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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좋아하지만 1화

Prologue





약소 기획사에서 낸 공지는 그 어떤 인터넷 기사에도 뜨지 않았다. 그저 성의 없이 공식 카페에 올라온 짧은 글만이 한 비인기 아이돌 그룹의 해체를 표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빨갛게 쿵, 하고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으며 혼자 분을 삭여야 했다.

이렇게도 누군가의 피 땀 어린 노력이 짓밟힐 수 있다는 걸 11월의 끝자락, 이제야 마음 놓고 덕질을 하려 했던 열아홉 살의 겨울에 깨달았다.







1. 추억과 현실의 조우 (1)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참 행복해 보이더라. 그냥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가는 것도 자유롭고 취침과 기상 시간도 마음대로인 데다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손에 넣을 수 있는 배달 앱까지, 모든 게 아름다웠다.

“오늘은 햄버거나 먹을까.”

치킨 버거가 먹고 싶어져서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아직 근육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렇게 지내다간 금방 다시 물렁살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더라도 이 자유가 이번 주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이젠 복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기 싫다.”

누구는 복학, 복학 노래를 부르던데, 나는 학교 다니는 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자신을 억눌러 가면서까지 공부해 들어간 대학교도 상위라기보다는 중간쯤이란 말이 더 어울렸다. 차라리 지방의 이름 있는 대학이 더 권위가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사실은 이미 중학교 때까지 다져 놓은 바탕이 있었기에 단기간의 수능 공부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내가 수능 막판 몇 개월 동안만 죽을 듯이 공부한 걸로 보여서인지 짧은 시간 공부한 것치고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다며 어째서 미리 공부를 안 했냐는 질문도 종종 받았었다.

공부를 안 했던 이유를 대 보자면 아무래도 어쩌다 보니 한 아이돌에 빠져서 신나게 2년을 즐겼던 탓이 큰 듯하다. 그런데 그걸 즐겼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처절한 투쟁 속이었으니까.

……어쨌든 벌써 4년 전 일인데도 수능 때문에 100일 정도는 아예 실시간으로 달리지 못 했던 게 아직까지 뼈아프게 남아 있다.

내가 수능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사이 마지막 발악으로 나온 아이돌 ‘블랙 스카이’의 앨범은 망하다 못해 엄청난 적자를 남겼고 결국 그룹은 해체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물론 나 하나 응원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지막 활동을 응원해 주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수능 성적보다도 아이돌 마지막 팬 사인회를 못 본 게 더 아쉬울 정도로, 내게 있어 큰 부분을 차지했던 그들의 끝을 함께 하지 못했단 사실은 여전히 큰 미련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젠 멤버들이 뭘 하고 사는지조차 모른다. 내가 주도적으로 찾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이젠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관심 밖 비인기 아이돌이었기 때문이다. 데뷔 때만 살짝 주목받고 그 뒤로는 얼마 없는 인지도마저 사그라져만 갔던 비운의 아이돌이었다. 게다가 이젠 소속사도 망해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괜히 입맛이 썼다.

그래도 다들…….

“잘 살고 있겠지.”

한숨 같은 말로 옛 감정을 털어 버리고 다시 배달 앱을 뒤져 원하던 버거를 찾았다. 배달료가 붙긴 했지만, 군대 월급 적금을 깨 놨기에 걱정이 없었다.

[결제 완료]

일단 나부터 생각하자. 복학하면 아는 놈들이 몇이나 되려나? 너무 일찍 복학하는 거 아닌가?



어젯밤 별 걱정을 다하며 잠든 게 무색하게 막상 복학을 해 보니 반가운 얼굴이 몇 보였다.

“오래만이다. 잘 지냈냐?”

“넌? 머리 많이 길었다?”

남자 동기들이 소소하게 인사를 해 왔다. 개중에는 다행히도 먼저 제대해 사람들과 연락을 해 대며 자리 잡은 놈이 있어서 다들 어렵지 않게 과가 돌아가는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아, 이번에 우리랑 동갑인 신입생 있던데.”

