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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똑똑.

고요한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리자 진욱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들어오라고 건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곧 사무실 내에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변호사님. 방금 전화가 왔었는데. 한울유치원이라고…….”

“유치원이요?”

유치원이라는 소리에 놀랐는지 진욱이 얼른 고개를 들자 사무장인 은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답니까?”

“오늘 유치원이 일찍 끝났다는데. 아직 한이만 하원을 못 하고 있다고…….”

은영의 말에 진욱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탁상 달력을 보고 얼른 의자에 걸린 제 슈트재킷을 집어 들었다.

“사무장님, 미안한데 저 먼저 퇴근합니다.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좀 부탁할게요.”

진욱은 은영의 대답을 들을 새 없이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뛰었다. 그리고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급하게 차를 몰면서도 진욱은 자신의 무신경함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분명 오늘 유치원 대청소 날이라 아이들을 일찍 하원시킨다는 것을 듣고 달력에 따로 체크까지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처리했던 일들이 어그러져 바로 눈앞에 있는 달력을 볼 새가 없었다.

거기다 오늘은 한을 봐 주시던 어머니까지 모임에 참석하시는 바람에 아이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다.

진욱은 빠르게 차를 몰며 몇 번이고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하원시킨다고 전달받았던 시간보다 3시간이 지나 있었다. 진욱은 초조함에 더욱 속력을 높였다.



한편, 한의 부모님께 전화를 마친 연주는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방으로 걸어갔다. 벌써 아이들을 보낸 지 3시간, 대청소를 끝낸 지 1시간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아직 방에는 한이 잠들어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싫다며 제 옆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을 정리하더니 그게 제법 피곤했는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쩜, 자는 모습도 천사 같을까.”

평소 유치원 내의 선생님들 사이에서 아기 천사로 불리는 아이는 자는 모습 역시 천사 같았다. 연주는 가만히 한이 자는 모습을 내려보다 혹시 제 기척에 아이가 깰까 싶어 조심히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분홍반으로 들어갔다. 이제 곧 아이를 데리러 올 부모님에게 챙겨 보낼 가방을 챙겼다. 원아 수첩, 도시락 통, 수저 통, 물병…… 하나하나 꼼꼼히 가방에 챙겨 넣은 연주가 다시 한번 가방 안을 살피는데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연주가 가방 지퍼를 잠그고 얼른 복도로 나왔다.

“누구세요?”

한의 부모님일 거라 생각하고 가방을 들고 나온 연주는 학부모라고 하기엔 훤칠한 젊은 남자가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누구냐 물었다.

“최한 아빱니다.”

“네? 아, 네! 안, 안녕하세요. 아버님.”

“한이는…….”

연주의 인사를 듣긴 한 건지 아이부터 찾는 남자에 연주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아이가 잠이 들어서요.”

“어디에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가 아이의 위치를 묻자 연주는 얼른 손짓을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남자가 따라서 올라왔다. 연주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뭔가 말이라도 꺼내려 했지만 곧 아이가 잠들어 있는 방에 도착해 생각을 접었다.

그는 연주가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누운 아이에게 다가서더니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고는 조용히 한의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한아? 최한.”

“우음. 아빠?”

“응. 아빠가 너무 늦게 왔지? 미안.”

“아니에요. 아빠.”

“이제 집에 가자. 아들.”

남자는 이내 아이를 안아 들곤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연주도 남자를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한이가 워낙 착해서 청소도 도와줘서 좋았어요.”

“아, 네.”

“이거 한이 가방이고요. 원아 수첩에 내일 준비물을 적어 두었으니까 꼭 챙겨서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연주는 가방을 남자에게 넘기곤 안겨 있는 아이의 손을 살짝 잡고 인사했다. 그러자 아이 역시 연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도 아이와 같이 연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곤 유치원을 나왔다.

유치원 앞에 세운 차 뒷좌석 카시트에 아이를 앉혀 벨트를 잘 채운 뒤 운전석으로 가 시동을 걸고 빠르게 유치원 골목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차를 몰던 진욱은 운전을 하면서도 틈틈이 룸미러로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며 말을 걸었다.

“아들, 오늘 유치원은 재밌었어?”

“네.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그림 그렸어요.”

“그랬어? 재밌었겠네. 무슨 그림 그렸는데?”

“아빠랑 할머니랑 한이요.”

“그래? 집에 가면 아빠도 좀 보여 줘.”

“네!”

아이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한 진욱은 주차를 한 뒤 뒷좌석에 앉아 있던 한을 안아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에 들어서 아이를 내려 주자 한이 급하게 신발을 벗었다. 아이를 향해 웃어 보이던 진욱은 당부하듯 말했다.

“한아. 손 씻고…….”

“손 씻고, 이 닦고, 세수하고, 발 닦아요.”

