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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하루 2화

Chapter 1. 밀레니엄 버그 (2)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펜을 잡은 여준이 문득 다 해진 소매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3년을 내리 입었으니 군데군데 낡은 게 당연했다. 제 옷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삐져나온 실밥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 습관적으로 잡아당기곤 지레 놀라 손을 뗐다. 뜯어지진 않고 길이만 더 길어진 실밥이 지저분하게 덜렁거렸다. 그것이 자습 시간 내내 여준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신경이 쓰여 확 뜯어 버리고 싶었지만 괜한 짓이 될까 망설여졌다.

자습이 끝난 뒤 여준이 체육복을 벗으려 하자 선교가 급히 다가와 말렸다.

“추우니까 입고 가.”

“어?”

“나중에 줘도 돼. 어차피 우리 이제 체육 수업 안 하잖아.”

선교는 또 웃었다. 이번엔 눈과 입이 동시에 휘어졌다. 객관적으로 봐도 퍽 예쁜 웃음이었다. 선이 얇은 그의 이목구비는 무표정할 땐 차가워 보이지만 웃을 땐 또 제법 고왔다. 그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 결국 돌려줄 타이밍도 놓쳤다. 체육복은 하굣길 내내, 심지어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한참이나 여준의 어깨 위에 있었다.

어서 씻고 자라는 엄마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여준이 주섬주섬 걸치고 있던 체육복을 벗었다. 내내 신경 쓰이던 실밥을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 내고 선교의 이름이 위에 오도록 가지런히 갰다. 회색 체육복 위의 노란 자수가 유난히 촌스러워 보였다.

‘유선교’.

최근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불러 본 적이 있던가. 여준은 가만 기억을 되짚었다. 마지막으로 부른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함께 어울려 다니긴 했지만 두 사람은 자주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살가운 선교와 달리 여준은 좀처럼 곁을 내어 줄 줄 모르는 요령 없는 성격이었다. 그에게 선교는 유난히 어려운 상대였다.

이유는 많았다. 선교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컸고, 꽤 어른스러웠으며, 이따금 짓는 미소는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런 별것 아닌 이유로 여준은 선교가 불편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체육복을 가만 내려다보던 여준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그대로 체육복 위에 얼굴을 묻고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섬유 유연제 냄새가 짙게 났다. 사실 다른 냄새도 섞여 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의 향이리라.

“유선교.”

여준의 목소리가 옷에 파묻혔다.

“선교야.”

다시 한번, 의미 없는 부름이 처참히 뭉개졌다.



***




여준이 기억하는 선교와의 첫 만남은 2년 전 여름이었다. 보충 수업 마지막 날, 당시 다른 반이던 형우를 찾아간 여준은 그와 함께 있던 선교를 처음 만났다. 형우의 소개로 얼결에 통성명하고 난 뒤, 여준은 무리에 섞여 어영부영 노래방까지 따라갔다.

유행하는 노래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여준은 구석에 앉아 그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할 뿐이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여럿이 바글거리는 게 어찌나 답답하게 느껴지던지. 여차하면 도망칠 기세로 문을 힐끔거리는데 어느새 제 옆으로 다가온 선교가 조용히 귓속말을 해 왔다.

「지루하지.」

귓가를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여준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웠는지 선교가 참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TV 광고 속 연예인 같은 모습에 여준은 일순 넋을 놓았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데, 눈앞으로 다가온 선교의 커다란 손바닥이 좌우로 흔들렸다.

「잠깐 나갈래?」

처음 만났는데 다정히 말을 걸어오는 것이 낯설고 불편했던 여준이 대답을 망설였다. 그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선교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대로 혼자 나갈 줄 알았는데 그는 무작정 여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놀기 바쁜 친구들은 두 사람이 방을 빠져나가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복도에 즐비한 방문 틈으로 온갖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끄럽고 어둡기는 방이나 밖이나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좁은 공간을 벗어나니 숨통이 좀 트였다. 여준은 그때야 제 손목이 아직 선교의 손아귀 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아, 미안.」

힘이 꽤 좋은지, 그 잠깐 새 손목이 붉어졌다. 그 후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게 왜 데리고 나와서…….’ 불편함이 선교에 대한 원망으로 바뀔 무렵,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선교가 양손에 음료수를 쥐고 나타났다.

「봉봉? 네버스탑?」

오른쪽에 있던 포도 맛 음료를 집은 여준이 고맙다고 작게 인사했다.

아래가 푹 꺼진 낡은 소파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말없이 음료수를 홀짝였다. 이따금 의도치 않게 쏟아져 나오는 포도알에 여준은 몇 번이나 헛기침을 내뱉어야 했다.

