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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소이는 매서운 눈빛을 던지며 손을 세차게 비틀었다.

“놓으라니까요!”

“그만 마시라고 했잖아.”

“하, 정말 당신이 뭔데 이러라 저래라 명령인데요?”

“내일 아침 지독한 숙취로 고생할 당신을 위해 참견하는 친절한 남자라고 해두지.”

“그래서 내가 고마워해야 해요? 미안하지만 난 하나도 고맙지 않아! 남의 일에 끼어드는 남자는 질색이라고요. 알아들었어요?”

“그래, 아주 분명히 알아들었어.”

“그럼 내 앞에서 조용히 꺼져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귓가를 간질거리는 거슬리는 웃음소리였다.

“이름이 소이라고 하던데 일본인…… 아니, 한국인인가?”

혀를 말듯 가볍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소이는 깜짝 놀란 시선을 던졌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죠?”

“빌리에게 물어봤지.”

개인 프라이버시는 철저히 지켜주는 클럽인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개인정보를 발설한 바텐더에게 화가 치밀었다.

아니면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남자인가?

어쨌든 그 당사자인 남자는 그녀의 거친 응대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며 속을 뒤집어 놓는다.

결국, 그녀의 입술이 꼬이며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웃으니까 훨씬 예쁘군. 영어도 유창하고. 어디서 배운 거지?”

어디서 배웠으면?

정 회장에게 유일하게 고마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국제 언어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 회장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원어민 개인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고 이제는 제2외국어처럼 한국어만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였다. 그렇다고 자세한 설명으로 이 남자의 호기심을 채워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 몸을 원해요? 나랑 자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가요?”

그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차갑게 웃었다.

뻔뻔스럽게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붉은 원피스 상체를 노골적으로 훑는 남자.

아까도 그렇더니 가슴이 묵직해지며 취기로 둔해진 신경을 곤두세운다.

“글쎄, 내 타입은 아니지만, 꽤 매력적인 건 인정하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녀가 헛웃음을 치며 조롱하자 남자가 또 웃었다.

눈가가 살짝 처지며 차가운 인상이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뭐가 문제지? 남자 때문인가?”

“…….”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세상의 반은 남자다. 한 사람에게 상처받았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야.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보면 더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테고 언젠가…….”

“적당히 하죠? 어쭙잖은 충고 따위는 이쪽에서 사양이니까.”

더는 이 남자와 이런 한심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소이는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몸이 휘청 흔들렸다.

어찌 피할 사이도 없이 제어드가 그대로 그녀를 감싸 안 듯 부축했다.

움찔, 가는 전율과 함께 전신이 절로 굳었다.

어딘가 그 손길이 낯익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소이는 가는 허리를 꼭 붙잡은 남자의 손을 강하게 의식하며 불편한 듯 몸을 틀었다.

“누구 맘대로 건드리라고 했죠?”

“잡아줘도 문제인가? 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건데?”

“어딜 가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오겠다는 건가요?”

“당신 많이 취했어. 본인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걸”

“그래서요?”

“그래서?”

그가 잠시 미간을 굽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지. 집이 어디야?”

“하, 내가 바본 줄 알아요? 괜한 수작 부리지 말아요.”

“내 신원이 의심스러우면 마크에게 물어봐. 아니면 직접 확인해줄까?”

그래, 낯선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이렇게 찝쩍거리는데도 마크가 가만 놔두는 것을 보면 이 남자, 확실히 거물이긴 한가 보다.

한눈에 딱 봐도 부티 팍팍 풍기면서 상대를 위압하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이언 씨?”

자기 이름 꺼낸 건 또 어찌 알고, 마크가 정확한 타이밍에 그들 앞에 나타났다.

“아, 마크…….”

“마크, 이 숙녀분께서 차를 가져왔는지 알아봐 줘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제어드가 마크에게 한 말이었다.

“소이 양은 차 없이 오셨습니다.”

“그래? 그럼, 큰 문제는 없겠군. 이 숙녀분은 내가 모셔드리도록 하지. 신변 걱정은 말아요. 리치가 무사히 잘 모실 테니까. 아, 이 아가씨와 내 술값은 이 카드로 계산해줘요.”

“당신이 왜 내 술값을 내는데? 게다가 대체 왜…….”

“이미 끝난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지?”

그녀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린 남자의 표정이 매서웠다.

흠칫, 몸을 떤 소이는 그대로 입을 다문 채 그가 그녀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대체 자기와 내가 언제, 무슨 이야기가 끝났다는 거지?

하지만 그런 혼란도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사람의 입을 막는 매서운 표정 하나로 모든 상황이 종결되어 버렸으니까. 마치 그 표정은 더는 잔말 말고 조용히 내 말대로 따르라는 무언의 명령 같았다.

잔말 말고 조용히?

그제야 간신히 굳은 머리가 돌아갔다.