“그럼 4수야? 대박이다. 이 학교에 4수해서 와?”

“몰라.”

“예뻐?”

“남자야.”

“아.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대?”

“글쎄다. 군대 다녀왔다가 다시 수능 봐서 온 걸지도 모르지.”

“그럴싸하네.”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핸드폰을 뒤적였다. 새로 산 폰이지만 남들이 모르는 잠금장치 안 갤러리에는 옛날 ‘블랙 스카이’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애였던 팅스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팅스라는 예명은 참 구리기 짝이 없다. 솔직히 그때도 구리다고 생각했는데, 최애 실드를 내 눈 콩깍지에도 껴 놔서 그런지 최면에 걸린 듯 가장 멋있는 이름이라고 키보드를 놀렸었다. 그렇게 적어 봐야 돌아오는 건 무플이었지만.

아무튼 SD카드 때문에 살아 있는 사진들을 전부 버리려다 그냥 잠금을 걸어 놓곤 놔두었다.

버리자니 손이 떨렸다. 이것들은 전부 고등학교의 나와 언제나 함께였던 추억이었다.

“신입생 OT 갔던 애들한테 난리 났었어.”

“그래? 예쁜가 보다?”

“남자라니까.”

“남자도 예쁠 수 있지.”

“이게, 자연스럽게 말 돌리네.”

뒷말은 그냥 흘려듣고 저쪽에서 대화하고 있는 동기들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야, 나하늘. 너 이번에 신입생 환영회 갈 거야?”

“나 갈래.”

“나도!”

“너네 말고, 나하늘.”

“나? 난 별로.”

혼자 다닐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복학하자마자 아는 동기들이 있는 건 좋았지만 신입생 환영회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괜히 애들 노는 곳에 끼어서 주접부리는 느낌이라 빼려고 하는데, 이번에 과 부회장을 맡은 일민이가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러지 말고 가자.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술 세잖아.”

저 말은 즉 자기네들이 술에 취하면 뒤처리를 부탁한다는 뜻이다.

“싫어, 미친.”

“간 김에 애들 얼굴도 보고.”

“나 돈 털리기 싫어. 애들이 막 밥 사 달라고 하면 어떡해.”

풍문으로 들은 게 있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더니 마주 보고 있던 놈이 키득키득 웃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냐? 생각보다 그런 애들 별로 없어.”

“……그래?”

“1학년 끝나자마자 휴학한 놈이니 알 수가 있나.”

분명 녀석도 2학년이 되기 전에 입대했으니 지금 복학한 것일 텐데 마치 자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네? 하지만 상대하기 귀찮아서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냥 편하게 논다고 생각해. 너 오랜만에 술 진탕 마시고 싶지 않냐, 응?”

썩 내키진 않았지만 일민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때는 선배 둘과 함께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잔치를 벌이기도 했었다. 확실히 술이 고팠다. 게다가 미리 과 사람들의 얼굴을 익혀 두는 게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



신입생 환영회는 3월의 중순에 이뤄졌다.

개강을 하고 나니 강의를 들으며 겨우 몇 시간 앉아 있는 시간도 버겁다고 느껴질 만큼 세상이 지루하다. 암만 인터넷을 뒤져 봐도 마음에 드는 아이돌은 없고, 게임을 해 봐도 재밌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무료했다. 그래서 그동안 나름 신입생 환영회를 기다리며, 새로운 얼굴들을 기대했다.

그리고 이어진 술자리는 개판이었다. 새로운 얼굴? 있기야 있었다. 다만 너무 낯선 얼굴들이라 말을 걸거나 다가가기도 어색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술자리는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한복판에 앉아 취했는지 과의 건배사를 반복하는 회장의 외침을 들으며 술만 들이켜는데 온 사방팔방에서 제 주량도 모르고 들이켜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원래 신입생들이 다 그렇지 뭐, 생각하며 웃고 즐겼지만 2차까지 따라갔을 땐 다시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 빨리 떠야겠다.

