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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4화

Chapter 1. 끝의 시작 (4)



***




시모네.

“시모네.”

물먹은 몸이 수면으로 떠오르듯 기포 섞인 숨을 터뜨렸다. 눈꺼풀이 들리고 흐린 시야가 선명해졌다. 꿈속에서 본 까만 눈동자가 동공에 선연히 맺혔다. 시모네는 가슴이 먹먹해 입술을 깨물었다. 말 없는 그가 의아했는지 레나트가 이마를 맞대 왔다.

“열은 없는데.”

십 대 때의 레나트가 사라지고 이제는 원숙하게 나이 든 그가 눈앞에 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볼을 쓰다듬는 손을 느끼며 시모네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안온한 공기가 둘 사이를 맴돌았다. 적막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시모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창밖으로 빛이 스며들어왔다. 날이 밝고 있었다. 꿈은 찰나와 같았는데 시간은 매정하게 흘러 태양까지 풀어놓은 모양이었다. 시모네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

단단한 손이 부드러이 전신을 주물렀다. 맥없이 늘어진 시모네가 이상했는지 레나트는 목과 어깨를 시작으로 팔뚝까지 천천히 주물렀다. 그렇게 내려온 손길이 왼쪽 손끝에 이르러선 오래도록 머물렀다.

“…….”

장갑이 벗겨졌다. 시모네는 거부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타인에겐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흠이지만 그에겐 숨기지 않아도 괜찮았다. 손가락의 장애는 레나트가 시모네를 지켜 준 증거였다.

레나트는 손가락 마디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탄식했다.

“실력이 부족했어.”

자책 어린 소리에 시모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시 레나트의 실력은 절대 모자란 수준이 아니었다. 제국 전역에서 모인 검사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을 자랑했다. 단지 경험이 약간 부족했고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을 뿐이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시모네가 목숨을 부지한 게 기적에 가까웠다.

“……내가 너를 불렀어.”

“…….”

“너를 불렀어…….”

시모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목숨을 잃을지라도 절대 레나트를 부르지 않았을 터다. 혼자서. 홀로. 그리 감당했을 텐데.

“내겐 다행이었다.”

“……?”

“네가 어리고 미숙했기에 내가 달려갈 수 있었어. 그 순간 날 떠올릴 수밖에 없을 만큼 네가 의지하는 건 나뿐이었지. 그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손가락에 입술이 닿았다. 신경이 죽었음에도 따스한 무언가가 스며든 듯했다. 시모네의 얼굴이 살며시 달아올랐다. 퇴색됐다고 여겼던 설렘이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어렸고 미숙했어. 좀 더 냉정했어야 했지. 가진 것이 많았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에 네가 그렇게까지 구석에 몰렸던 거겠지.”

“아니! 너는 내게 넘칠 만큼 충분했어. 너마저 없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너는 어렸다고 하지만 글쎄……. 그때 날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은 너뿐이야.”

목이 메어 시모네는 간신히 침을 삼켰다. 지금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워! 너로 인해 내가 살았어. 그리고 미안해. 외면해서…… 미안해……. 미안해…….”

시모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가락 사이로 사죄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죄책감이며 처절한 사과였다.

레나트 앞에선 독한 오데마르의 뱀도 영원한 죄인이었다. 그는 복수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죽은 적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오직 레나트에게만 미안할 뿐이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왈칵 터진 울음에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래도 사과를 멈출 순 없었다.

“그만.”

얼굴에서 손이 떼어졌다. 시모네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레나트가 미미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 콧물로 지저분한 얼굴일 거라 생각하니 시모네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못생겼는데 심장이 뛴다니. 이것도 병이다.”

“못-!”

“예전이나 지금이나 못생겼다.”

시모네는 순간 울컥했다. 레나트처럼 수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외모로 타박 들어 본 적도 드물었다. 제 상황도 잊고 못된 심보가 삐죽 튀어나오려 했다.

