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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안녕? 맞선 상대한테 던질 만한 인사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어제 헤어졌다 오늘 다시 만난 사이는 아니잖아.”

윤결이 턱을 매만지며 불만을 던지자 혜준은 서둘러 인사말을 정정했다. 이 자리에선 되도록 윤결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너무 짧았니? 그럼…… 잘 있었어? 오랜만이야. 6년만인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나온 거야?”

“응.”

“상대가 나라는 것도 알았고?”

“응. 너도 알겠지만 원래 여긴 언니가 나올 거였어. 근데 내가 대신 나온 거야. 이유는 나중에 차차 설명할게.”

“그래? 역시 서혜준이네. 나하고 무려 맞선을 볼 생각을 하다니.”

“우리가 맞선을 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녀의 질문은 무척 명쾌하고 거리낌 없었지만 표정에선 어딘가 조급함이 느껴졌다. 엷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창백함과 초췌함을 뒤늦게 발견하고 나서야 윤결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날이 선 시선이 꼼짝없이 혜준을 향했다.

“뭐지? 그 나약한 표정은? 적응 안 되게.”

“미국에서 유학 마치고 지난주에 들어왔어. 경영학 공부를 했는데 적성에 맞지는 않았어.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취미 삼아 하던 도예 공부를 계속하는 중이야. 너도 알 거야. 나 고등학교 때 가끔 도자기 빚었던 거. 그래서인지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어. 하지만 나태하게 쉬지는 않을 거야. 맞선을 보거나 결혼이란 걸 하기엔 우리가 아직 어리다는 거 알아. 그래도…… 결혼해.”

기계적으로 장황하게 이어지던 혜준의 설명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윤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서혜준이라는 녀석이 ‘결혼해.’라는 말을 저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윤결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한 이 녀석의 가면을 뒤흔들어 감춰진 구멍을 찾아내고 있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결과 한 가지를 발견했다. 아까도 느꼈듯, 혜준은 지금 무척 조급하고 절박하다는 것. 왜, 무슨 이유로.

“이 맞선이 결혼까지 이어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전개가 너무 빠른 거 아냐?”

“원래 맞선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야.”

“물론 알지. 하지만 너하고 나, 그 전에 풀어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아? 다 덮고 덥석 결혼부터 하기엔 내 뒤끝이 워낙 길어서 말이야. 뭐, 다 떠나서 그런 건 쿨하게 넘어갈 수 있다 쳐도 스물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야만 하는 네 절박한 이유가 궁금해.”

뒤끝이라니. 설마 윤결은 그때 그녀가 갑자기 떠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던 건가. 윤결의 말은 심드렁했지만 그의 표정은 분명 상처를 말하고 있었다. 아팠던 거니? 너, 상처받았던 거야?

“그럼 넌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야?”

자칫 눈동자가 흔들릴까 얼른 시선을 내리깐 혜준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감정을 감추고 표정을 없앤 얼굴이었다.

“결혼은 나라는 놈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뭐?”

“내 주제를 잘 안다는 뜻이지.”

혜준은 침통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다 다시 표정을 수습했다.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에 가득 깔린 느낌이었다. 윤결이 동조해 주지 않으면 절대 벗어나지 못할 그 세계에 다시금 발목이 잡혀버린 듯했다.

아니,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혜준은 윤결과 팽팽하게 시선을 대치하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넌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반드시 하게 될걸?”

“뭐냐. 그 자신감은?”

“넌 날 좋아했잖아.”

“그게 다야?”

“물론 그건 과거 일이니까 지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그럼 이건 어때? 우리가 결혼해도 네 사생활은 존중할 거야. 여자 문제 포함.”

윤결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이내 굳어지려 하는 표정을 풀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혜준의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뭘까. 혜준에게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절박감은. 윤결은 차분하지만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 서혜준이라는 녀석은 누구에게든 손을 내밀지 않는다. 혼자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저 단호하고 냉기 어린 표정 속에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절실하고 나약한 구석이 윤결의 생각을 자꾸만 헝클어뜨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벌써부터 백기를 들 수는 없지.

넌 좀 더 괴로워봐야 해.

“그게 언니 대신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구체적이고 납득될 만한 이유를 대봐.”

커피 잔을 들어 올리려던 혜준의 손길이 아주 잠시 멈칫하는 걸 윤결은 놓치지 않았다. 그제야 윤결은 이 맞선이 혜준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다리를 꼰 윤결이 치뜬 눈으로 정곡을 찔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갑이 된 상황이지? 내가 결심을 해야만 이 결혼이 성사되는 건가?”

