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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아닌 사이

5화



다행히 오늘은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던 그가 눈을 내리깔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주 전쟁 치르러 온다고 중무장을 하셨군.”

“전쟁은 무슨. 패션이에요.”

마치 제 전술을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허리를 숙이고 부츠의 지퍼를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는데 이게 왜 이래? 안 열린다. 에이 씨.

윤진이 신경질적으로 부츠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얼굴로 점점 피가 몰렸다.

“가지가지 한다.”

머리 위로 한껏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아 보이려고 신은 건데, 실패였다. 40센티 굽을 신고 런웨이에서 넘어진 모델처럼 깊은 절망감과 함께 패배감이 밀려왔다.

에이 씨, 모양 빠지게 오늘따라 부츠 지퍼는 왜 이렇게 안 내려가는 거야?

지퍼와 씨름하느라 가죽 바지에 감싸인 탱탱한 엉덩이가 하늘 위로 솟아올라 씰룩씰룩 움직이는 걸 보는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여간 조심성도 없지.”

“뭔 소리예요?”

하지만 질문에 답이 없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하고 왜 말이 없어? 윤진은 거꾸로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심하게 자신을 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심하게 자신의 엉덩이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확인한 것이다!

“뭐예요!”

놀라서 몸을 발딱 일으켰다. 숙이느라 피가 쏠린 탓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게 감당도 못 할 신발이면 신지를 말든가.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신발 갈아 신으면 꽤 꼴불견일 것 같은데?”

남주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이 꼭 여고생의 불량한 옷차림을 쳐다보는 학생부 주임의 눈빛 같다.

남들은 그래도 꽤 힙업 되고 모양도 예쁘다 그러는 엉덩이인데!

“변태.”

입을 삐쭉이며 눈을 흘겼다.

“누가? 내가?”

난생처음 듣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가 신발 갈아 신는데 그렇게 빤히 엉덩이 구경하는 사람 별로 없거든요?”

사실 안다. 식당 같은 데 가면 이런 식으로 신발을 갈아 신지는 않는다. 의자에 앉거나 기둥을 잡고, 부득이 허리를 숙일 땐 조심조심, 가슴 앞자락도 조심한다.

그런데 하필 오늘따라 저 곽남주 앞에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수를 인정하면 기본 행동거지도 안 된 애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별로 없긴. 다 봐 놓고도 안 본 척하는 거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는 윤진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건 남자들에게 저 여자의 샤워하는 모습을 상상하게끔 하는 데 충분했다.

그의 대학 시절 친구 몇몇과 종종 집에서 스터디를 했다.

그때 고2였던 연주와 윤진도 종종 집에서 스터디를 하는 탓에 만났는데, 겨울쯤이었던가. 그중에 인호가 윤진에게 좋다고 고백을 한 것이었다.

미친 새끼. 이제 고작 고3 올라가는 어린애한테 무슨 짓인지. 멱살이라도 잡고 지랄을 하고 싶은 걸 친구들이 말려 몇 마디 쌍욕만 날려 주고 끝내려 했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자기만 욕을 먹는 게 억울했던지 윤진에 대해 어린 게 벌써부터 자신을 꼬시려는 눈빛을 보였다는 둥, 가슴 내민 거 안 봤냐는 둥, 치마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가 쌔끈하다는 둥 온갖 개소리를 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헛소리에 그가 주먹을 날린 일은 당연했다.

미친 새끼가 어디 발정이 나도 더럽게 나서 아직 미성년자인 애를 상대로 그딴 더러운 생각을 하느냐고 화를 내는 그를 보고 동기들도 깜짝 놀랐다. 평소 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그 이후 동기들은 그의 동생이나 윤진을 보고 헛소리를 하지 않게 됐다. 아니, 그거로도 모자라 아예 집에서 스터디를 하지 않았다.

남주는 다시 윤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섹시한 빨간 립스틱, 가슴의 볼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티에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바지. 이 모든 게 남자를 얼마나 자극하는지 알면 이렇게 혼자 있는 남자 집에 불쑥불쑥 쳐들어오는 짓은 안 할 텐데. 나이만 먹었지 아직 애가 틀림없다.