「이런 데 싫어하지?」

「응.」

「역시. 넌 왠지 싫어할 것 같았어.」

「왜?」

「그냥. 공부 잘하는 애들은 그럴 것 같아서.」

선교의 말에 여준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나 알아? 아니, 그러니까…… 나 알고 있었어?」

오늘이 첫 만남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여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너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선서했잖아.」

「아…….」

「그리고 보통 전교 1등 하는 애 얼굴 정도는 알지.」

여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입학식 때 기억이라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신입생 대표라는 명목으로 얼결에 단상 위에 오른 여준이 그날 흘린 식은땀만 해도 손에 담길 정도는 될 것이다. 다리는 어찌나 후들거리고, 목소리는 또 얼마나 떨려 오던지. 창피한 마음에 숨고만 싶었다. 선교도 그날을 기억한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쪽팔려.」

「응?」

「……아냐.」

여준의 중얼거림은 주변의 소음에 금세 파묻혔다. 두 사람은 음료수를 비우고도 한참 동안 복도에 머물렀다. 화장실 가던 친구에게 붙잡혀 도로 방으로 끌려가야 했지만, 그래도 잠깐의 휴식 덕분인지 한결 견딜 만했다.

방으로 돌아온 선교는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마이크를 잡았다. 늘 부르는 십팔번이 있는지 책도 보지 않고 번호를 누르더니, 곧 진지한 얼굴로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토이 노래였다. 골라도 어쩜 저같이 느끼한 걸 고르냐고 야유를 보내는 친구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교는 꿋꿋이 노래를 이어 갔다. 엄청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목소리가 좋은 탓인지 퍽 듣기 좋았다. 지금까지 친구들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았는데 선교의 노래는 이상하게 귀에 박혔다. 열창하는 그의 얼굴을 여준은 훔쳐보듯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여준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노래가 실린 토이 음반을 샀다. 제 돈으로 직접 산 첫 번째 음반이었다.



***




여준이 선교의 체육복 위에 코를 박았다. 아무리 냄새를 맡아 봐도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익숙한 섬유 유연제 냄새로 뒤덮인 체육복을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던 여준이 이내 종이봉투 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빌린 옷을 그냥 돌려주기 뭐해 세탁에 건조까지 마친 참이었다. 별 뜻 없이 한 일이었지만 그의 옷에서 저와 같은 냄새가 난다는 사실이 조금은 민망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새 신발로 향하던 여준의 발이 이내 옆에 있던 낡은 운동화로 방향을 틀었다. 아껴 신고 싶은 촌스러운 마음이 들은 탓이다. 친구들의 장난으로 더럽혀진 얼룩은 집으로 돌아와 물로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그래 봤자 발자국이 조금 남은 정도라 어렵지 않게 지울 수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서는 여준의 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평소보다 5분 정도 일찍 나왔을 뿐인데 웬일로 버스 안이 제법 한산했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여준은 문득 등굣길에 앉아 가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날씨도 참 좋았다. 새로운 계절의 초입에 걸쳐진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여준은 무릎에 올려 둔 종이가방을 품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혹여 구겨질까, 힘을 줄 순 없었지만 벌어진 틈으로 얼핏 보이는 체육복을 보니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서두른 덕분에 학교 앞에서 형우를 마주치지도 않았다. 모처럼 여유로운 등굣길이었다. 교실이 있는 3층 복도로 들어서자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교였다. 큰 키 탓에 애쓰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여준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진 건 그 앞에 마주 선 여학생을 발견한 후였다.

여준의 학교는 남녀 분반으로, 층이 달라 여학생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걸 불만으로 여기는 녀석들이 더러 있었지만-대표적으로 형우가 그랬다- 여준으로선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런고로 사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란 드물었다. 물론 눈앞의 광경이 여준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은 비단 낯선 탓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대는 등을 지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물론 얼굴을 본다고 이름을 알 만큼 여학생들에게 빠삭하지도 않았다. 키 차이 탓에 고개를 잔뜩 기울인 선교의 얼굴 위로 예의 그 익숙한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선교는 언제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기에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긴 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이 하필이면 교실 바로 앞인지라 모른 척 지나치기도 힘들었다. 쭈뼛대며 겨우 걸음을 옮긴 여준이 근처에서 눈치만 살폈다. 뒤늦게 여준을 발견한 선교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여준아.”

그 다정한 부름이 여준의 발목을 붙잡아 세웠다.

“안녕.”

“응.”

“오늘 일찍 왔네.”

“어…….”

어설프게 인사를 받은 여준이 이내 도망치듯 교실로 향했다. 먼저 온 친구들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제 자릴 찾아간 여준이 문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저 여자애 걔지? 전교 회장.”

때마침 등 뒤에서 들려온 대화에 여준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여자애’라 함은 필시 선교와 함께 있던 학생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맞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걔구나.”

“둘이 친한가? 한 살 어리잖아.”

“작년까지 같이 학생회 했으니까 친하겠지. 둘이 같이 있는 거 몇 번 봤는데.”

딴청을 부리면서도 여준의 신경은 온통 뒤를 향했다.

“근데 유선교는 친한 여자애들 많잖아.”

