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건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고 있지. 답할 길이 없어 미안할 따름이다. 어차피 혼자 지내는 몸, 간혹 놀러 오면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할 수 있을 것이야.”

“……멀리 가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당신께 해가 되는 즉시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흑염.”

“허나 지금으로서는 득이 되고 있음을 인정해야겠지요.”

조용히 몸을 일으킨 흑염이 말을 이었다.

“금일 떠나게 될 수렵에서, 황제는 경계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제단에서 산 제물을 미쳐 날뛰게 함으로써 상징성만 깎아내리려던 자들이 황제가 직접 움직이게 되자 더 큰 욕심을 품게 된 모양이니.”

건헌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흑염이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으로 오는 중에 다락의 쥐새끼들이 나누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아니,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은 당신의 뜻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이 심장이 여전히 당신이 주인이노라 외치는 동안은.”

예를 갖춘 흑염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건헌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쯤 황제는 아침 조회를 위해 정전正殿에 있을 터였다. 식사한 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건헌으로 하여금 달음박질을 하게 만들었다. 놀란 눈길들을 무시하고 달린 끝에, 그는 본궁에 막 들어서려던 황제의 앞에 불쑥 나설 수 있었다.

“멈추어라!”

호위들이 당장 검을 빼 들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건헌의 눈에는 시퍼런 검날 너머 놀란 얼굴의 황제만이 보였다. 건헌은 그 자리에서 부복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감히 청하건대, 주위를 물려 주십시오.”

일순 그는 경악한 시선들 앞에 바늘꽂이가 된 기분을 맛보았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가운데 꿋꿋이 기다리는 그를 향해 내려온 황제의 목소리는 묘하게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다들 여기서 대기하도록.”

건헌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따라오라.”

짧은 말을 던진 황제는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금방 받아들일 줄 몰라 당황한 건헌은 질책하는 시선을 던진 소군 덕분에 퍼뜩 현실로 돌아와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황제는 본궁의 안뜰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사방이 트여 함부로 들을 귀가 없는 곳이었다. 건헌은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제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적당한 거리 끝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식사 외의 시간에 식탁 외의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군.”

놀리는 듯, 빈정대는 듯 미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는 그럼에도 진지했다.

“용케 그 일과표를 벗어날 생각을 했으니 용기가 가상타 할 것이나, 칭찬하기에 앞서 들어야겠다. 원대로 되었으니 말해 보라.”

“금일 수렵에 동행시켜 주십시오.”

이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의식을 중단시킬 수도, 각관조차 말리지 못한 황제의 외유를 막을 도리도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대비해야 했다.

그의 주저 없는 말에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연유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그는 그 질문을 듣고서야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달았다. 흑염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이상 설명할 길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든 자신에게 뒤늦게 당혹하기 시작한 그는 무언의 재촉에 결국 침통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다, 라. 일을 이리 키워 놓고?”

황제가 우습다는 듯 반문했다.

“아마 조회가 끝나기도 전에 그대가 짐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소문이 온 궁에 퍼질 거다.”

……그렇게만 소문이 나도 다행이겠지.

궁중의 소문이란 게 얼마나 살이 붙여지고 어그러질지 익히 아는 그는 새삼 한숨을 참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그대가 그 소란을 감수하기로 했거나,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다급했거나. 어느 쪽이든 심상치는 않군. 무언가 허튼소리라도 들었나?”

건헌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황제는 그가 그녀의 동행을 자처한 것이 음모가 아니라 그 반대의 마음이리라 알아주고 있었다. 돌연 맞닥뜨리게 된 예상 못 한 신뢰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이지적인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그녀가 재차 확인했다.

“다만 그대는 그 말을 진정 우려하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익숙한 미소는 그럼에도 눈이 부셨다.

“좋다.”

너무 쉽게 나온 대답은 그로 하여금 귀를 의심케 했다. 허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황제가 말을 이었다.

“각관에게 일러둘 테니 준비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말 타는 법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낙오자는 두고 갈 거다. 불안하거든 출발 전까지 연습해도 좋아.”