“함께 합동 실습했을 때였나. 산을 넘을 때 갑자기 나타난 곰 때문에 네가 기절할 듯이 놀라 바닥에 엎어진 거 생각나? 배에 가지런히 손까지 올리고 죽은 척했지.”

“읏. 그건!”

갑자기 꺼낸 자신의 흑역사에 시모네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그때 드러누운 건 형제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탓이었다. 곰 앞에서 죽은 척하면 그냥 지나간다는 말에 순진했던 그는 그 말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곰을 만날 일 없는 동생에게 장난친 것에 불과했지만, 만약 레나트가 없었다면 산 채로 곰에게 뜯어 먹혔을 터였다.

묻어 두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숨죽인 그를 넘어 곰을 해치웠던 레나트는 차마 대놓고 웃진 못하고 한참을 입술만 부들거렸다.

“바닥에 누워 눈을 꼭 감은 널 봤을 때 어찌나 황당하던지. 심지어 울었잖아. 곰과 싸우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 하마터면 볼에 발톱 자국이 날 뻔했지.”

“갑자기 그때 일은 왜 꺼내고 그래.”

“그때도 넌 못생겼었어.”

“야!”

기어코 시모네의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놈의 못생겼단 소리! 잘 보이길 바란 건 아니지만, 못나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 뒤로 너만 보면 그 얼굴이 생각나는데 시시때때로 웃음이 튀어나와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시모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살짝 입술이 맞닿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시작이었나 보다.”

“읏.”

‘무엇을’이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시모네는 멍하니 체온을 음미했다. 얼굴을 물린 레나트가 시모네의 허리를 붙잡고 일으켰다.

“밖에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더군. 이만 돌아가도록 해.”

“……응.”

시모네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후작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기까진 다소 시간이 걸릴 터였다.

미적이며 침대에서 발을 내린 그는 부드러운 러그의 감촉에 발가락을 꿈질거렸다. 안온한 방 안엔 레나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주방으로 간 레나트가 주전자를 들고 나와 찻잔에 무언가를 따랐다. 회색빛의 걸쭉한 액체였다. 끓인 지 얼마 안 됐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동국에서 들여온 곡물을 갈아서 만든 수프야.”

“고마워.”

낯설지 않은 향이었다. 아데마르 휘하 상단의 주 무역 국가가 동국이기 때문에 그곳의 곡물 또한 접할 일이 많았다. 서국에도 곡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후가 다르고 식문화가 달라서인지 맛 자체가 달랐다.

시모네는 스푼 가득 수프를 떠 목구멍으로 넘겼다.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천천히 식사하며 레나트의 모습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는 창가에 놓인 제국 신문을 집어 의자에 앉았다. 차분히 신문을 훑는 모습에선 별다른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모네는 절망에 빠진 자가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레나트는 한쪽 다리가 망가졌다. 불구가 된 몸은 검사에게 치명적이라 많은 이가 스스로 삶을 놓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굳건히 버티는 레나트가 안심되면서도 시모네는 가슴이 쓰렸다. 역시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변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과거의 레나트는, 아카데미 시절의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유쾌했다. 어느 누군가가 그 미소가 태양과도 같다고 한 말이 딱인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다소 냉소적이고 묵직한 분위기는 절대 떠올리지 못할 만큼.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집안일로 아카데미를 떠난 시모네를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레나트가 아데마르에 찾아온 날, 그는 생애 첫 살인을 했다.

시모네는 아직도 그 일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가족을 잃어 넋 놓고 있던 자신에게 찾아온 암살자. 놈을 죽였던 레나트.

그땐 레나트도 미성숙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피를 본 소년은 큰 충격에 빠졌음에도 시모네를 끌어안고 고래고래 소리쳐 가문의 기사들을 불렀다. 그로 인해 시모네는 살았지만, 레나트의 변화도 시작되었다.

