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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크리스마스를 불과 며칠 앞둔, 아침부터 바람이 불어 몹시 추웠던 날이었다.

이제 막 연애 1년 차에 접어든 준희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한껏 멋을 내느라 예쁘게 코트를 차려입은 그녀를 지나가던 남자들이 힐끔거렸다. 스물네 살. 한창 꽃다운 나이인 데다 연애까지 하는 바람에 준희는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가끔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던 카페로 나가는 길이었다.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약속 장소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준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도로 건너편 막 멈춘 차에서 강혁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단번에 눈에 띌 만큼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그는 근사했다.

“강….”

이름을 부를까 하며 들어 올린 손을 내리고 준희는 신호등을 확인했다. 이제 곧 만날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조급해지는지 모르겠다. 사랑에 빠지면 다들 이런가. 준희는 따듯한 눈빛으로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잿빛 슈트 위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언제 어디서건 여자들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맞은편 인도에 서 있던 여자들이 강혁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준희는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누가 뭐래도 주강혁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의심할 것 없이 둘은 깊은 사이였다.

막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길을 걸어 강혁이 카페로 들어가는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선물 봉투를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다음 걸음을 재촉했다. 실습을 나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매장에서 산 머플러였다. 강혁에게 잘 어울릴 짙은 그레이. 비싼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 카페 문을 열자 딸랑딸랑 종이 울렸다. 어서 오라는 종업원의 인사를 들으며 준희는 재빨리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가장 안쪽 자리에 등을 진 채 앉아 있는 강혁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 위로 눈이 녹은 자리가 촉촉했다. 불쑥 장난을 쳐 보고 싶은 마음에 발소리를 죽인 채 그에게로 향하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준희는 들고 있던 쇼핑 봉투를 뒤쪽 의자에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을 한껏 끌어 올리며 강혁의 눈을 가렸다.

“누구게?”

“…….”

“으응? 누구냐고 묻잖아요.”

“…장난치지 말고 앉아.”

평소에도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들의 연애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물었다.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앉으라니까.”

“에이. 우리 준희, 한번 그렇게 좀 불러 주지.”

손을 떼고 짐을 챙긴 준희가 토라진 척을 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귀밑까지 자른 단발머리가 앙증맞으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카페 안에 만들어 놓은 커다란 트리와 흐르는 캐럴이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음을 실감하게 한다. 커피를 주문하고 밖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내린 눈으로 인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이 남자는 기억하고 있을까. 바쁜 일정으로 인해 얼굴 보기도 힘든 애인을 돌아보며 준희는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다음 주말에도 눈 예보가 있는 거 알아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앞에 놓였을 때 준희가 물었다.

“난 1박 2일도 괜찮아요. 정 시간이 안 되면 막차 타고 갔다가 일찍 올라오는 것도 괜찮고.”

들뜬 얼굴로 말을 꺼내는 준희를 강혁이 빤히 바라보았다. 쌍꺼풀이 없는 약간은 매섭게 생긴 눈이 한참 동안 준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따라 제 얼굴을 바라보는 강혁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강혁 씨?”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

할 말?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괜히 불안해진 준희는 손을 뻗어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한참을 침묵하던 그에게서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준희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지난번처럼 얼굴도 보기 힘들 만큼 정신없이 바빠진 건가. 하루 시간 내기가 정 힘들면 밥 한 끼로 만족하겠다고 해야 할까. 너무 바쁘면 그냥 다음으로 미루자고 할까.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 그가 다시 말문을 막았다.

“이제 그만 만났으면 해.”

완벽하게.

“다시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

그가 헤어지자고 했다.

준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강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음 설레게 하는 눈빛과 표정. 그런 그가 헤어짐을 고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가 않는다. 앉은 채로 꿈이라도 꾸는 건가. 하다 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

일을 도와주던 교수님을 통해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그를 좋아했다. 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햇빛을 등지고 창가에 서 있던 그를 향해 길게 뻗은 복도를 걷던 그날부터였다. 속수무책으로 깊게 빠져 버렸는데 그런 그가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이,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최대한 담담하게 굴어 보려 하였지만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손을 내려 애꿎은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그가 장난이었다는 말을 하기를 기다려 보지만 그는 다시 못을 박았다.

“귀찮으니까.”

“…….”

“시간되면 연락을 해야 하는 것도 귀찮고, 무슨 날마다 챙겨야 하는 것도 귀찮고, 의무적으로 널 생각해야 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이 자리가 마지막임을 고하는 강혁의 표정은 잔인할 정도로 냉랭했다. 마치 처음부터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옷자락을 쥔 준희의 손가락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준희는 이를 악물었다. 문득 룸메이트인 혜성의 말이 떠올랐다. 일밖에 모르는 저런 남자와 연애하는 거 쉽지 않을 거라던.

“진심이에요?”

묻는 준희의 말에 강혁이 빤히 바라보았다. 전혀 다정하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눈빛.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타인이 그곳에 앉아 있는 듯했다.

“농담으로 이런 얘기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바쁜 시간 일부러 쪼개서 나온 거야. 그래도 사귀었던 사람인데 적어도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안다. 이 남자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생각해 보니 사귀는 동안 약속 시간에 그는 한 번도 먼저 나온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매번 약속 장소에 나가 기다린 건 준희였다. 적게는 30분부터 길게는 두 시간. 한번은 호텔 방에서 바람을 맞아 앉은 채로 날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그날 이 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다. 어쩌면 약속 자체를 잊은 건지도 몰랐다.

그땐 화가 나고 서러워 울기도 참 많이 울었는데 바꿔 생각해 보니 이 남자는 참 귀찮았겠다. 바쁘다는데도 한사코 회사 앞에 와서 앉아 있는 제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생일이랍시고 없는 실력에 도시락을 만들어 몇 시간씩 기다리는 제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못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 놓고도 혹시나 싶어 호텔에서 기다리던 제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준희는 고개를 툭 떨어트린 채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그러네. 강혁 씨 그동안 참 귀찮았겠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준희는 강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가슴 근처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저도 모르게 울게 될까 봐 눈에 힘을 잔뜩 주었더니 코끝이 맵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좋은 애인이 되어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어떤 밤인가는 잔뜩 취해 주정을 부리듯 하소연을 했다. 자신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한 사람이라던 말.

그를 낳은 어머니는 핏덩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이름도 얼굴도 아는 것이 없는 생모가 저를 버리고 간 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모 손에 맡겼고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재혼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이 생겼지만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던 강혁의 넋두리를 들으며 그를 보듬었던 그날,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며 취한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취해 그날의 일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태생부터가 부담스럽다던 그에게 자신조차 짐이 되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귀찮게 굴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귀찮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희는 시선을 조금 더 들어 강혁의 턱 끝을 응시했다. 결론은 하나. 짐을 내려 줘야 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짐일지라도 저 남자에게 지고 있으라고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