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엄마, 아빠.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누나!”

멀리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승현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동생을 향해 싱긋 웃었다.

“뛰지 마, 넘어져!”

동생 승재는 저 먼 곳에서부터 전력으로 질주해 온 탓인지, 숨을 헉헉 내쉬며 대꾸했다.

“축구 선수가 겨우 이거 뛰었다고 넘어져? 잔디에 걸려서 넘어질까 봐 축구는 어떻게 시켰어?”

승재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빈정거리며 승현에게 시비를 걸어 댔다.

“이게, 어디 누나한테. 감히!”

승현이 승재의 단단한 팔뚝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 아퍼어! 누나 손버릇 좀 고쳐.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연애도 못 하고 맨날 동생 뒤나 졸졸 쫓아다니지.”

분명 뼈가 있는 말인데도 승현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승재의 어깨에 걸쳐진 가방끈을 잡아 내렸다.

“이리 줘, 누나가 들게.”

“이걸 누나가 어떻게 들어. 얼마나 무거운데.”

일주일 치 빨래와 짐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고등학교 축구부에 속해 있는 승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학교에서 합숙을 했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만 하루 동안만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1학기까지만 해도 학교 앞은 축구부에 있는 아들들을 데리러 온 차들로 혼잡했었다. 하지만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서 대학 입시를 먼저 결정지은 아이들과 프로 축구팀으로 차출된 아이들이 합숙에서 빠지게 되었다.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몇몇 아이들만이 합숙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초조할 법도 한데, 승재는 누나인 승현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동생이었다.

“맨날 이렇게 데리러 안 와도 된다니까. 누나 때문에 나, 썸도 못 타잖아.”

“누나 때문에 왜 썸을 못 타? 내 동생이 어디가 어때서?”

“그게 포인트가 아니거든? 나 잘난 거야 내 팔로워들이 증명하고 있고. 근데 짜리몽땅한 누나가 붙어 있으니까 다들 내 여친인 줄 알잖아.”

“이 자식이 진짜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못 하는 말이 없어?”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야 하는데, 동생을 흘겨보는 승현의 눈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흔히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승현은 승재를 보며 절감했다.

승현의 나이 열여섯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당시 초등부 축구 선수였던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이렇게 잘 자라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승재는 자신이 더 나은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이제는 지쳐 가고 있는 듯했다.

그건 네가 못난 탓이 아니야, 승재야.

하지만 터놓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처지를 인정해 버리는 꼴이 될 것 같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뭐? 가진 거 없이 밑바닥에 있는 선수?

남자는 칼로 찌르듯 날카롭게 승재의 약점을 후벼 팠다.

재능이 있으면 즐거운 게 스포츠다. 하지만 그걸 업으로 삼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재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스포츠 세계였다.

열심히 벌어서 뒷바라지했다지만, 승현이 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남들 다 가는 국외 축구 연수 한 번 보내 줄 수 없었고, 때마다 축구화를 갈아 신기는 것도 버거웠다.

여러 후원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받은 집 한 채 때문에 번번이 후원은 무산되었다. 한번은 집을 팔아 버리자는 말을 꺼냈다가, 승재가 집을 나가 버리는 사달이 난 적도 있었다.

승현과 승재가 나고 자란 집이었다. 친척들에게 다른 건 다 뺏겨도 집만은 뺏기지 않으려고 발악했던 중3 여름 방학이 떠오를 때마다, 승현은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만 했었다.

남들은 돈으로, 백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있지만, 승현이 동생 승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진한 남매애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도 토요일 오후만큼은 일을 잡지 않았다.

승재를 데리러 와야 하니까.

승재는 그런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제 그만 오라는 타박을 하면서도 교문 앞에 서 있는 승현을 발견하면 함박웃음을 머금고 달려 나왔다. 오늘처럼.

“뭐 먹을래? 누나, 알바비 탔어. 다 사 줄게.”

“음. 그럼 진짜 비싼 거 먹는다?”

“그래! 비싼 거 다 먹어. 단 3만 원 안에서.”

“에이, 3만 원?”

“왜, 너 혼자 고기 실컷 먹어.”

“왜 나 혼자 먹어?”

“누나 오늘 소개팅해서 밥 먹었어.”

“뭐야, 누나 소개팅했어? 누구랑? 어떤 놈이야? 그래서 이렇게 이쁘게 입었어?”

“누나 이뻐?”

승현이 생긋 웃으며 묻자, 승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읊조렸다.

“아, 씨. 눈 버렸어.”

승현이 고운 눈으로 승재를 흘겨볼 때였다.

“점심이 늦었네요, 유승재 선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승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돌아서려는 승재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누구세요?”

역시나 그 남자였다. 호텔 카페에서 나올 때 붙잡지 않는 모습에, 승재에 대한 이야기는 끝난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디어프렌즈 에이전시 대표 한지윤입니다.”

남자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든 승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에이……전시요?”

“가자, 승재야. 너 배고프다며.”

“잠깐, 누나.”

승재는 제 팔을 잡아끄는 승현을 부드럽게 저지하며 다시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스포츠 에이전시라는 말씀이시죠? 디어프렌즈, 메이저리거들 있는 데 맞죠?”

승재의 목소리에 흥분기가 감돌며 미세하게 떨렸다.