재미고 뭐고 까딱하다간 진짜로 뒤처리를 다 할 판이었다. 부회장인 주일민이 굳이 총무를 소개시켜 준 데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저쪽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총무도 학생회 임원이랍시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술을 섞어 마시고 있었다. 이러다간 미리 예상했던 친구 놈들 뒤처리는 물론이고, 오늘 처음 본 총무 대신 일처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학번 아래의 여자 총무와 함께 그 옆에 있는 부회장 새끼도 이미 맛탱이가 가 있다. 주일민 저거, 날 그렇게 참가하라고 꼬셔 댈 때부터 알아봤다.

술도 센 놈이 저렇게까지 취하다니. 나만 믿고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얼마나 맛이 가 있냐면 의자 모서리에 스웨터가 걸리고도 이거 놓으라며 신나게 웃어재끼고 있는 저 총무 쪽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미쳤네. 2차에 벌써 저 모양이라니.

“근데 현성인 안 와?”

“야, 현성 오빠라고 해야지.”

“동기끼린데, 뭐.”

현성이라. 순간적으로 덜컥 하고 반응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이름이었기에 둘이서 속닥거리는 여자 후배들에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으로 한 칸 건너 마주 앉은 신입생들이다.

“너도 현성이라고 해. 내가 현성아, 하니까 그냥 웃고 말더라.”

“진짜? 와, 그래 볼까?”

보아하니 동기인데 나이가 많은 신입생인 것 같았다. 남자 이름인 듯하고 어쩌면 우리와 동갑이라는 소문의 4수생일지도 모른다.

근데 정말 4수생이 맞긴 한가? 군대 다녀왔으면 사실은 재수생 정도 아닌가……. 아, 모르겠다. 생각하기 귀찮아.

“아무튼 언제 오려나?”

“너, 오빠 기다리는 거야?”

“뭐…… 온다고 했는데.”

그리고 저 예쁘장한 신입생은 그 현성이란 남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초롬한 인상에 옷도 이 날씨에 예쁜 원피스였다.

안 춥나?

그건 그렇고 소문의 신입생은 동기 녀석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꽤 잘생긴 것 같던데, 현성이란 이름은 다 잘생겼나? 멍하니 생각하며 앞에 있는 순살 치킨을 포크로 찍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뜯는 순간, 여자애들 반응이 심상찮음을 느꼈다.

“왔다, 왔다.”

“늦게 왔네.”

저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손을 크게 흔든다.

“여기, 이쪽이야!”

곧장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앞니로 닭을 뜯고 씹었다.

이 집 닭은 언제 먹어도 참 맛있는 게, 적당한 온도에서 소금과 후추 간을 한 튀김옷을 입혀서 정확한 시간에 꺼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비린내 없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치킨이 나올 리 없다.

“자리 없어?”

“응. 없어. 비었어.”

옆에서 떠들든 말든 나머지 포크에 찍혀 있는 치킨을 입에 넣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불쑥 든 의문에 옆자리에 앉는 남자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앗!”

찌르는 듯한 통증에 소리를 내자 남자가 돌아봤다. 입술과 혀가 따끔거렸다. 남자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 안으로 거칠게 포크를 넣어 입술을 쓸고 혀를 쑤셔 버린 탓이다. 아까 한 입 베어서 먹느라 포크 끝이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정신 놓고 집어넣어 버렸다.

“…….”

남자는 내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일 때까지 별말이 없다가 겨우 고통을 이겨 내고 고개를 든 순간에야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여전히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 그가 몸을 돌리고 관심을 끊는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데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현성 오빠. 나도 현성아라고 불러도 돼?”

“응.”

상관없다며 짧게 웃는 이는 분명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보다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람. 바로, 2년 3개월간의 처절한 팬질을 하게 만들었던 내 최애였다.