회상을 마치고 빈 그릇을 내려놓자 레나트도 신문을 접었다. 시모네에게 다가온 그는 차분히 시중을 들었다. 시녀들이나 할 법한 짓이라 기겁하며 만류했지만, 레나트는 묵묵히 코트를 입히고 신발을 신겼다. 마지막으로 목도리와 장갑까지 챙긴 후에야 시모네에서 손을 거뒀다.

“내려가자.”

예비분의 지팡이를 꺼낸 레나트가 문가를 가리켰다. 먼저 시모네를 내려보내고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각하.”

대기하고 있었는지 카발리가 시모네를 맞이했다. 그를 손짓으로 내보낸 시모네가 레나트와 마주 보고 섰다.

“……또 와도 될까?”

“밝을 때라면. 밤은 위험해.”

“기사들이 있어서 괜찮아. 그럼 또 올게.”

이별을 고하면서도 시모네의 마음엔 미련이 가득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이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쥐어짜듯이 말을 꺼냈다.

“레나트.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레나트는 조용히 기다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뻐끔거리던 시모네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갈게.”

시모네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가슴이 스산하게 얼어붙었다.

“시모네.”

나직한 부름에 움직임이 멎었다.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겠다.”

온기를 품은 말이 시린 마음을 녹였다. 시모네는 눈을 꾹 감았다. 열이 오르고 눈가가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한차례 손으로 문지른 그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시모네는 백사자단과 흑사자단의 단장들을 소환했다. 심상치 않은 주인의 기색에 시중을 드는 이들이 숨을 죽였다.

“부르셨습니까.”

“…….”

시모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예를 갖추는 두 남자를 응시했다. 한 명은 아데마르 가문의 표면적인 일을 처리하는 백사자단의 단장 카발리였고, 나머지 한 명은 다소 불법적인 일을 처리하는 흑사자단의 단장 만드로프였다.

카발리는 기사치곤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그에 맞는 날카로운 검술을 지녀 제국에서 꽤 알아주는 검사였다. 그리고 만드로프는 구릿빛 피부에 신장 이 미터는 될 법한 거체에 맞게 자신의 상체만 한 시미터를 휘두르는 초원 출신 검사였다.

“내 감이 무뎌진 건지, 아니면 경들의 경계가 소홀해진 건지.”

시모네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전적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니만큼 큰 실수는 없었는데,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니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짜악-! 짜악-!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마자 뺨에 불이 붙었다. 기사에겐 다소 모욕적인 처사겠지만, 두 사람은 가만히 시모네의 처벌을 감내했다.

“어리석은 경들을 위해 내가 왜 손을 들었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시모네는 아리는 손목을 붙잡고 집무실 책상에 몸을 기댔다.

“둘 중에 황제가 이 저택을 감시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그 무슨!”

“……!”

“……몰랐나 보군.”

영문 모를 얼굴들을 보자니 시모네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경계가 뚫리는 것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화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게 잘 안 되었다. 한순간에 경비가 뚫려 독살당했던 가족이 떠올랐다.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쥐새끼가 숨어든 것도 모르다니! 내가 저택에서 쓰러진 것까지 황제가 알아야 하나? 어떻게 관리했기에 내 사생활이 궁으로 새어 나가느냔 말이다!”

퍽! 하고 만드로프의 가슴팍이 거세게 밀렸다. 충분히 막을 수 있음에도 만드로프는 순순히 체벌을 받았다. 그렇다고 타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크도프인이라 그런지 몸 하나만은 바위만큼이나 튼튼했다.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아르스란 제국과 달리 크도프 제국은 전사의 나라로 불리는 전투 국가였다.

“만드로프. 내가 흑사자단의 단장을 경에게 맡긴 건 그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무기와 달리 네가 심계에 밝고 결과를 위해선 과정이 다소 비겁해도 된다는 융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백사자단이야 외부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니 그렇다 치고 가문 내부의 일을 책임지는 네가 쥐새끼들이 저택에 파고들었는데 그거 하나 눈치채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각하. 내부의 첩자를 바로 솎아내겠습니다. 화를 푸십시오. 몸에 좋지 않습니다.”

