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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유현이 네가 이 시간에 우리 애랑 무슨 일로 온 거니?”

뭘 생각한 건지, 갑자기 히죽히죽 웃으며 물어 오는 호태의 모습이 유현에겐 욕심 많은 간사한 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곧 자신의 장인어른이 되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설영의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였지만, 나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대체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이 아저씨는 궁금하구나. 일단 앉아라. 설영이 너도 앉고.”

호태의 제안으로 설영과 유현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설영은 여전히 긴장을 한 것인지, 간혹 혀로 입술을 적시거나 아니면 두 눈을 심하게 깜빡였다. 여전히 잡고 있는 손도 미세하게 떨려 왔다.

“누가아 왔어요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이 열리고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설영의 엄마, 정이가 나왔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설영과 유현을 발견한 정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협박을 일삼던 사체업자들, 그리고 설영에게 있었던 끔찍한 그날 이후로 정이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할 만큼 괴로워했다.

그러다 술 몇 잔을 마셨는데, 그 뒤로는 습관이 되어 밤낮 가리지 않고 괴로울 때마다 술을 마시다가 중독자까지 되어 버린 거였다.

“유현이가 웬일이야?”

고왔던 전과는 달리 많이 상한 얼굴을 한 정이가 입술을 떼어 내자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 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마, 잘 지내셨어요? 라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은 참 형식적이고 따분해서 싫기도 했지만, 전혀 잘 지내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물어보기엔 적합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너 독일로 유학 갔다고 하지 않았니? 어머,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아차차차, 설영이 너는 어떻게 됐니? 그 맞선 말이야. 또 실패야? 또?”

술에 취해 발음도 새고 횡설수설하며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정이를 보고 설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영은 힘을 주어 손을 뺐고, 이번엔 유현 역시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엄마. 일단 들어가서 한숨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설영이 정이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지만, 정이가 심하게 반항했다. 그러다 팔을 휘젓는 과정에서 그만 설영의 얼굴을 가격해 버리고 말았다.

“아!”

유현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난 괜찮아.”

맞은 얼굴을 가리며 설영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익숙해 보이는 탓에 유현의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정이의 행동에 창피했는지, 앉아서 한심하게 바라보던 호태가 결국 일어났다.

“당신 들어가 있어!”

“당신은 왜 나를 장승 취급 해요?”

“내가 언제 그런 취급을 했다고……. 그러게 누가 대낮부터 그렇게 술을 마시래?”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술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당신이 뭔데 나를 그런 취급 해!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몰라?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그만 못 해? 손님도 와 있는데, 이게 무슨 추태야!”

“유현이가 무슨 손님이야!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 지네 집처럼 매일 들락날락한 애인데! 독일에서 왜 돌아왔느냐고 아주머니가 너한테 물었잖니?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싸가지 없게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만 있어? 너도 이 아줌마가 한심해?”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동정도 당황스러움도 짜증도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설영은 유현을 몰아붙이는 엄마 때문에 상황이 곤란했고 유현에게 미안했다.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그게 이게 무슨 막말이야!”

호태가 정이를 말렸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남의 자식만 귀하고 네 자식은 안 귀하니? 아, 아, 나도 우리 설영이한테 상처 많이 줬지, 참. 근데 그게 다 당신 때문이야. 전부 다 당신 탓이라고!”

악다구니를 쓰던 정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어 버리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부모님의 큰소리에 설영이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유현은 눈치챘다.

유현은 가늘게 떨고 있는 설영의 손을 잡아 주려고 뻗었다가 관뒀다. 지금의 위로가 행여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정이는 결국 잠이 들었고, 호태가 방에 눕혀 놓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유현은 정이의 모습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정이는 온화하고 착한 아주머니셨다. 냉정하고 차갑기만 한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정이는 언제나 말도 잘 들어 주시는 곱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저렇게 변해 버려 몇 년을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한데, 자식인 설영은 얼마나 더할까 싶어, 마음이 더욱 착잡하고 무거웠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그녀를 쉽게 위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막막하기도 했다.

“정신없었지? 내가 사과하네. 미안해.”

방에서 나오며 하는 호태의 사과는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설영이 너는 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 내와라.”

설영은 부모님의 격한 싸움에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일에 익숙해질 리가 없을 테니, 그 후유증이 오래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상태로 뜨거운 물이라도 붓다가 다치면 큰일이다.

“저는 차를 마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설영이가 옆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현의 말에 호태는 일어서려던 설영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 말했다. 유현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입술을 떼어 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아저씨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그래. 무슨 말?”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망설이고 머뭇거릴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어쩌면, 수형이 설영의 소식을 전했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호태의 얼굴이 사악하다고 느낄 정도로 환하게 변해 갔다. 탁한 눈에 생기까지 도는 것 같았다.