한현성. 예명 팅스. 팅클 스타의 줄임말. 나보고 쓰라면 혀 깨물고 죽을 것 같은 예명을 쓴, 막내도 아니고 그룹 내에서 어정쩡하게 두 번째로 나이가 어렸던 서브 보컬.

안 그래도 인지도가 없는 그룹인 데다 모든 게 다 어중간했던 탓인지 내 최애는 코어 팬도 거의 없었다. 단 하나뿐이었던 작은 개인 팬 페이지 회원 수도 겨우 두 자리였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이다. 나중에 현성이가 직접 자기 팬 페이지 방문했단 소식이 알려지면서 100명을 겨우 넘기긴 했지만, 그 이상 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커다란 가게 안에서 그 누구도 현성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오직 나.

나 하나만 빼고.

그나저나 계속 혀에서 비린내가 느껴졌다. 살짝 피 맛이 나는 게 제대로 찔린 듯했다. 따끔따끔한 통각도 가실 생각을 안 해서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도 옆에 앉아 있는 인물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진짜 괜찮아요?”

피가 묻어 나오는 휴지를 퉤 뱉어 내는 찰나의 추함을 들켜 얼어붙었지만 겨우 진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현성이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적당히 상대했다. 다른 쪽에 앉아 있던 동기가 호들갑을 떨며 금주령을 내리고는 아까 누가 넘어지는 바람에 사 두었다는 연고를 건네주었다.

“뭐야, 이거 입 안에 발라도 돼?”

“혀도 살이잖아.”

“근육 아니었어?”

“그냥 발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막 바르기도 뭐해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로 확인해 보니 혀도 현데 입술에도 눈에 띄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한숨을 쉬고 조심스레 약을 바른 뒤 남은 연고는 주머니에 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한숨.

그 뒤부터 갑작스레 몰아치는 긴장감과 흥분감에 몸이 달달달 떨려 오기 시작했다. 심장 위가 찌르르 울리며 손끝이 차가워졌다. 마치 학예회 연극을 앞두고 무대 뒤에서 긴장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 과에 한현성이 들어왔다는 건가? 공부 지지리도 못한 티가 나는 우리 망충미 넘치던 애기가?

“공부 겁나게 했나 보네.”

3년간, 어쩌면 입대 없이 내내 공부만 했을 수도 있다. 한현성은 열네 살 어린 나이로 철저한 을의 입장에서 작지만 깡패 같은 회사와 계약을 한 후 그곳에서 착취당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최종 학력은 중졸이 돼 버렸다. 심지어 온갖 애를 써 가며 버틴 끝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룹은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열아홉 살에 강제 해산당하고도 계약 기간 탓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회사에 묶여 있어야 했다.

“……아.”

갑자기 꿈이 바스라지고 대학이라도 가 보겠다고 여태껏 못했던 공부를 따라잡느라 애썼을 현성이를 생각하니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미친 새끼들.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스케줄도 없는 그룹 돌리겠다고 애들 고등학교도 안 보내는 게 무슨 짓이란 말이야.

무식 논란이 있었던 그때도 온갖 조롱을 받으면서까지 웃고 있어야 하는 현성이를 보며 대신 분개하고 공식 카페에다가 응원 메시지를 남겼었다. 머리 나쁘단 악플로 저 수줍음 많고 여린 놈이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눈물이 다 난다. 코를 훌쩍이며 마음을 추스르는데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뭐야? 의아함에 옆을 돌아보니 흐렸던 시야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현성이다. 역시 너무 잘생겼다. 그땐 너무 어려서 미완성 형의 애기 같았는데 역시 남자는 커 봐야 진가가 드러난다고.

……잠깐, 현성이?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또 묻네. 이 착한 녀석, 감동이다.