“웃기지 마요. 본인이 그러니 다 그렇게 보이나 보죠.”

“요즘 같은 세상에 신사만 있는 줄 아나 본데, 여기저기 몰카에 진짜 변태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일단 자기 몸은 스스로 좀 지키자?”

“어머머. 그런 사고가 나는 게 여자 탓이란 말이에요?”

“여자 탓이라는 게 아니라, 남자고 여자고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자는 거야. 밤늦게 술 취해서 돌아다니면 누구든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거 모르나?”

검찰청에 있다 보면 세상에 얼마나 흉흉한 사건들이 많은지 보고 듣게 된다. 뉴스에만 안 나왔지 하룻밤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러니까 자신에겐 윤진에게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려 줄 의무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조심성이라고는 없던 이윤진이니까.

“이깟 가죽 바지에 부츠가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웃긴다, 정말. 패션과 성범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거 몰라요?”

“범죄자들의 제1 타깃이 체구가 작고 힘없는 사람이라는 거 몰라? 너처럼 작은 사람은 표적이 되기 아주 쉽지.”

그나마 연주야 또래 여자들보다 키도 좀 크고 어릴 때부터 삼 형제에게 온갖 호신술을 배운 탓에 제 몸 지킬 최소한의 방법은 알겠지만, 저 물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허리를 잡아 들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손에 잡힐 것 같다.

“아아아.”

듣기 싫다는 듯, 그녀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도리질을 쳤다.

그러고는 어이없어하는 그를 무시한 채, 다시 몸을 숙여 지퍼 내리기에 몰두했다. 그나저나.

“아이 씨, 이거 왜 이렇게 안 열려?”

“어휴.”

아직 내려가지 않은 지퍼에 분풀이하는 그녀를 보며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앞에 앉았다.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지퍼를 잡고 살펴보는 사이, 그녀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넓은 등으로 향했다. 얇은 티 아래 잘 다듬어진 어깨 근육이 일렁였다.

꽤 몸이 좋다고 소문난 남자 연예인들도 많이 봤지만, 이 남자의 몸은 그들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남자 연예인들의 몸보다도 더 좋아 보였다.

그럼 뭐 해. 하는 말마다 사람 속 뒤집으니 누가 저런 남자 옆에 있고 싶을까 싶은 찰나, 너무도 쉽게 툭 지퍼를 열며 그가 한마디 보탰다.

“이 쉬운 걸. 허긴, 그 한 줌도 안 되는 팔로 문이나 열고 다니는 게 신기하다.”

역시나 잔소리쟁이. 입을 삐죽이며 주방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식탁 위에는 고운 옥색의 다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우려낸 찻물을 자그마한 잔에 담아 윤진의 앞으로 밀어 줬다. 향이 꽤 좋았지만 지금처럼 속이 탈 때는 이런 뜨거운 차가 먹힐 리 없었다.

“됐고, 전 찬물 좀 주세요.”

그가 일어나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줬다. 얼마 만에 먹는 보리차인지. 생수를 마실 때보다 꿀꺽꿀꺽 잘 넘어갔다.

“그렇게 고자질해 놓고 내 앞에 있으려니 목이 바짝바짝 마르나 보지?”

캑캑. 물을 마시던 윤진은 사레가 걸리고 말했다. 입가에 묻은 물을 훔치며 그를 흘겼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저를 보는 눈빛도 꽤나 다정스럽진 않다.

“고자질이라니. 그건 그냥 진행 상황을 말씀드린 거라구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나도 뭐 내가 내뱉은 말이 있으니 책임은 져야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야? 계획부터 말해.”

그가 다시 팔짱을 끼며 딱딱하게 말했다.

“급하시긴, 물 마실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니에요.”

으으, 재수 없어.

‘개짜증 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입가를 훑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욕이지만 이렇게 하면 상대를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윤진은 새초롬한 얼굴로 물 잔을 들어 꼴깍꼴깍 보리차를 마저 마셨다.