“강 회장님은 알고 계셔?”

“어렸을 적부터 설영이를 참 예뻐하셨어요.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우리 유현이가 어렸을 적부터 참, 야무지고 똑똑해 이 아저씨가 좋아했었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야무지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EG그룹의 막내아들이니 좋아하셨겠죠,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건 철모르던 어렸을 적에도 느끼고 있던 일이었다.

“그럼 나는 우리 유현이만 믿어.”

마지막까지 설영의 의견은 묻지 않는 비정한 호태가 유현은 어이없었다.

“설영이랑 잠깐 얘기 좀 하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유현과 설영이 밖으로 나왔다. 작은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점점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하늘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설영이었다.

“우리,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하기 싫은 거야?”

“응?”

“내가 싫은 걸, 계속 그렇게 돌려 말하는 중이냐고.”

“…….”

“눈치 없는 내가 못 알아차리는 중인가?”

살짝 날카로운 유현의 질문에 설영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싫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그냥 나는…….”

마음이 너무 뒤숭숭하고 이상한 건 사실이다. 지금 이게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무서울 정도로 겁이 났다.

20년을 넘게 친구로 지내면서 유현은 어느 순간부터 설영에게 남자로 다가와 있었다. 고백을 하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유현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그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이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에 생겨난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후자라면 유현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런 제 마음을 알게 된 유현이 실망하고 떠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도 있었다.

사실 모르겠다. 정확하게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이 마음의 정의를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는 것인지 설영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 그냥, 지금 내 기분이 그래. 내 기분을…… 너라도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결국, 왈칵 눈물을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눈물을 터트리는 순간, 유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울리지 않기로 했는데……. 지켜 주기로 했는데, 그걸 당장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유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우는 설영을 말리거나 달래 주지 않았다. 이렇게 엉엉, 울어 버려야지만 그 기분이 그나마 조금 풀릴 거 같아서.

대신 그녀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곁에 있어 주었다. 이제 몇 번은 어겼던 곁에 있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렇게 소리 없이 곁에 있어 주었다.



* * *



― 너 지금 어디야.

설영을 두고 나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일단 집으로 가야 했다. 둘째 형에게서 온 전화 때문이었다.

“나 이제 집에 가려고.”

― 미친 새끼가 사고 쳐 놓고 아무렇지도 않네?

“사고라고 얘기하지 마.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도, 남에게 폐 끼치는 일도 아니니까.”

― 말이나 못 하면. 야, 지금 큰형이랑 어머니는 말씀 한마디도 안 하시고 아버지는 방방 뛰면서 난리 났어, 이 자식아. 너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짓을 저질러? 아무 허락도 없이?

“형은 내가 언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누구 허락받고 진행한 거 본 적 있어?”

― 미친놈. 세상 겁나 멋있게 사네. 부럽단 말이야.

그나마 집에서 가장 친근함이 있는 건 둘째 형이었다. 아마 큰형과 어머니는 지금 냉기를 풍기며 소파에 꼼짝없이 앉아서 유현을 기다리고 있을 거였고, 아버지는 집 안 구석구석을 정신 사납게 들락날락하면서 목을 부여잡거나 찬물을 들이켜고 계실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둘째 형은 방에서 몰래, 저에게 집안 분위기에 대한 보고를 하고 있을 거였고.

독일로 유학을 간다고 할 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까.

모두가 반대한 와중에 둘째 형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캐리어를 사 줬다. 짐이 여러 개면 번거로우니 이곳에 다 담아 가라며.

겁은 안 난다.

다만, 퉁퉁 부운 설영의 눈만 자꾸 떠오른다. 저 집에서 술에 취한 어머니께 어떤 폭언을 듣고, 그저 제 성공의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아버지에게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 자꾸만 걱정이 된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커다란 철제문이 열리고 널찍한 정원을 한참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권 비서와 가정부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며 유현을 맞이했다.

권 비서는 유현이 태어나기 전부터 강 회장의 수행 비서로 일을 하다 나중엔 단단한 신뢰로 집안일까지 봐주게 된 사람이었다.

고집이 세서 어머니인 서 여사에게 유난히 핀잔과 잔소리를 많이 듣는 유현에게 늘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 주던 권 비서의 얼굴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권 비서님. 저 어머니한테는 벽이잖아요, 벽. 어머니가 아무리 내리치셔도 무너지지 않는 벽.”

그런 권 비서를 향해 유현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다만, 도련님도 서 대표님도 상처받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

“거실에서 가족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긴 복도를 한참 지나 도착한 거실에서 유현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아버지 강 회장이었다.

“유현이 네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