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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길게 이어진 마차와 기병들의 행렬이 성벽을 지나 드디어 고성에 도착했다. 모든 사용인이 입구에 나와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맨 앞에는 마티유가 나와서 레녹스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레녹스 공작 각하.”

레녹스를 뒤따라 마차에서 중년의 남성도 함께 내려왔다. 레녹스의 보좌관, 블레즈는 고상하게 웃으며 마티유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내가 없는 동안 성을 잘 지키고 있었겠지, 마티유?”

“이렇게 보면 블레즈 님이 이 성의 주인이라도 되시는 것 같군요.”

“나는 어디까지나 공작 각하를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블레즈는 레녹스의 보좌관이자, 이곳의 집사장이기도 했다. 집사장인 그가 레녹스를 따라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것은 마티유의 덕이 매우 컸다. 비록 어린 나이기는 해도 마티유는 잘 훈련된 여느 사용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했다.

“안 보이는군.”

레녹스가 도착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티유는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레이디 아스트라는 감기에 걸려서 쉬고 계십니다. 각하를 뵙기 위해 나오겠다고 하시는 걸 제가 말렸어요.”

“그래.”

“쾌차하신 뒤에 각하께 인사드리고 싶다 하셨습니다.”

레녹스는 가만히 고갯짓했다.

그는 굉장히 말수가 적은 사람인지라,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레녹스와 함께했던 마티유는 그의 눈빛만 봐도 뭘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성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레녹스를 따라 마티유가 꼬리처럼 뒤쫓았다. 그런데 블레즈가 마티유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가서 마차 안 좀 들여다보게.”

“따로 짐이라도 챙겨 오셨습니까? 옮기는 건 하인에게 시키십시오.”

“너를 위해 수도에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왔지.”

“선물이요?”

“가서 꺼내 보면 알아.”

한껏 어른스러운 척하는 마티유도 다음 생일이 지나야 겨우 스무 살이 된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그는 선물이라는 말에 쏜살같이 마차로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블레즈가 장난스레 킥킥 웃었다.

혹시 내가 알렌 도공의 검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계셨나? 마티유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마차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에서 커다란 인영이 두 팔을 벌리고 펄쩍 튀어나왔다.

“까꿍!”

“아아아아악!”

마티유가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튀어나온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고 기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쉐인 국왕 전하!”

“내 귀여운 강아지, 잘 있었느냐?”

훤칠한 웃음을 띠면서 쉐인은 크게 벌린 두 팔로 마티유를 끌어안았다. 마티유는 황송한 그분의 팔 안에 갇혀서 망극하게도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쉐인은 팔을 더 세게 조여 왔다.

식겁한 마티유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유유히 성으로 들어가는 블레즈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이 사기꾼아! 이게 무슨 특별한 선물이야!”



* * *



“네가 미인이라며 칭송하던 아스트라 양을 어서 만나 보고 싶었는데…….”

“행여나 들여다볼 생각 마세요. 휴버트 영감님이 푹 쉬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네 명의 남자가 식탁에 둘러앉아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국왕인 쉐인을 제외하고 블레즈와 마티유까지 동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신분을 떠나 막역한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만나 함께 싸웠다. 이른바 전우라 할 수 있겠다.

“마티유는 키가 더 큰 것 같구나?”

쉐인이 와인을 음미하면서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마티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티유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무덤덤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앞으로 더 자랄 겁니다. 곧 전하를 따라잡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네가 쑥쑥 크는 걸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뿌듯하다.”

마티유는 일반 남성보다 체구가 큰 편에 속했다. 그러나 쉐인과 레녹스는 그런 마티유보다 훨씬 키가 컸다. 장정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커다란 식탁도 협소해 보일 정도였다.

“아스트라 양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마음도 같이 아픈 것 같구나.”

“향수병 기미도 약간 보이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는지 나이프질을 하던 마티유의 손에서 기력이 뚝 떨어졌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을 보고 블레즈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음흉한 시선을 보내며 와인 잔을 든 손에서 검지를 세워 마티유 쪽을 가리켰다.

“너 이 녀석, 아스트라 양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 제가 뭘요?”

“편지에 꼬박꼬박 우수에 젖은 눈이 예쁘다는 둥, 너무 가녀려서 부러질 것 같다는 둥 적어 보낼 때부터 알아봤지.”

“그건 그냥…… 그, 그 정도로 예쁜 아가씨라는 소리입니다! 보면 아실 거예요!”

