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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전히 웅웅 울리는 시야 너머로 연희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입 모양으로 ‘연희야.’를 외치며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가 누구인지 연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숨을 거둔 연희의 엄마였다.

“엄마.”

이럴 거면, 결국엔 이런 수모를 당할 거였는데 왜 나만 두고 가 버린 거예요. 나 혼자 왜 이런 고통을 감당하게 만들어요.

“일어나!”

누군가 연희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연희의 눈앞에서 엄마의 환영이 사라져 버렸다. 안 돼, 나만 두고 이렇게 가지 말아요.

“네 아버지도 목을 맨 마당에 너라도 이 사태를 해결해야지.”

아버지가? 목을 맸다고?

다른 건 몰라도 그 말 하나는 귓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무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자신만 두고 갈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사태가 벌어지도록 자신만 몰랐을까. 이 집의 누구도 회사가 힘들다든지,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모든 걸 알고 싶지 않았던 건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년. 그저 집안에 전시되어 있는 인형처럼 살았으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은 몰랐던 거였나.’

“돈 있는 곳을 말하던가. 값비싼 물건이라도 내놓던가 그것도 아니면 몸뚱이라도 팔던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이 상황에서 또다시 떠미는 손길에 연희는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위에서 몰려드는 손아귀에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차라리 죽고 싶다. 죽고 싶어.’

이럴 바엔 차라리 누가 죽여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 든 순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짓들입니까.”

“당신은 뭐야?”

순식간에 머리 위의 손들이 치워지고 연희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무슨 일인지 몰라 꼭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체격이 꽤 큰 남자가 자신의 허리를 가볍게 안고 있었다. 매서운 눈매에 꽉 다문 입매가 꽤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빚쟁이들도 그런 사내의 인상이 무서웠던지 더 다가오지는 못하고 좀 떨어져서 고함만 고래고래 질렀다.

“당신도 돈 꿔 준 사람이야?”

“이 아가씨가 진 빚을 청산할 사람입니다. 불만 있으면 저에게 말하시죠.”

“뭐?”

그 말에 당황했는지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남자를 보아도 어디에서 봤는지도 모를 낯선 얼굴이었다. 더구나 이 남자에게 이런 호의를 받을 일조차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빚을 청산해 준다고 하는 걸까.

“진짜 그쪽이 빚을 청산해 준다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의 입매가 또다시 꾹 다물어졌다. 그 고집스러운 입매에 연희는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머리를 굴려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빚쟁이들은 남자의 확답에 주춤 물러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연희를 들쳐 메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연희는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로 그의 손에서 그저 흔들릴 뿐이었다.



***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다니. 연희는 그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회사는 1년도 버티지 못하고 홀랑 남의 손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상실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연희뿐.

“아가씨.”

연희는 잠시 상념에서 깨어나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방금 그녀를 빚쟁이에게서 사 왔다. 쭉 찢어진 눈매, 날렵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몸도 쭉 뻗은 남자는 연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고 있었다. 의자에 반듯이 앉아 있는 남자와 벌 받는 것처럼 서 있는 연희.

이 모양새가 퍽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연희는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해야 하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의 긴장이라도 풀어 주려는 듯 남자는 씩 웃어 보였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연희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분명 자신의 몸값을 지불했을 텐데, 아무것도라니. 순진했던 어린 시절이었다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연희는 잘 알고 있었다. 호의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걸.

“말씀만 하세요. 절 그 작자들 사이에서 빼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연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할아버지가 남겨 둔 연희의 재산마저 아버지가 다 털어먹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빚을 더 진 상태라 빚쟁이들이 몰려와 연희의 머리채를 잡았고, 그 아수라장에서 자신을 빼내 주었을 땐 몸이라도 팔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정작 남자가 자신 쪽으로 다가와 그가 연희의 뺨을 쓰다듬었을 땐 몸을 크게 움츠렸지만.

“진짜, 제 맘대로 해도 될까요? 아가씨?”

그의 속삭이는 입술이 연희의 입술 가까이로 바짝 붙었다. 입술 끝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바람에 연희는 저절로 감기려 드는 눈을 부릅뜨려 애를 썼다.

‘이런 거에 굴하지 않아. 내 몸을 원한다 해도, 난 상관없어.’

그의 입술이 연희의 윗입술에 살짝 닿는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깜박이지도 않아 눈물이 살짝 맺혔지만 상관없었다.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하던 모두 눈으로 담을 것이니까. 웃기지만 그게 연희의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눈을 부릅뜨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남자는 언제 볼을 만졌냐는 듯 뒤로 확 물러났다. 그리고 해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두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천천히 올렸다.

“저기요.”

“저기가 아니라 이민혁.”

“…….”

“‘민혁아’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아가씨.”

입가에 걸린 환한 미소가 차가운 그의 인상을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 미소에도 연희의 마음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디 저런 사람을 한두 번 보나. 얼굴엔 한껏 미소를 머금고 속으로는 칼을 품고, 기회를 엿보다가 등에다 칼을 쑤셔 넣겠지.

연희가 살던 세계에선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야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서 그런 인간들을 적절히 쳐 내었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무것도요.”

“아가씨.”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아가씨란 말도 그만 하시죠.”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연희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사 온 얼굴만 반반한 여자가 이런 식으로 굴면 목에다 칼을 꽂지 않을까. 오직 연희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를 수 없다니.”

민혁이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연희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눈을 매섭게 떴다.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 남자가 뭘 원하는 걸까.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알 테니 돈을 원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몸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뭐라 부르면 좋을까요.”

“연희.”

“아, 그건.”

잠시 멈칫하던 민혁은 환하게 웃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꽤 기쁘네요.”

그 말에 연희는 의아하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대체 뭐가 기쁘다는 걸까, 진짜 이상해.

“일단, 서로 알아 가는 것부터 시작해요.”

“네?”

“서로 잘 알려면 아무래도 같이 사는 게 제일 좋겠죠.”

“같이?”

연희의 질문에 민혁은 환하게 웃었다. 대체 뭐가 좋아 웃는지는 몰라도, 저 바보 같은 남자의 놀음에 맞춰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어 버리자. 빚쟁이들이 머리채를 잡았을 때부터, 이 남자가 날 이리로 데려왔을 때부터,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연희 씨를 진심으로 갖고 싶어요.”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연희의 상념이 반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내가 뭘 들은 거지. 날 갖고 싶다고?’

연희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그녀에 비해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자. 그런 말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연희는 그저 자신이 잘 못 들은 거라고 치부해 버렸다.

물론 그 뒤에 남자도 더 말을 하지는 않았고.



***



아침 7시 기상, 8시 아침 식사, 9시 출근.

5시 퇴근, 6시 저녁 식사, 7시부터 서재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음. 11시에 씻고 12시 취침.

일주일 간 지켜본 남자의 생활 패턴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희는 소파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남자의 집에 끌려오고 챙김을 받고 모든 게 다 연희의 뜻과 상관없이 흐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강제로 접근할까 봐 며칠간 맘 졸이며 지켜보았지만 전혀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