끝까지 그를 놀리듯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 그녀는 예고 없이 걸음을 뗐다. 그리고 그의 옆을 지나쳐 갔다. 옷자락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지난 찰나, 그는 어쩐 일인지 숨을 쉬지 못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뒤로 남은 잔향이 그를 맴돌았다.



二章.


홍국의 국가적 의례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제례는 만물이 풍성해지는 가을에 치러진다. 한 해의 무사함과 은혜로운 결실에 감사하며 하늘에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례가 끝나면 방생하는 그 제물이 무엇인가는 상관이 없지만, 반드시 무악산茂岳山에서 포획한 금수여야만 했다. 태곳적부터 이어 온 기기묘묘한 협곡들, 그 누구도 들여놓지 않는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산의 기운을 담고 있는 생명만이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성산聖山은 일찍이 홍과 백아의 천연 국경선이었기에 황실의 소재가 달라졌다 하여 그 거리가 더 멀어졌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류안이 수행원들과 함께 산 아래 도착한 것은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였다. 천막을 치고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그녀를 필두로 한 무리들이 험준한 산속으로 능숙하게 말을 몰고 들어갔다.

너른 들판이 아닌 만큼 뒤따르는 무인들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 주의력이 간혹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류안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로 곁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감별사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로 오로지 그녀만을 쫓았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소리를 높일 때, 산세를 읽을 때, 수행원들이 그녀가 보고 말하는 것을 함께 볼 때조차 그는 그녀를 보았다. 이쪽을 끈기 있게 지켜보는 시선은 이유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어지게끔 짜릿했다. 곧고 올바른 성품의 그는 그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는 것뿐인데.

제풀에 웃은 류안은 고삐를 당기는 힘을 조절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식사 중에 일어날 일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고, 아니 오히려 그녀가 죽는 편이 나을 텐데도, 오해를 감수하고 나선 건 정말 그다운 행동이었다. 부황에게 맞서 반역을 도모했던 것만큼이나…….

문득 시야 한끝에 잡히는 흰 그림자가 그녀의 상념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린 류안은 눈을 빛냈다.

“보았느냐? 흰 사슴이다! 저놈을 데려가야겠다.”

이랴! 신호가 떨어지자 말은 주인의 재촉대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건헌과 무인들이 따랐다. 덤불과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 그들 앞에 이내 눈처럼 흰 사슴이 나무 사이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류안은 즉시 고삐를 놓고 화살을 겨누었다.

이힝힝힝힝!

그 순간, 갑자기 류안이 타고 있던 말이 펄쩍 뛰어올랐다.

“워, 워!”

두 손 다 놓고 있던 류안은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으나, 재빨리 활을 놓고 말갈기를 붙들었다. 낙마는 면했지만 진정하기는커녕 계속 미친 듯이 뛰는 말의 목을 안고 무조건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펄쩍거리던 말은 류안이 끈질기게 버티자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폐하!”

경악의 외침이 빠르게 멀어지고 잇따라 쫓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류안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말을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잘못 떨어지면 그대로 황천길이라, 말이 제풀에 지쳐 넘어지거나 속도를 줄이기 전까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혀를 차던 류안은 이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폐하!”

그리고, 그 점을 미리 경고한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류안은 겨우 고개를 틀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바짝 따라온 그를 발견했다. 그의 절박하고 심각한 표정이 낯설어서 조금 전까지도 냉정하던 심장이 펄쩍 뛰는 것만 같았다.

“힘을 빼십시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어 승낙 의사를 알렸다. 그때 류안의 말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류안이 덩달아 들썩댄 찰나, 건헌이 이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듯 품으로 당겼고 그녀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수풀 위로 떨어졌다. 한차례 크게 튀어 올라 비탈길을 구르기 시작했지만 그녀를 감싼 팔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을 굴러떨어진 후에야 간신히 멈추었다.

“……읏.”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류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뒷머리를 단단히 감싸 얼굴을 어깨에 묻은 손의 단단함과 밀착된 몸의 체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