“내 몸 걱정하기 전에 신경 쓰일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죄송합니다. 각하.”

카발리가 자책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던 시모네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드로프와 달리 카발리에겐 화풀이해 봤자 소용없었다. 뼛속까지 전형적인 기사라 이 정도만 말해도 끝없이 자책하며 실수를 바로잡을 터였다. 그보다 더 정신을 차려야 할 이는 만드로프였다.

“카발리 경은 황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기사단 훈련을 하며 긴밀하게 경비를 점검하도록. 이참에 수상한 눈은 모조리 제거하도록 해. 황제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에서도 헛수작 벌였을지 모르니까. 모든 걸 비밀리에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예. 각하.”

“그리고 만드로프 경.”

만드로프가 까만 눈을 굴리며 시모네의 눈치를 살폈다. 일견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시모네는 속지 않았다. 저런 눈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고 죽였는지 알기 때문이다. 반이 사막이고 반이 초원인 척박한 대지 태생이라 그런지 만드로프는 천성적으로 크도프 전사 특유의 잔혹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의 첩자를 솎아내자마자 자연사로 위장 처리해. 황제도 그 정도면 경고를 알아듣겠지.”

어차피 황제 또한 시모네가 어찌 처리할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대놓고 그의 사생활을 입 밖으로 꺼낸 게 그 증거였다. 서운하진 않았다. 가족과도 나눌 수 없는 게 권력이었다. 한순간에 커 버린 충신을 감시하는 것은 황제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시모네가 순순히 당해 줄 위인이 아닐 뿐이다.

“기한은 삼 일이다.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이번 달에 내리기로 한 크도프산 만주(萬酒)는 이 몸이 마시지.”

“……헉! 빛보다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런 무례한! 경! 만드로프 경!”

카발리가 채 말리기도 전에 그 큰 거구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니 휑하니 열린 문과 그 너머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발렌드만이 보일 뿐이었다.

“저 버릇은 언제 고치나 모르겠습니다. 이건 각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항상 최상급의 술을 내리시니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예의 없게 굴지 않습니까.”

“됐어. 술 하나로 그를 통제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야.”

카발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건 만드로프를 다루는 시모네만의 방식이었다. 사막과 초원을 질주하는 전사에게 술 한 잔은 삶의 동반자와도 같다. 그것은 훈련이나 전투를 끝내고 술집에서 뒤풀이나 하는 제국인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문화고 유산이었다.

“그나저나 만주라니. 그런 귀한 술을 구하셨습니까?”

“동국의 도자기와 맞바꾼 특상주지. 크도프 황실에서도 진귀한 걸 모으는 머저리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들에게 만주 정도야 도자기 하나만큼의 가치밖에 안 해.”

“하아. 삼십 년 가까이 묵힌 술을 도자기 하나에 넘겨주다니. 크도프인의 생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천년주(千年酒)도 있는 마당에 만주 정도야.”

실제로 천 년 동안 묵히진 않고 백 년 이상 된 술들을 그 값을 따질 수 없다 해 천년주라 불렀다. 시모네는 만드로프를 아데마르에 묶어 놓기 위해 매해 좋은 술을 내렸는데, 이번엔 제 일을 못 했으니 쉬이 줄 마음이 없었다.

“경도 그만 나가 봐.”

“예. 각하. 물러가겠습니다.”

시모네의 손짓에 카발리는 단정한 몸짓으로 예를 올리고 나갔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시모네는 미간을 문질렀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워서인지급격히 피로했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여기에 레나트의 입술이 닿았다.

