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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교수님!”

“잠깐만. 통화 좀 마저 하고.”

누군가와 심각한 얼굴로 통화 중이던 최 교수가 양해를 구하자 준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 교수가 통화를 하는 사이 준희는 방을 둘러보았다. 의학 서적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뒤섞인 방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었다. 마침내 통화를 마친 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이야. 얼굴 좋아졌다.”

“잘 지내셨어요? 교수님은 그새 훨씬 젊어지셨어요.”

“이제 다 늙어서 주름이 생기는데 젊어지기는. 소식은 들었어. 그쪽에서도 서 간호사 칭찬 많이 하더라.”

반갑게 맞이하는 최 교수와 악수를 나누고 의자에 앉았다. 즐겨 마시는 홍차를 내 주는 최 교수에게 귀국하기 전 아이들이 손수 만들어 준 목각 인형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아이들이 감사의 인사로 만든 건데 집에 걸어 두면 행운이 찾아온대요. 사모님 갖다 드리세요.”

“고마워. 집사람이 좋아하겠네.”

“사모님은 잘 계시죠?”

“응. 그러잖아도 지난번에 서 간호사 언제 오냐고 묻더군. 조카가 서 간호사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한 모양이야. 그나저나 이번에 복직 신청할 거지?”

“그래야겠죠. 딱히 할 일도 없는데요, 뭐.”

따듯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코끝에 감도는 향기가 달큼하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봉사 활동 나갔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 교수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참, 혹시 복직이 급한 거 아니면 입주 간호사 생각 없어?”

“입주 간호사요?”

“응. 강 교수가 보내는 간호사들마다 며칠 하다가 돌아오는 바람에 입장이 좀 난처한 모양이야. 방금도 강 교수 전화였거든. 믿을 만한 사람을 좀 알아봐 달라는데 내가 또 서 간호사라면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잖아.”

“대체 어떤 사람인데 그래요? 어지간해선 강 교수님이 쩔쩔매실 분이 아닌데.”

“자네도 알지? 얼마 전에 대영그룹 본부장이 된 주강혁이라고. 아마 예전에 만난 적이 있을걸?”

갑자기 들려오는 강혁의 이름에 준희의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파동이 이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에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 사람이 왜요?”

최 교수가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얹고 관자놀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강혁을 처음 만나게 해 주었던 몇 년 전만 해도 저렇게 흰머리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다.

“내가 밖으로 말 샐 염려는 안 해도 되는 거지?”

최 교수의 물음에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서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얼마 전에 사고가 좀 있었어.”

긴 한숨을 내뱉은 최 교수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준희는 그대로 굳어졌다.

“주강혁 씨가 사고를 당했나요?”

“응. 교통사고였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준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을 맞잡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사고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많이 다쳤나요?”

“좀 다쳤지. 시간이 좀 지난 데다 워낙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 다친 곳 대부분은 회복이 되었는데 시신경이 말썽이야.”

“시신경이라뇨?”

“머리를 부딪치면서 뇌진탕이 심하게 왔는데 그때 시신경이 눌린 모양이야. 담당인 강 교수 말로는 수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더군. 회복되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이라는데 문제가 좀 복잡해. 갑자기 시력을 잃어서 성격도 까칠해졌고 그 비위를 맞출 만한 입 무거운 사람 구하기가 쉽지가 않네.”

“그래서 입주 간호사를 구하는 건가요?”

“그렇지. 지금 주강혁이 모처에서 요양 중인데 대외적으로는 미국에 가 있는 걸로 되어 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경영권 때문에 그쪽도 피 튀기게 싸우는 모양이더만. 아무튼 주강혁이 정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간호사 하나를 붙여 놔야 하는데 지금 누굴 보내야 하나 고민 중이야. 아무나 보냈다가 괜히 말 나가면 우리도 골치 아프고.”

그와 헤어진 지 3년 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 헤어진 이후 가끔 언론을 통해 그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해외 봉사 활동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접할 수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래서 말인데… 서 간호사.”

최 교수의 부름은 은밀했다.

“자네가 그 일을 좀 맡아 주지 않겠나? 간호사들 사이에 소문이 좀 안 좋게 돌아서 다들 꺼려해. 내 생각엔 서 간호사가 딱 적임잔데…. 복직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최 교수를 바라보던 준희는 한참이 지나서야 되물었다.

“환자 상태는 어떤가요?”

“거의 못 봐. 사물을 분간하지도 못하고 누굴 알아보지도 못하고. 일상생활이 힘들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주강혁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준희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승낙의 대답도, 거절의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준희는 병원을 나왔다. 잘 생각해 보라는 최 교수의 말에 마지못해 연락드리겠다는 대답만 하였을 뿐이다.

병원을 나와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던 준희는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선 채로 몇 대의 차를 보냈다.

오랜만에 고작 듣게 된 소식이 이거란 말인가.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어떤 대단한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나았을 것을. 왜 하필 다쳐서 남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졌다는 말을 듣게 하나.

누구보다 깔끔하던 사람이었다. 옷에 티끌 하나 묻어 있는 걸 용납 못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산다는 것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바람이 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감기에 걸렸다는 제게 한밤중에 약을 보내던 강혁이 떠올랐다. 늘 기다리게만 만들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것들은 죄다 잊어버리고 가끔 잘해 주던 것들만 기억이 나니 큰일이다.

당신이 아프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난 아직도 당신을 완전히 잊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니….

그 후로도 준희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한적한 산길을 한참 동안 달려온 차량 한 대가 어느 2층짜리 집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긴장한 표정의 준희가 차에서 내리자 트렁크를 꺼내 건네준 남자는 정중하게 묵례를 하고는 떠났다. 마치 제 할 일은 여기까지만이라는 듯이.

까만 철제 대문을 응시하며 잠시 심호흡을 한 준희는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곧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십니까?

“병원 소개로 온 간호사입니다.”

- 아. 잠시만요.

철컹 소리를 내며 곧 문이 열렸다. 캐리어를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꽤 넓은 정원이 드러난다.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과 활짝 핀 꽃이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웠다.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과 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집 안에서 나왔다. 이곳에 상주하며 경호를 서고 있다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준희를 아래위로 훑어본 남자들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는 그제야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고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건물을 빙 돌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리 주세요.”

마중을 나온 여자가 괜찮다는데도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아마도 집안일을 돌보는 이 같았다.

“도련님은 주무시고 계세요. 기다리시는 동안 뭐 시원한 거라도 드릴까요?”

도련님은 강혁을 말하는 모양이다. 이곳에선 모두 그를 도련님이라 부르는 걸까.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는 준희의 손바닥에 긴장으로 땀이 고였다.

이곳에 오기 전 많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주강혁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 것. 앞으로 몇 달 동안 전적으로 강혁의 수족이 되어 줄 것. 그게 건강 체크와 더불어 준희가 맡은 임무였다.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간 집 안은 적막감이 흐를 정도로 조용했다. 크게 숨소리를 내어서도 안 될 것처럼 공기가 무겁다. 들은 바에 의하면 강혁이 최소한의 사람만 들이라고 명령한 탓에 집안일을 돌봐 주는 부부와 경호를 맡은 인원만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외부에선 유일하게 강혁의 비서가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과일 주스를 마시며 준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내 보이던 북한강이 거실에서도 보였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된 것인지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감탄이 날 만큼 멋진 풍경이 시시각각 변해 가며 보일 것이다. 풍경은 잠시 관심을 끌었을 뿐 이내 준희의 신경은 어딘가에 있을 강혁에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