아니, 그런데, 진짜 현성이? 한현성? 나 지금 현성이랑 화장실에서 마주친 거야? 완전히 굳어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나를 현성이는 조금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뭐지……. 왜 나가? 여기 칸 두 개나 있는데, 왜? 텅텅 비어 있는 칸과 소변기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시 한번 거울을 봤다. 눈물 길이 나 있는 나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

미친, 지금 현성이가 이거 보고 간 거야? 겨우 입에 피 조금 났다고 질질 짜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네? 사실은 현성이를 생각하며 안쓰러움에 흘린 눈물이었는데.

오해를 오해라고 말하지 못해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애의 팬이었음을 밝히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차라리 상처가 너무나 아프고 쓰라려서 운 걸로 착각하게 두기로 했다.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정말 쓰라리고 쓴 상처가 마음에 돋았으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현성이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포크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포크가 무섭다기보다는 혀에 연고가 발라져 있어서 입맛이 영 돌지 않았다. 게다가 씻겨 내려갈까 봐 술도 못 마시겠다. 그냥 여기서 맨정신으로 이놈들 술 취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봐야 할 판이었다.

“휴우.”

팔짱을 끼고 깊게 한숨을 쉬는데 현성이가 자리에 앉는다. 빨리도 나왔다.

닥쳐라, 심장아. 멈춰라, 떨림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들 눈을 신경 썼던 과거를 떠올려 봤다. 잡지든 티브이든 몰래 훔쳐본 팬 사인회 현장 근처에서든 최애를 발견하고도 남팬이란 처지 때문에 억지로 감정을 억눌러야 했던 십대를 상기했다. 필사적으로 숨겼던 마음을 돌이켜 보자 잠시 잃었던 자제력이 다시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야 많이 단련된 입장에선 참을 수…… 흠. 솔직히 숨도 제대로 안 쉬어지는 이 마당에 제대로 참을 수 있을까? 바로 옆에 전 최애가 앉아 있는데? 어쩌다 보니 못 지운 거긴 하다만, 지금도 핸드폰에 얘 사진이 가득할 정도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평온을 가장해?

심지어 입대 후 내무반에서 온갖 여돌 무대를 보며 환호했던 와중에도 잊지 못했던 현성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현성이가 가장 좋았다. 이쯤 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급작스런 해체에 강제 탈덕이라고 울고 다녔건만 사실은 나…… 그냥 휴덕기였던 건가?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렇다고 과 후배를 덕질할 순 없잖아? 후배 덕질이라니. 이건 그냥 스토커잖아. 난 사생 혐오한다고. 그보다 이젠 일반인이잖아.

테이블 밑 다리가 발에서부터 서서히 떨려 왔다. 일찌감치 떨리기 시작한 손은 아예 팔짱을 껴 숨겨 버렸다.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간 손이 움찔거리며 달달달 떠는 게 느껴졌다.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잊고 있던 과거의 마음이 자꾸만 솟구쳐서 죽을 맛이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예고도 없이 현성이가 말을 걸어왔다.

“약 바르셨어요?”

“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칼답에 단답. 조금 냉정하게 보이기야 하겠지만, 이 이상 더 말하면 내 쪽이 심혈관계 이상으로 죽을 것 같았다. 입을 벌리는 순간 ‘한현성 최고!’ 하고 외칠 것 같은 두려움 또한 솟구쳤다. 그나마 술을 많이 안 마셔서 다행이다.

“네에.”

알았다는 뉘앙스로 답하고 나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 동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현성이를 보고 있자 심란해졌다. 같은 과라도 학년 커리큘럼이 다르니 앞으로 못 만날 가능성이 더 컸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건만 자꾸 걱정이 들었다.

행여라도 교양에서 만나 조별 과제라도 하게 된다면 어쩌지? 옆자리에 앉으면? 전공 강의실에서 만나면? 도망쳐야 하나? 인사를 해? 지금만 해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 반, 현성이 옆에 머물고 싶은 마음 반으로 자리에 붙박고 앉아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성인 딱히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계속 죽치고 있는 여자 동기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