무척 오랜만의 체온이었다. 사이가 틀어지기 전엔 수없이 입을 맞췄다. 혼자 남았다는 공포에 어쩔 줄 모르며 방황할 때, 레나트는 체온을 맞대는 방법으로 그를 달랬다. 흑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모네의 잘못이 컸다. 구석까지 몰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가 먼저 레나트에게 매달렸다.

입술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었던 것도 그가.

물러나려는 레나트의 옷을 막무가내로 벗겼던 것도 그가.

그리고…….

생각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시모네는 달아오른 얼굴을 의식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친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냐. 과거의 나.

지금이라면 감히 그럴 시도조차 못 할 터였다. 그때의 저는 무모했고 한없이 나약했다. 그래도 그런 온기가 있었기에 참혹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끝까진 안 갔지만 맨몸을 비비는 어린 짐승 같은 행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 때문에 레나트가 더욱 자신을 떠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사랑은 둘째 치고 가엽고, 불쌍하고, 비참해 보였을 테니까.

시모네는 자신이 선한 자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쩌면 레나트를 붙잡아 두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각하. 마호 경 들었습니다.”

“들여.”

상념이 흩어졌다. 시모네는 소파에 가서 자리 잡았다.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곱상한 남자가 들어왔다. 흑사자단의 부단장 마호였다.

“왔습니다. 나는 검사합니다. 각하는 따라야 합니다.”

“……동국어로 해라.”

어설픈 아르스란어에 시모네는 한숨을 삼켰다. 흑사자단의 부단장으로서 어떤 점에서는 만드로프보다 나은 마호의 딱 하나 단점은 아직 제국어에 능숙하지 못하단 것이었다. 만드로프도 억양에서 헤매긴 해도 의사소통에는 지장 없는데 마호는 유달리 제국어를 배우는 게 느렸다. 듣는 건 딱히 문제없지만 말하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다. 그래서 동국어를 할 줄 아는 시모네가 마호에게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호의보다는 순전히 답답해서였다.

-각하의 몸 상태를 점검하겠습니다. 최근에 이상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예전보다 쓰러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예전엔 일 년에 한 번 정도였다면 요즘은 석 달에 한 번 정도로 주기가 줄었다.”

-……하아. 제 일족에서도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국의 귀법술사(鬼法術士)는 배척받는 존재라 찾기 쉽지 않은 데다 저희 선법술사(宣法術士)는 생명술에 능통하지 않습니다.

시모네는 실망하지 않았다. 수십 번도 더 들은 얘기였다.

귀법술사(鬼法術士).

복수를 도와줬으나 궁극적으로는 시모네를 속인 존재들이다. 거대한 적 앞에서 절망했을 때 구원처럼 다가온 이들이지만, 결국은 지옥으로 이끄는 사자들이란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들의 또 다른 이명은 ‘절망을 먹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네가 이곳에 머무는 게 아닌가. 서국의 다른 곳은 어떻지?”

-동국과는 많은 것이 달라 조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각하께서 버텨 주셔야 합니다.

“그게 쉽다면 벌써 방법을 찾았겠지. 대가는 섭섭지 않게 챙겨 줄 테니 최선을 다하도록. 그래야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당당할 수 있겠지.”

“되었슴미다. 나는 좋아요. 이곳은 재미가 납니다.”

“……그래. 나가 봐.”

까닥하다가는 재미란 것이 어디서 나냐는 농담이 나올 뻔했다. 마호가 나간 후 시모네는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좀 더 시간을 들여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당시 가족을 죽인 원흉에 황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절망했던가. 선황은 현재의 황제와 달리 절대적인 황권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애초에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즉위한 피의 황제였으니 다들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황이 재위했을 적엔 황제파나 귀족파 모두 기를 펴지 못했다. 본인 자체가 뛰어난 검사이자 기사여서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에 귀족의 권위로는 그와 대립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타고난 성품 또한 냉혹하고 잔인했으며 야망까지 원대했다. 그 야망이 아르스란 영토로 만족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비극은 거기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