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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프롤로그



「이게 오늘 첫 끼라는 거 알아? 음…… 미슐랭 2스타 집이라더니, 정말 스테이크 맛이 괜찮네. 어, 오빠? 아직 손도 안 댄 거야? 입맛 없어?」

「소이야…….」

「갑자기 왜 그렇게 애절하게 부르시나? 출장 가서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불안하게 왜 그래. 어서 말해. 결혼식 연기만 아니면 난 뭐든 들어줄 수 있으니까.」

소이는 잘게 썬 스테이크 한 점을 입안에 쏙 밀어 넣고 부드러운 육질을 음미하듯 두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긋함이었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

소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고깃덩어리가 목구멍을 꽉 막아 버렸다. 몇 번이고 캑캑거리며 잔기침을 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꽉 막힌 가슴을 툭툭 치면서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평소와 달리 결의에 찬 남자의 표정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애써 밀어내며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정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 그것도 결혼식을 고작 3주 남겨놓은 지금이라면 더욱!

정민은 그녀에게 이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두 집안을 위해 이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괜한 착각이었다고 자신을 달래며 소이는 억지로 미소를 끌어올렸다.

「나 놀려주려고 농담하는 거지?」

「…….」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다. 내가 그런 농담 질색하는 거 뻔히 알면서. 물론 오빠가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 이해해.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하자고 했잖아. 오빠나 나나…….」

「결혼식은 없을 거야. 이미 여기 오기 전에 한국에 전화로 말씀드렸어.」

「뭐……?」

입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다시 목이 꽉 멨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날 이해해줘. 그동안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잠깐 기다려! 여기 오기 전에 뭘 했다고? 누구에게 전화로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설마 우리가…… 아니지?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부모님께 우리가 파혼했다고 알렸어.」

위이잉.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진공 상태에서 정민의 모든 말이 둥둥 떠다니며 머릿속을 휘저었다. 부디 잘못 들은 것이길 기도했다.

「그러니까 오빠 말은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부모님께 우리가 파혼했다고 말했단 말이야? 설마 정 회장한테도?」

「지금쯤 부모님을 통해 그분도 전해 들으셨겠지.」

하, 맙소사!

소이는 끄응, 신음을 삼키며 힘겹게 다시 정민을 주시했다.

「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봐.」

그런 소이를 바라보는 정민의 얼굴이 초조하게 물들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이 편치 않다는 것은 그의 선한 눈빛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미안하다, 소이야.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얼마나 비겁한지 잘 알아. 이 결정의 결과가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도 말이야. 특별히 네 처지를 생각하면……. 그래서 더 말을 꺼낼 수 없었어. 가장 먼저 너한테 알렸어야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 그렇게 계속 시간만 가고…… 결국, 더는 미룰 수 없게 됐어.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이기적이고 잔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만해, 한정민! 더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날 우롱하지 마!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끔찍한 폭탄을 터트려놓고 지금 나더러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거야? 난 못해! 아니, 단 한 마디도 받아들일 수 없어!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는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일을 이렇게 망칠 수 있냐고? 우리 결혼은 고작 3주 남았을 뿐이야!」

「그래, 그래서 더 시간을 끌 수 없었어.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왜? 왜 하필 그게 지금인데? 왜 하필 결혼을 3주 남겨놓은 지금이냐고!」

「소이야…….」

「내가 지금 누굴 믿고 있는데? 그런 날 이렇게 배신하려고 그동안 그렇게 잘해줬던 거야? 그런 거야, 한정민?」

정민은 부정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너에 대한 내 마음은 항상 진심이었어.」

「그럼 이건 뭔데? 왜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구는 건데, 응?」

「여자가 있어.」

「뭐?」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소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 남자를 응시했다.

여자? 지금 이 남자가 여자가 있다고 했나?

그래서 우리의 결혼을 깬다는 거야?

그녀는 정민을 5년 이상 알아왔다. 항상 그녀의 편에서 이해해주며 다정한 미소를 짓던 남자가 지금은 죄책감을 담고서 한없이 슬픈 눈빛을 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인생에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말은 진심인 거 같았다.