“그렇지. 역시 우리 아들 최고.”

아이는 진욱의 추켜세워진 엄지를 보자마자 배시시 웃고는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씩 웃은 진욱이 가지고 들어온 아이의 가방을 열어보았다.

원아 수첩이…….

유치원에 입학한 이래로 몇 번 손댄 적 없는 유치원 가방을 열었다. 사실 사건 의뢰가 들어오면 밤낮없이 일을 하는 그를 알기에 어머니인 윤 여사는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의 전반적인 생활을 책임져 주었다. 덕분에 그는 아이에게 따로 손댈 것이 없었다. 물론 핑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가방에서 원아 수첩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이가 입학한 3월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붙여진 한의 사진은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못한 성장 모습을 담고 있었다.

진욱은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숨을 골랐다. 분명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함께해 주기는커녕 늘 외롭게 했다.

그는 한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쳐다봤다. 얼마나 꼼꼼히 씻고 있는지 아직 화장실 안에선 물소리가 들렸다. 진욱은 말없이 화장실을 쳐다보다 다시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오늘 날짜가 적힌 페이지에는 아까 말한 그림인지 하얀 도화지를 든 아이가 웃고 있는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밑에 알림 사항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분홍반입니다.

오늘은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리기였는데요. 한이는 할머니랑 아빠를 그렸습니다. 잘 그렸으니까 칭찬 많이 해 주세요.

내일 준비물은 종이컵입니다. 종이컵 전화기를 만들 예정이니 종이컵 네 개를 꼭 넣어 등원시켜주세요.

아, 그리고 한이 오전 중에 기침을 좀 하던데 감기일 수 있으니 먹는 약이 있다면 꼭 보내 주세요.




“감기?”

“아빠 뭐 하세요?”

진욱이 의아한 듯 수첩을 읽는데 마침 한이 다 씻었는지 다가왔다. 그러나 미처 다 닦지 못했는지 아이의 얼굴에선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욱은 한을 들어 소파 위에 앉히곤 수건을 가져와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한의 얼굴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을 걸 확인한 진욱은 로션을 발라 준 뒤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곤 제 이마에도 손을 댔다. 자신보다 살짝 더 따뜻한 온도를 느낀 진욱이 TV 장식장 서랍에서 체온계를 꺼내왔다.

“아빠아, 뭐 하세요?”

“응? 우리 한이 열 재려고.”

“열?”

“한이가 열이 약간 있는 거 같아서.”

“그럼 한이 아파요?”

“아픈지 안 아픈지 보려고 재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한아, 잠깐만.”

진욱이 아이의 머리를 살짝 잡아 귀에 체온계를 꽂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삑 소리가 났다.

37.4도. 아직은 미열이었다.

“아빠, 한이 아파요?”

“왜 한이 어디 아픈 거 같아?”

“아니요. 한이는 안 아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한이 귀여워 진욱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한은 아빠의 품이 좋은지 꼭 안겨 있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한을 본 진욱은 아무래도 내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체크했다.



* * *



“아, 저기…….”

“아가씨. 자꾸 저기, 저기 하지만 말고 얼른 방을 비우라고. 응?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잖아.”

“아니, 분명히 계약할 때는 이런 말씀 안 하셨잖…….”

“뭐야? 그럼 아가씨 말은 지금 내가 사기라도 치고 있다는 말이야? 응?”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얼른 방을 빼. 벌써 한 달이나 지났잖아. 자꾸 이러면 아가씨 진짜 경찰서 갈 줄 알아! 알겠어?”

할 말을 다 하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평상을 발로 차고 계단을 내려가는 주인의 모습에 연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에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 장만한 전셋집이 바로 이 옥탑방이었다. 그것도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으로 겨우 장만한 집이라 연주는 이 집을 계약한 날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지. 분명 계약할 당시에는 아무런 말이 없던 주인이 갑자기 저를 찾아와 이 동네가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본인들이 건물을 내 놓았으니 얼른 집을 비워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트집을 잡아서 전세금 중 일부만 돌려주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연주는 주인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예로 연주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늘 옥탑 앞의 평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방을 빼라며 한바탕씩 퍼붓고 내려가곤 했다.

그래도 처음 이 집을 계약할 당시엔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 줬던 이들이라 연주는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날로 심해지는 주인집의 횡포에 연주는 당장 지낼 곳을 구하려고 했지만 모아 놓은 돈과 주인에게 받는 돈으로 서울에 집을 구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집에 내려가 있자니 아직 방학을 하지 않은 유치원 때문에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한숨을 쉰 연주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 평 남짓한 방이지만 하나하나 연주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서울 아래 내 집. 비록 전셋집이고 옥탑방이었지만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던가. 하지만 이제 이마저도 없어질 판국이었다.

“하아, 이제 어떡해.”

연주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