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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긴장을 한 탓인지, 입술이 계속 마른다.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마셔 갈증을 해소하려고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저기요.”

설영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른 뒤 물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직원이 물을 따라 주는 동안 시선이 제 얼굴 한쪽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설영은 직원이 자신의 얼굴을 왜 쳐다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습관처럼 오른쪽 머리카락을 앞으로 더 흩트려 놓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스테인리스 꽃병에 제 모습이 비쳤다.

아무리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려 보아도 관자놀이부터 눈 밑에까지 나 있는 지독한 화상 흉터 자국은 가려지지 않는다.

이 흉터 때문에 맞선 자리에서 거절당한 것이 벌써 다섯 번째. 이젠 설영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가 이렇게 구박을 받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 다 너 때문이야, 너!’



술을 마시고 악에 받쳐 윽박을 지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좋은 남자를 물어 오란 말이야. 그래야 네 아빠가 나를 좀 볼 거 아니니? 엄마도 좀 살자. 네가 시집을 못 가도 내 탓, 네 얼굴이 그 모양이 된 것도 전부 내 탓. 하, 정말…….’

전부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이다. 엄마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심할 때는 호흡 곤란이 올 때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엄마 생각을 하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직원이 다 채워 주고 간 미적지근한 물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이었다.

“이설영 씨?”

뒤에서 들려오는 제 이름에 설영이 반사적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꽤 훈훈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호감이 가는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외모만 보고 놀기 좋아하고 잘 깐죽거리게 생겼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이라 여기며 설영은 얼른 생각을 거두어 냈다.

“이설영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QWE그룹의 김민성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민성에게 설영도 두 손으로 얌전히 악수를 청했다. 인사를 하고 눈을 치켜뜬 남자의 시선이 설영의 오른쪽 얼굴로 향했다.

이젠 감흥조차 없는,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남자는 곧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거나 놀란 얼굴을 할 것이다.

“얼굴이…….”

하지만 이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예의가 없는 남자인 듯싶었다.

“얼굴에 뭐가 있는 거 같은데……. 잠깐만.”

이전의 남자들은 그래도 못 본 척해 주었는데, 이 남자는 손을 뻗어 설영의 머리카락까지 치워 볼 작정인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싫어하는 티를 냈음에도 제게로 뻗어 오는 남자의 손길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싶은데, 그 말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 불똥이 엄마에게로 튈까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혹시 얼굴에 상처가 난 건가요?”

“……네.”

“상처가 꽤 깊어 보이는데? 설영 씨 올해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물일곱 살이요.”

“스물일곱……. 설영 씨, 나 몇 살인지 알고 나왔어요?”

질문을 하는 민성의 얼굴엔 어이없다는 비웃음기가 가득했다.

설영은 지금 이 맞선 자리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쉽게 자각할 수 있었다.

“서른……아홉이요.”

“열두 살 차이죠, 열두 살. 띠동갑이에요, 우리.”

“네.”

“원래 이 바닥 웬만하면 다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랑 연결해 주려고들 하거든요. 굳이 나이 많은 남자한테 시집보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능력 있는 집안들이니까. 그건 알고 있죠?”

“네…….”

“그런데 열두 살이나 어린 여자가 맞선을 나온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

“얼굴에 하자가 있어서 그랬던 거군요.”

상처받지 말자.

지금껏 수시로 들어 왔던 말이기에 상처받지 말자,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설영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었고, 손에는 축축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하, 기가 막히다. 날 무슨 장가 못 가서 환장한 놈으로 봤나?”

남자의 경멸스러운 눈빛이 설영의 상처 난 곳을 향해 내리꽂혀 있었다.

“이쪽 젊은 남자애들은 굳이 거들떠도 안 보니까, 나같이 나이가 좀 있으면 환장할 줄 알고 내보낸 거 아니야. 그렇죠?”

“…….”

“평생 같이 살 여자의 얼굴에 이런 흉측한 흉터가 있으면 아무리 젊어도 그게 커버가 안 되는데.”

이전에 보았던 남자들의 무례함을 훨씬 뛰어넘었다. 정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방을 이렇게 불쾌하게 만드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맞선 꽤 많이 봤죠? 그때마다 이거 때문에 거절당하고.”

“…….”

“상처 말고는 얼굴도.”

민성은 설영의 몸을 끈적끈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뭐 나쁘지는 않은데 말이야.”

설영은 피가 뜨거워질 정도로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의 모습에도 참았다.

“내가 상처를 너무 크게 봤나?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작을 수도 있으니, 한번 제대로 봐 봅시다. 혹시 알아요? 이 상처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져서 내가 뭐, 그쪽 기꺼이 데리고 살아 줄지.”

남자는 아예 설영에게 상처를 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다시 손을 뻗어 왔다.

