다. 직장인도 있다. 주부도 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친구이고, 사랑스러운 자식이며, 자애로운 부모였다.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그렇기에 빛나는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펜 대신 검이 쥐어져 있었다. 식기구를 잡던 손은 활을 쏘고, 고객에게 상냥한 말을 건네던 입은 마법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 선택해라. 목숨을 걸고 너희 본래의 삶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마련해 준 이곳, ‘낙원’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리에 각인된 목소리였다. 삶을 잃어버린 그들은, 삶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무기 따위는 잡아본 적도 없는 손에 갖가지 무기를 쥐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었기에 힘을 모았다. 그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원래의 삶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삶이 주어지던 날, 이 모든 것이 시작된 3년 전의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