마티유는 귀까지 얼굴이 빨개져서 마구 말을 더듬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 대고 벅벅 칼질하고 있었다.

“아스트라 양에게 줄 선물도 잔뜩 사 왔는데 말이야. 어서 빨리 내게 웃는 얼굴을 보여 줬으면 좋겠군.”

“쉐인 전하, 괜한 부담 주지 마세요. 안 그래도 성녀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눈치라고요.”

“왜지? 촌구석에 틀어박혀서 지내느니 만인에게 성녀라 불리며 호사스럽게 사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사람은 저마다 가치를 느끼는 게 다른 법입니다.”

그러자 블레즈와 쉐인이 동시에 풋, 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아직 어린 마티유가 다 큰 어른인 양 무게를 잡을 때마다 골려 주고 싶고 또 귀여워해 주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이미 질릴 대로 두 사람의 장난질에 어울린 마티유는 심통이 나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레이디 아스트라가 다시 고향에 돌아가서 살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요?”

“이젠 불가능하지.”

쉐인이 딱 잘라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알아 버렸어. 지금도 아스트라 양을 얻기 위해 각국에서 협박 아닌 협박이 날아들고 있어. 그나마 이만큼 온건한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외국에 뺏기는 것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너무 가혹해요.”

“더 가혹한 건 이 이후의 일이야. 성수를 다룰 줄 아는 그녀에게 그들이 무얼 바라겠나? 성수를 이용해 침략 행위라도 시도하는 날에는 대륙이 쑥대밭이 될걸?”

성수들이 가진 각색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든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비행 능력으로 운송업을 활발하게 만든다든가, 날씨와 토지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다면 농업도 지금보다 풍족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성수를 이용해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면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겨우 대륙의 정세가 안정을 되찾아 가는 지금, 다시 국지전이 일어나면 더는 감당할 수 없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쉐인 전하, 정말로 레이디 아스트라를 빼앗기지 않을 대책이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녀가 원한다면 최상의 환경에서 최고의 인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줄 거야.”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이디는 성녀라고 불리는 걸 싫어해요.”

“커다란 신전에서 온갖 비단과 보석을 걸치며 윤택하게 산다면 그녀도 성녀라고 불리는 걸 싫어할 수 없을 텐데?”

마티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쉐인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레이디 아스트라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잖아요.”

마티유가 힘없이 말했다.

마티유의 눈동자가 묵묵히 식사하는 레녹스에게 돌아갔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레녹스는 소리 없이 음식을 씹고 있었다.

“누구나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요.”

그 한마디는 레녹스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 * *



눈이 떠진 것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자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렸는지 입고 있는 슈미즈가 눅눅했다. 하지만 그만큼 잠들기 직전보다 몸이 가뿐하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방에 달린 종을 울리면 하녀들이 와서 도와주겠지만, 곤히 잠든 그녀들을 깨우기 미안했다.

하는 수 없이 아스트라는 홀로 욕탕으로 향했다. 곱게 자란 영애가 아닌 아스트라에게 스스로 물을 길어 오는 것쯤은 매일 하던 일이었다.

아스트라는 숄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창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성의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흰 달이 드높은 하늘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달빛은 은은하게 세상 만고를 비추었다.

그녀는 달빛이 복도에 깔아 놓은 하얀 계단을 거닐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이곳에 있구나. 꿋꿋하게 숨겨 놓았던 속마음이 정적에 이끌려 밖으로 흘러나왔다.

또다시 도서관에서 떠올렸던 의문이 되풀이됐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종 산에 올랐다. 그러면 강이나 산 어딘가에서 신비로운 생물들이 말을 걸어 왔다. 그들은 아스트라를 예뻐해 주었다.

비록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 아스트라에게 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에게 그들은 짐승일 뿐이었다. 사육하고 싶은 짐승.

어느 날 아스트라에게 많은 보석을 들고 찾아온 대부호가 이렇게 간살질했다.



‘레이디 아스트라, 당신이라면 성수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지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간들의 탐욕을 엿본 순간은 괴롭고 쓰라리기만 했다. 왜 아버지가 성수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지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이 길어지는 바람에 무작정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더니 어느새 도서관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으나, 나중에 읽을 만한 책을 미리 몇 권 가져가고 싶어져서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커다란 책장을 짚으며 도서관의 안쪽으로 걷던 그녀는 저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늘 굳게 닫혀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해도 열쇠로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에 누가 있는지, 조금 벌어진 문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스트라는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 늦은 밤에 누구지?

“거기 누구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롭고 냉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