“네, 맞아요. 유승재 선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누나 말을 잘 듣는 동생인 승재가 제 옆에 서 있는 승현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누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분명한데 누나의 반응이 왜 부정적인지, 그것 역시도 묻고 있는 듯했다.

“누님도 같이 가시죠. 제가 어떤 제안을 할지 승재 선수가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요?”

뱀같이 교활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따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저 남자의 완벽해 보이는 외모도 거부감을 더하는 데 한몫했다.

남자는 비상등을 켠 채로 정차해 있는 차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색 수입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승재는 명함을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리고는, 벅찬 숨을 내쉬었다. 승재의 입가엔 떨리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누나, 같이 가서 설명 한 번만 듣고 올까?”

아무리 동생을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들, 동생의 인생이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누나 된 도리로 동생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결국 선택은 승재의 몫이었다.

“그래, 그러자.”

승현은 동생한테 한없이 약한 누나였다. 사실, 승재는 속을 썩이거나 방황했던 적도 없어서 크게 다그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 남자의 등장은 승현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을 차로 안내한 지윤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고, 승재와 승현이 막 차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이열. 승현 누나 남친이에요? 차 되게 좋다. 저거 2억은 넘을 텐데?”

“좋겠다, 유승재. 누나 남친이 돈 좀 있나 보네. 이제 합숙 빠지냐?”

승재의 친구들이 세 사람 곁을 지나가면서 제멋대로 지껄여 댔다. 10대 특유의 위험한 빈정거림이 녹아 있는 말투였다.

“저 새끼들이 진짜.”

승재가 욱해서 나서려는 걸, 지윤이 막아섰다.

“상대하지 마. 저런 것들 일일이 상대해 주면, 네 기운만 빠져.”

이제껏 깍듯하게 경어를 쓰던 지윤이 말을 낮추자, 승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대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감히 누나를 욕되게 하는데 그걸 맞서지 못하게 하니 삐딱해진 것이다.

“앞으로 저런 인간들은 내가 상대해.”

그가 뒷좌석에 오른 승현과 승재를 단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지킨다는 뜻이야, 너도 그리고 네 누나도.”

둔중한 소음과 함께 차 문이 닫혔다. 승현의 심장도 쿵 울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지금껏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닌데, 지켜 주겠다며 단언하는 남자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승재는 아까 친구들이 했던 말을 갈무리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노기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생각으로 묘해진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동안, 고즈넉한 한식당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여기 한우 정식이 맛있어요. 들어가서 식사한 뒤에 이야기하죠.”

그는 다시 깍듯한 경어를 썼다. 예약을 해 두었는지, 식사실에는 딱 세 사람 몫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미리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종업원이 불판에 고기를 올리려는 순간, 승재가 입을 열었다.

“어린 운동선수치고 성격 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죠.”

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하고는, 클리어 파일에 담긴 서류를 내밀었다. 승재는 파일을 받자마자, 승현에게 함께 보자며 눈짓했다.

“우리 에이전시에서 맡는 최초의 축구 선수가 될 겁니다.”

이 남자를 따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한지윤. 야구 선수 출신인 그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야구 선수들을 서포트하는 야구 전문 에이전트였다.

그런데 그가 축구로 눈을 돌리면서 제일 처음 계약을 제안한 선수가 승재라는 것이다.

왜 하필? 망해도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은 무명 선수여서? 키워 주지 못한다고 한들, 따질 만한 백도 없어 보여서?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운동을 하는 승재에게 위험한 도전은 사절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한지윤은 경험 없는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도전적인 순간에 승재를 파트너로 지목한 것이다.

둘 다 가진 게 없는 상황에서 덤비는 싸움은 백전백패다. 이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만 가지 일을 해 온 승현의 경험에서 비롯된 인생 노하우였다.

“왜 하필 전데요?”

승재의 물음에 그가 고심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카페에서 한지윤, 저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을 때,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선수는 어떤 선수일까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지금 제일 밑바닥에 있는 선수죠. 유승재 선수는…….’



대놓고 승재를 가장 낮은 바닥에 있다고 했었다. 승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었다. 그가 같은 말을 승재에게 내뱉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승현이 안 된다며 에이전트 한지윤을 향해 고개를 내저으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처한 위치가 안타까울 정도로 다른 선수들이 가지지 못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제 눈에는 보이거든요.”

한정식집에 들어온 이후 내내 승재를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승현에게로 옮겨 왔다.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누나가 제 말을 끝까지 안 듣고 가 버리더라고요. 남매가 성격 급한 거는 똑같네.”

“누나, 이 사람 만났었어?”

휘둥그레진 승재의 눈에 어렴풋이 원망의 기색이 어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분명 엄청난 기회가 맞는 것 같은데, 왜 누나가 주저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만났었어. 그런데 내가 거절했어.”

승현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그러자 승재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지윤이 건넨 파일을 내려다보며 고심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나가 거절한 데는 이유가 있겠죠. 밥은 못 먹겠어요. 이거 먹다가 체할 것 같네요.”

승재의 대답은 단호했다.

“가자, 누나.”

두 남매가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한 뒤 식사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윤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식사실 미닫이문이 쿵 닫히고 나서야 지윤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볼수록 탐이 난다. 심지가 굳은 스트라이커, 유승재도. 하늘하늘한 작은 새 같은 모습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누나 유승현…… 저 여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