“하긴. 근데 반까지 찾아온 건 처음이지 않냐? 고백하는 거 아니야?”

“하여튼 촌스러운 새끼들. 야, 너네는 남자 여자 붙어 있으면 다 좋아하고 고백하는 거냐?”

여준의 손이 의미 없이 교과서를 뒤적였다. ‘친한 여자애들 많잖아.’ 우선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도서부나 학생회 일 따위로 바빴던 선교였기에 여준은 모르는 그만의 세계가 존재함은 당연했다. 다정한 그의 주변에 여자애들이 많은 것 역시.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괜찮은 건 아니었다. 여준이 애꿎은 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선교는 그 후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교실로 돌아왔다. 제 자리로 가지 않고 친구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때까지 어색하게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여준이 슬그머니 몸을 돌려 앉았다.

“여준아. 이거 마실래?”

선교가 불쑥 손에 쥔 초코 우유를 여준에게 내밀었다. 누가 준 건지 뻔히 아는데, 그걸 저에게 주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여준이 머뭇거리자 선교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코 우유 안 좋아해?”

“이걸 왜…….”

“어?”

“왜 날 줘.”

무의식중에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차 싶어 뒤늦게 입을 닫았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아, 나 단 거 싫어하거든.”

습관처럼 짓는 선교의 미소가 처음으로 얄밉게 느껴졌다.

“안 먹을래.”

단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우유를 먹고 싶지 않았다. 여준의 거절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선교가 이내 다른 친구에게 우유를 건넸다. 허무하게 제 앞을 스쳐 간 그의 손에 여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얼마 안 있어 예비 종이 울렸다. 자리로 돌아가려는 선교를 이번엔 여준이 붙잡아 세웠다.

“이거. 네 체육복.”

“아, 맞다. 너 빌려줬었지, 참.”

빌려줬던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선교가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빨았어? 안 그래도 되는데.”

“빌렸으니까.”

“혹시 내 거에서 냄새났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혹시 예의상 하는 말로 알아들을까 싶어 여준이 부러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너한테 줄 거 있는데.”

“나한테? 뭘?”

“지금은 시간 없으니까 이따가 줄게.”

조회가 머지않은 탓에 선교는 궁금증만 남기고 그의 자리로 향했다. 줄 게 있다니. 의문의 해답을 얻지 못한 여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손아귀를 벗어난 체육복을 아쉬워할 틈도 없었다.



***




선교가 말한 ‘줄 것’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급식을 먹은 뒤 매점으로 향하는 틈에 선교가 슬그머니 여준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얼결에 잡힌 손목에 여준의 얼굴이 손쓸 틈 없이 상기됐다.

“오늘 밥 진짜 맛없더라. 그치?”

“응.”

교실로 향하는 동안 선교는 여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큰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쫓느라 여준은 평소보다 서둘러야 했다. 그래도 손을 놓아 달라거나 천천히 가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도시락 싸서 다닐 때가 좋았어. 난 중학교 때까지 도시락 싸서 다녔는데. 너희도 그랬어?”

“응. 고등학교 와서 급식 처음 먹어 봤어.”

정권이 바뀌며 이제는 전국의 학교 대부분이 의무적으로 급식을 시행하지만, 아이들이 중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여준은 엄마가 영양소에 맞춰 짠 식단에 따라 항상 화려한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었다.

“주말부터 추워질 거래. 이제 슬슬 춘추복 입을 때가 됐나 봐.”

“그러게.”

“넌 특히 잘 입고 다녀야겠다.”

“어?”

“너 추위 잘 타잖아.”

저에 대해 잘 아는 양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듣기 좋았다. 여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교실에 다다라 아쉽게도 선교의 손이 멀어졌다. 이번엔 붉은 자국은 남지 않았지만 델 듯 뜨거운 열기는 오래도록 피부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선교는 조금 들뜬 듯 보였다. 줄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역시 기대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지던 선교가 이내 네모난 상자를 꺼내 들었다. 포장되어 있던 탓에 내용물을 알 순 없었다.

“자, 생일 선물.”

예상치 못한 말에 여준이 작게 탄식했다. 불쑥 차오른 뜻 모를 감정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갖고 싶은 게 없냐는 물음이 빈말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마워.”

말끝을 흐린 여준이 조심스럽게 선물을 건네받았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 여준도 친구들과 생일 선물 같은 낯간지러운 물건을 주고받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선교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고, 그래서 여준의 마음도 쉽게 흔들렸다.

툭, 붙여 놓은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뜯어 가며 포장을 벗기자 퍽 선교다운 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무슨 노래 즐겨 듣는지 잘 몰라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앨범으로 샀는데. 괜찮지?”

“나도 좋아해.”

“응?”

“……토이, 나도 좋아한다고.”

여준이 앨범 위 가수 이름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닳도록 들을 음반이 또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자꾸 웃음이 났다. 티 내지 않으려고 있는 대로 입술을 짓이기다 보니 그 주변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