온몸에 싸늘한 한기가 번진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가냘픈 희망은 그렇게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충격 이상의 배신감과 분노가 가슴을 채웠다.

아니, 그것은 절망이었다. 유일한 탈출구가 한순간에 꽉 막히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참한 현실에 대한…….

어찌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소이는 입술을 앙다문 채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이 매정한 현실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초라한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존심만은 지켜야 했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그 여자를 만났는데?」

「소이야…….」

「오빠의 약혼자로서 모든 진실을 듣고 싶어. 최소한 내게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믿으니까. 다시 물을게. 그녀를 언제 만난 거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소이의 눈치를 보던 정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6개월 전에 소호 미술관에서 처음 만났어.」

「6개월 전? 그렇게 오래됐는데 이제 말하는 거야? 3개월 전에 어른들이 결혼 날짜를 잡을 때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잖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너에게 이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말을 해? 난 차마 널 상처 입힐 수 없었어.」

하,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는 남자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널 볼 면목이 없다.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해.」

「그렇게 미안하면 계속 있어 주면 되잖아! 아직도 늦지 않았어. 지금은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뿐이야. 아, 좋아, 결국 이 모든 촌극이 그 거창한 사랑 때문이라면 내가 받아들일게. 내 말 들었어? 오빠가 정 그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그 감정을 존중하겠단 뜻이야. 내가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할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그런 일 없어. 오빠는 그냥 언제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면 돼. 우리 결혼만 유지한 채 오빠는 오빠의 인생을 살고 난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야.」

그 날 저녁 처음으로 정민은 소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 담긴 연민을 확인하자 소이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앙다물었다.

정민은 그녀가 왜 이렇게 이 결혼에 매달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미안하다, 소이야. 네 말을 들어줄 수 없어서. 그래, 나도 한때 사랑에 대해 너와 같은 생각이었던 거 인정할게.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이라는 의미조차 몰랐으니까. 그래서 이 결혼에 동의한 것이고 말이야. 어차피 꼭 해야 할 결혼이라면 모르는 여자보다 네가 낫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진아를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는 없겠더라. 그건 위선이니까. 나 자신을 속이고 널 속이고 사랑하는 내 여자를 상처 입히는 잔인한 짓이니까.」

「그래서 그 여자 때문에 모든 걸 버린다고? 설마 부모님이 오빠의 결정을 존중할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 그들이 우리 결혼을 어떻게 밀어붙였는지 잊었어?」

「나도 알아. 부모님은 날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이미 각오하고 있어.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야. 최후의 선택을 해야 한다면 모든 걸 버리고 그 여자를 선택할 거다. 그녀가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정민 오빠…….」

「진아가 내 아이를 가졌다, 소이야. 이제 11주야.」

쿵,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내 아이를 버리고 널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거 같니? 아니, 그럴 수 없어. 그런 거짓 인생은 죽어도 살 수 없다. 난 사랑하는 여자와 내 아이를 지키며 살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야. 이 미친 세상에서 최소한 나만이라도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지키며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면 이런 내가 이상한 건 아니잖아.」

그래, 이상한 건 아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다만 어른들의 관점을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힘이 쭉 빠졌다.

정민의 마음은 확고했다.

더는 이제까지 알았던 여린 남자가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확신과 사랑하는 여자와 언젠가 태어날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된 남자의 강한 의지가 눈에 보였다.

그 말은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남자가 그 사랑을 지키겠다는데…….

한편으론 사랑을 위해 그런 대단한 용기를 낸 정민이 부럽기도 했다.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고 태어날 뱃속의 그 아기까지도.

아니, 그것도 잠깐 그 이상의 상실감이 전신을 덮었다.

그렇게 강한 존재는 아니라 해도 정민은 지난 3년간 소이에게 유일한 방패막이 되어준 존재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불을 보듯 뻔했다.

다시 처음부터 홀로 정 회장을 상대할 생각을 하자 돌덩어리가 얹어진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제 고지가 거의 눈앞에 다 와 가는데…….

조금만 손을 뻗으면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하지만 다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홀로 외로운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절망과 분노에 피가 마른다.

아, 왜 내 인생은 항상 제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을까.

매번 이렇게 꼬여가는 눈앞의 현실이 허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