내가 여중생일 때 그는 고등학생이고, 내가 여고생일 때 그는 대학생이었다. 그때는 그 몇 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처럼 그의 잔소리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깟 네 살 차이는 친구도 먹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게다가 저 곽남주는 자신의 상사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다. 자신이 곽남주 앞에서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신이 그의 앞에서 을이 될 이유 또한 하나도 없었다.

고로 성인 대 성인으로 할 말은 할 수 있는 처지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애 취급을 하고 잔소리를 해도 난 어른이다. 기죽을 필요 없다. 당당하게 객관적으로 조목조목 잘잘못을 따지면 되는 것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침착하게 보리차를 다 마시고 물 잔을 탁, 식탁에 내려놓았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하라니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일단 왜 내 연락을 그리 안 받았는지 해명을 하는 게 먼저 아니에요?”

“그게 중요해?”

“그럼요. 꼬인 것부터 풀어야죠. 사람을 그렇게 취급해 놓고 내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일할 사람처럼 보여요?”

“원래 저장 안 한 번호 잘 안 받아.”

어깨를 으쓱하는 폼도 꽤 얄미웠다. 며칠 동안 자신을 안달복달하게 했던 사람치고는 너무 심플한 대답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메시지도 남겼잖아요.”

“오빠, 시간 되면 연락해 주세요라니. 스팸인 줄 알았지.”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윤진은 속이 끓었다. 일주일 동안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데.

“이름 적었잖아요.”

“설마 네가 연락하리라곤 생각을 못 했지.”

“그러면. 나인 줄 알았으면 전화받았을 거예요?”

“내가 받았을 것 같아?”

고개는 반쯤 기울이고 입꼬리를 뒤트는 꼬락서니라니.

거봐, 알아도 안 받았을 거잖아. 하늘이시여, 저 사람 죽이고 저 지옥 가겠습니다.

입을 앙다물고, 이를 바득 갈았다.

“앞으로는 내가 오빠 스타일리스트, 퍼스널 쇼퍼예요. 절 동생 친구가 아닌 전문가로 존중해 줘요.”

“그건 알았고. 근데 도대체 뭘 어쩔 건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뜯어고쳐야죠. 물론 헤어스타일도 좀 바꿔야겠고. 근데 지금은.”

그녀는 못미덥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었다. 못마땅하게 구겨지는 얼굴에 그의 시선도 자신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지금의 옷차림은 본가에 갔다 올 때 입었던 외출복 그대로였다.

‘한국대학교 신입생 새터’ 글씨 밑으로 가슴 중앙에 떡하니 아플리케 되어 있는 노란 병아리. 식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바지까지 체크한 윤진이 소름 돋는다는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디 한번 너 해 보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오빠가 갖고 있는 옷부터 체크하고 옷 좀 새로 싹 사야겠어요.”

그녀가 카메라와 작은 수첩을 꺼냈다. 갖고 있는 아이템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필요한 것을 적을 요량이었다.

“다 멀쩡한 옷들인데 뭘 새로 사?”

‘진짜?’라는 듯 윤진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중학생 때 모르는 문제를 풀어 주거나 역사 얘기를 해 주면 저렇게 눈을 크게 뜨고 경외에 찬 눈으로 저를 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경외심이 아니라 의구심만 가득 찬 것이 못마땅하지만.

“일단 그 멀쩡한 옷들 저 좀 보여 줘요. 그러면 새로 살 것들이 확 줄겠죠.”

“알았어. 따라와.”

그의 뒤를 따르며 윤진은 거실을 휘둘러보았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나 봄 직한 어린아이 몸만 한 바로크 양식의 괘종시계부터 받침대까지 맞춘 기괴한 모양의 수석(壽石, 관상용 돌), 그리고 윤진의 집에도 한때는 있었을 법한 텔레비전 위 레이스 러너까지.

정말 어디서 이런 걸 다 주워 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안방에 들어온 그녀가 침대와 책상,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갸웃.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게 낯이 익네.’라며 혼잣말을 하던 그녀가 그의 얼굴을 보고 뭔가 깨달았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