“보여 드리기 싫어요.”

“뭐가 싫어요? 어차피 결혼하면 다 보여 주게 되어 있는데, 평생 그 상처 숨기고 살 수 있어요?”

“…….”

“어디 좀 봅시다. 어느 정도인지, 내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아니에요.”

남자의 손이 기어코 설영의 앞머리까지 닿았을 때였다.

“싫어하는 거 안 보입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니, 자신과 남자 사이에 유현이 서 있었다. 그것도 남자의 팔을 잡고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고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유현인데도 반갑지 않은 건 상황 때문이었다. 유현은 민성의 손을 마치 금방이라도 부러트려 버릴 것처럼 아주 강하게 잡고 있었다.

“아아. 이거 안 놔?”

제 팔을 붙잡은 남자에게 한마디 하려던 민성이 눈을 끔뻑끔뻑 뜨더니 다시 한번 유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떤 기업이든 쉽게 건들 수 없는 EG그룹의 막내아들 강유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허비된 것 같진 않았다.

민성은 다급하게 팔을 빼내며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혹시, EG그룹 회장님의 막내아드님 아니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QWE그룹의…….”

“전 하나도 안 반가우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좀 비켜 주시죠.”

단호한 유현의 말에 민성이 당황해서는 설영과 유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EG그룹 아드님이 이 여자랑 어떤 인연이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여자’라고 말을 할 때, 설영을 위아래로 훑는 민성의 무례한 행동이 유현의 화를 더욱 돋웠다.

“물어봐도 됩니다. 어차피 대답은 하나니까.”

“…….”

“이 맞선 자리 파투 났으니까.”

자신을 대변하듯 말하는 유현에 설영은 얼른 입술을 떼어 냈다.

“유현아…….”

유현은 말리려는 설영에게 아예 등을 보이며 민성을 마주 보았다. 자신보다 큰 체격과 살벌한 눈빛에 민성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당장 꺼져.”

민성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괜히 설영을 노려보다가 앞에 서 있는 유현의 사나운 눈빛을 마주했다.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유현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자신의 회사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EG그룹의 아들이다. 그의 심기를 잘못 자극시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성은 상한 자존심을 뒤로하고 얼른 자리에서 벗어났다.

설영은 또다시 집에서 몰아닥칠 엄마의 폭언에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 버린 유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타나서 내 맞선 자리를 멋대로 파투 내면 어떡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야?”

유현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맞선 자리를 정말 파투 내고 싶었던 건 나였으니까.

“내 일이야. 네가 참견할 일 아니잖아.”

“지켜 달라고 그랬잖아. 네가.”

생각난다.

유치원에서 나오는데, 커다란 딱정벌레가 있었고 그걸 보고 무서웠던 설영은 앞서 걷던 유현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저 벌레로부터 자신을 지켜 달라고 했었다.

정말, 이젠 별로 무섭지도 않은 벌레를 무서워하던 어린 시절에 했던 얘기.

“겨우 여섯 살 때 했던 이야기일 뿐이잖아. 고작, 벌레를 보고 한 얘기잖아.”

“그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잖아. 난 한번 말한 건 꼭 지켜.”

아무렇지 않게 맞은편에 앉아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며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는 유현을 설영은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속이 애타는 자신과는 다르게 지나치게 여유 있는 모습이다.

“일단 차라도 시키자.”

지금은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 먼저 가 봐야겠어. 파투 난 맞선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으려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거든.”

설영이 의자에 두었던 가방을 서둘러 챙겼다.

“우리 결혼하자.”

하지만 다음에 들려오는 말에 설영은 도통 발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확실히 잘못 들은 것이라 확신하며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 유현을 마주 보았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결혼하자고. 우리.”

놀라 묻는 설영과는 달리, 유현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강유현. 내가 말했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

가장 의지하고 있는 친구마저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설영의 서운하고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유현의 두 눈동자는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

“넌 어쨌든 결혼을 해야 하고, 난 별 같잖은 새끼들한테 네가 상처받는 거 못 보겠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나랑 하자고. 그 결혼.”

자리에서 일어선 유현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설영에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가 절실히 감추고 싶어 했던 흉터를 가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치웠다.

유현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마치, 여태 상처받았던 설영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아 왈칵,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후드득, 결국 참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투명한 눈물들이 뺨을 적셨다.

상처를 어루만지던 유현의 손이 이번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설영의 눈물을 닦아 주는 건 언제나 유현의 몫이었다.

“이설영.”

오늘따라 자신을 부르는 유현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현의 두 눈에 담겼다.

“내가 너 지켜 줄게.”

유현의 손이 설영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제 허리춤에 놓았다. 설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유현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니까, 내 옆에 이렇게 꼭 붙어 있어.”

언제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