당장 이 남자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제어드가 잘록한 허리를 바싹 끌어당기며 거의 안다시피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헉, 소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며 뜨거운 숨결이 차올랐다.

이 개운치 않은 상황에 마크가 난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런 남자를 보자 갑자기 말도 안 되지만, 풋, 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마크의 입장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그네스의 주요 고객인 소이와 한눈에 딱 봐도 VVIP로 보이는 상대 남자 사이에서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리라.

이 남자의 말을 듣자니 그녀의 신변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결국,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우선은 그녀를 통해 직접 의사를 듣고 판단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니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이 남자를 밀쳐내면 그만이었다.

미친 변태라고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쑥 눈앞의 냉정한 현실이 그려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순식간에 거친 분노가 사그라지면서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 하룻밤의 유희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래, 그 끔찍한 아파트로 돌아가는 대신 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난 지옥이라도 따라갈 수 있어.

“괜찮아요, 마크. 내가 부탁했어요. 이 분이 잘 데려다주실 거예요.”

바로 옆에서 제어드가 눈썹을 올리며 내려다보는 것을 의식했지만 무시해버렸다.

마크의 곤란한 표정이 눈에 띄게 풀리면서 그럼 알았다면서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왔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왜요?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 아니었어요?”

“매번 예상을 깨는 여자군.”

그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그녀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밀어내진 않는다.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걷기 시작했다. 귓가에 스치는 음성이 달나라의 속삭임처럼 아늑하게 들려왔다. 게다가 생각보다 허리에 감긴 이 남자의 손길에 거부감이 일지도 않았다.

어딘가 든든하면서도 계속 기대고 싶은 손길이랄까.

다만 무섭게 밀려드는 취기와 메슥거리는 속 때문에 제대로 걷기가 쉽지 않을 뿐.

하이힐을 신은 발이 몇 번이나 꼬여버리자 그가 그녀를 안은 팔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젠장, 그만 좀 꼼지락거려. 술 취한 여자 끌고 가기가 얼마나 힘든 줄 몰라?”

대놓고 핀잔주는 말투에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마치 이 남자 앞에서 자신이 천하의 구제 불능 문제아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소이는 낯선 남자에게 의지해 어둠에 젖은 밖으로 나왔다.

세상은 온통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차들의 탁한 매연과 뒤섞인 알싸한 비 냄새가 코를 스친다.

소이는 멍하니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안개가 싸인 머릿속에서 회색빛 하늘이 제멋대로 빙빙 돌았다.

그때 그들 앞에 날씬한 차체의 검은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석이 열리며 검은 제복 차림의 남자가 내리며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재촉에 이끌려 차에 막 타려는 순간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래?”

“토할 것 같아…….”

“젠장, 조금만 참아. 리치, 이 가방 좀 받아주겠나?”

얼떨결에 여성용 가방을 받아든 운전기사를 남겨두고 제어드가 소이를 끌어안고 서둘러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상체를 수그렸다.

“우왝!”

“젠장!”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끔찍한 그녀를 남겨두고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데 웬걸, 그는 오히려 바싹 붙어 선 채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등을 두드려주었다,

소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꺼억꺼억, 위 안의 내용물을 힘겹게 게워냈다.

“속이 편해질 때까지 다 쏟아내.”

마치 달콤한 주문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어둑한 골목 안은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다만 온종일 먹은 게 스테이크 몇 점이 전부이다 보니 나오는 것이라야 작은 고기 조각들과 쓴 물이 전부였다. 그나마 빗줄기가 거세지며 그마저도 형태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더는 나올 것이 없이 다 토해버리자 기력이 한꺼번에 소진되면서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금세 맨다리와 얇은 옷감 사이로 차가운 물기가 스며들었다.

“뭐 하는 거야? 옷이 다 젖어버리잖아!”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남자의 초조한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이미 비에 흠뻑 젖어 버렸는데?

그의 모순된 말이 우스워 소이는 킥킥 웃기 시작했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반강제로 일으켜 세워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녀는 마치 먼 타인을 바라보듯, 그가 장신의 몸을 숙여 축축이 젖어버린 자신의 엉덩이 주변과 다리를 손끝으로 열심히 털어주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잔 근육의 감촉이 얇은 옷감을 통해 아련히 전해졌다.

어떻게 된 게 창피하지도 않았다. 낯선 남자 앞에서 일생일대의 최악의 추한 모습을 보인 주제에 느긋하게 맘까지 편해지는 건 또 어떻고.

어차피 상관 말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따라온 건 이 남자였어.

소이는 내심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취기에 젖은 멍한 의식 속에서 남자의 얼굴이 안개에 쌓인 것처럼 흐릿해 보였다.

이……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제…… 제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빗물에 흠뻑 젖은 다크 브라운의 머리칼이 잘생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그녀 이상으로 비에 완전히 젖어버린 값비싼 슈트를 보자 은근 미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