“그런 착각은 하지 마. 네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그뿐이야.”

“아하. 넌 지금 나하고의 결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이 급한 거다? 꽤 섭섭하네.”

“그러니까 결정은 되도록 빨리해 줘.”

“너, 나하고 섹스할 수 있어?”

무방비한 상태에서 당한 일격이었다. 혜준은 내려놓은 커피 잔에서 손을 뗄 생각도 하지 않고 숨을 들이켜기만 했다. 뜨거운 무언가로 채워지는 목구멍을 겨우 달래고 짧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오호. 역시 강해, 우리 서혜준은. 하긴. 우린 이미 그 단계를 거치긴 했지. 끝까지 가진 못했지만.”

어쩌면 자신처럼, 혜준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티를 내지 않지만 어지간히도 당황한 것 같으니까.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 때로 이처럼 짜릿할 수도 있었다. 또 어떤 말로 저 녀석을 당황시켜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윤결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면서도 혜준에게 박힌 눈길을 풀지 않다가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봤다. 낯선 번호였다.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주강이나 인혁이 다른 이의 핸드폰을 빌려 연락을 취한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구야.”

귀에 턱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바지 깃에 묻은 먼지를 툭 털어 내고 있던 윤결은, 건너오는 의외의 음성에 혜준을 응시했다.

― 난 혜준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알겠지만 기연호텔리조트 그룹 회장이기도 하고.

이건 또 뭔가. 혜준의 부친이 왜 자신에게 전화를. 알 수 없는 영문에 윤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졌지만, 그것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불쾌감에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 꽤 불쾌했다. 왜인지 이유도 모른 채.

“그래서요?”

― 지금 혜준이하고 함께 있는 걸로 아는데, 혜준이한테는 아는 척하지 말고 내 말만 들어요, 윤결 군. 지금 당장 내 회사로 좀 와주면 좋겠는데. 할 얘기가 있어요.

“전화로 하시죠. 여기 무척 분위기가 좋아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

― 윤결 군이 오지 않으면 혜준이를 끌고 와야 할 텐데, 그래도 되겠어요?

낮고 부드러웠지만 날이 바짝 선 목소리였다. 혜준을 쳐다보던 윤결의 눈빛이 명징하게 변해 갔다. 뜬금없이 스며들던 불쾌감의 실체. 머릿속 한구석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것은 윤결에게 현재의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그가 가지 않으면 혜준이 끌려간다. 그것도 그녀의 부친에 의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물어뜯으시겠다면 뜯겨드려야죠.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눈앞에서 혜준이 그의 부친에 의해 이리저리 개처럼 끌려 다니는 걸, 또다시 볼 수는 없으니.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핸드폰 줘봐.”

태연하게 얼굴 표정을 푼 윤결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는데 혜준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것을 내밀자 혜준이 무척 빠른 속도로 번호를 입력시킨 후 다시 돌려주었다.

“내 번호야. 마음이 정해지면 연락해 줘. 너무 늦지 않게.”

탄식처럼 늘어지게 숨을 내뱉은 혜준이 마지막으로 그를 쳐다봤다. 윤결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모든 것들이 아직은 의문이었다. 왜 혜준이 언니 대신 맞선 자리에 나왔는지. 왜 혜준은 저토록 결혼에 절박한지. 왜 그녀의 부친이 자신을 호출했는지.

돌이켜보면 그 의문은 혜준에게 푹 빠졌던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혜준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나 숨고 감추고 뒤로 빠지기 급급했던 녀석이었기에, 더욱 갈증이 생긴 건지도.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문득, 그날 울부짖는 혜준의 목소리가 윤결의 귀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기연호텔리조트>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윤결은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백발의 노인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노인은 한눈에 봐도 혜준의 부친이 부리는 비서실장쯤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20층이라는 숫자에 불이 들어온 버튼을 응시하면서, 윤결은 오늘의 일을 할머니에게 모두 일러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맞선 상대가 바뀌었다는 것부터 난데없이 기연그룹 본사에 호출당해 불려가다니.

굳이 이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1인칭 서술자 시점에서 최대한 피해자처럼 포장해 먼저 치고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도 혜준의 눈빛과 표정, 손길 하나까지 머릿속 곳곳에 침투해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리셔서 복도를 따라 쭉 가시면 끄트머리에 회의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저는 다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봐야 해서.”

백발의 노인은 무척 정중하게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윤결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복도를 따라 걸었다. 회의실 푯말이 붙은 문짝이 보이자 그의 표정이 다소 심드렁해졌다.

회의실이라니.

딸의 맞선 상대를 호출해놓고 회의를 하자는 건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