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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배고…프다…….]

배를 움켜쥐며 오즈가 중얼거렸다. 배 속에서는 연신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나름 귀한 대접 받으며 살아왔기에 한 번도 이렇게 굶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의 마법 시연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정말 열심히도 일했다. 식사도 대충 빵으로 때웠고 점심에도 구운 과일 몇 조각 집어 먹은 것이 다였다. 결국 기운이 없어 그는 건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온몸은 아프지, 배는 고프지, 심지어 길도 잃었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역경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이 그가 모르는 언어투성이었다. 오래간만에 미지의 언어를 보니 가슴이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앞길이 막막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재료를 모아야 한다. 그런데 보통 이런 도시에서 재료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오즈는 우울하게 옷을 뒤적였다. 곧 반질거리는 은색의 브로치가 나왔다.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으로 대륙 어딜 가도 이것만 있으면 왕실과 마탑의 이름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통하지 않으리라. 오즈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잔뜩 지친 그는 더는 걷지 못하고 그대로 철퍼덕 엉덩이를 붙였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막막한 현실을 헤쳐 나갈 방안을 궁리하는 와중에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건너편의 투명한 유리창 안, 사각형의 얇은 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판 안에서 사람들이 웃으며 말하고 떠들고 있었다. 작동 원리는 알 수 없었으나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은 오즈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얇은 판 위로 이 도시에 와 처음 본 그 남자가 보였다. 이곳과는 다른 어느 장소였다. 그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미소 지으며 상대방 여성에게 무어라 대답하고 있었다. 생동감 있는 움직임과 가늘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오즈의 눈을 사로잡았다.

보기 좋게 음영이 진 이목구비며 완벽한 선으로 이루어진 눈매는 수려했고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의 선이 몸매를 따라 딱 떨어졌다. 탄탄한 어깨며 단단한 허벅지, 뼈가 울룩 튀어나온 손목. 외모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모양새에도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대체 누굴까? 이름은 무엇일까? 저렇게 아름다운…….]

반쯤 홀린 오즈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빛나는 화면 속의 남자는 오즈뿐만이 아니라 이따금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도 홀렸다.

오즈는 한참을 유리창 너머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가물가물 눈이 잠겨 그 자리에 쭈그리고 잠들었다. 다행히도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그럭저럭 잠을 청할 만했다. 몹시도 피곤했던지라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잠은 순식간에 쏟아졌다.



다음 날, 따가운 햇볕에 잠에서 깬 오즈는 길게 하품을 하다가 얼어붙었다. 어쩐지 허전해 몸을 더듬어 보니 고급 천으로 만든 긴 망토는 잘려 나간 흔적만 남은 채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잘라 가져가 버린 것이다. 망토뿐만 아니라 소매나 옷깃에 달려 있던 화려한 단추나 장신구들도 떼어 가 버렸다. 왕이 하사한 은 브로치도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대체 언제?]

기가 막혔다. 자신이 그만큼 깊이 잠들었던 건지, 아니면 그만큼 도둑의 솜씨가 절묘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가진 귀한 물건들을 몽땅 잃어버린 오즈는 허탈해졌다.

어제 제자가 잘 빗어 주었던 머리는 눌리고 삐쳤고, 이제는 배도 고플 뿐만 아니라 목도 말랐다. 딱딱한 의자 위에서 자 온몸이 이곳저곳 쑤시고 아팠다. 다시 힘을 내 걷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았다.

곧 그의 시선은 다시 사람들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음식물 따위에 박혀 있었다. 몹시 배가 고프고 목도 말랐다……. 입 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꼴깍 삼킬 침도 없었다.

‘이를 어쩐담.’

모든 언어를 알았던 위대한 마법사로서 그는 노력했다. 어떻게든 귀동냥으로나마 겨우 인사말 정도라도 터득해서 무턱대고 아무 상점에나 들어가 보았으나 수월하지 않았다.

거친 손짓과 함께 내쫓기고 종종은 문턱을 넘어 보기도 전에 밀려 나기도 했다. 그는 하루 종일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자 쫄쫄 굶고 목마른 채 서러운 잠을 청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떡이 졌고, 옷이며 신발도 꼬질꼬질해졌다. 발에는 물집이 잡혀 쓰라렸고 냄새도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정신 나간 노숙자의 몰골이었다.

[내가 이런 신세가 되다니…….]

여전히 아무것도 못 한 오즈가 한탄했다. 하도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넘어져 까진 무릎이 욱신거렸다. 결국 움직일 기운도 없어 오즈는 다시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하염없이 지나가는 사람들, 아니면 그 아름다운 사내가 빛나는 벽에서 미소 짓고 말하는 모습들을 구경했다.

배도 고프고 울적하기도 하여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걸어가다가 들고 있던 컵을 화단 모서리에 내려 두고 갔다. 오즈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위대하며 찬란한 세 번째 기둥의 주인이자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법사였다. 다른 사람이 마시다 만 걸 먹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걸음을 옮긴 위대한 마법사는 아닌 척 슬그머니 버리고 간 컵을 주워 들었다. 며칠을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눈에는 뵈는 것이 없었다.

음료가 찰랑이는 컵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오즈가 구석진 곳으로 기어들어 갔다. 기묘한 재질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투명하고 단단하며 얇은 컵 안에는 얼음과 함께 뭔지 모를 갈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향이 몹시도 좋았다.

그는 허겁지겁 음료를 마셨다. 좀 썼지만 메말랐던 목을 축이자 조금이나마 살 것 같았다. 오즈는 아쉬워하며 빈 컵을 내려 두었다. 목이 말랐던 건 이제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대신 배가 심하게 고팠다. 오즈가 서럽게 중얼거렸다.

[배고프다…….]

그는 그 이름 모를 아름다운 사내가 이따금 유리창 너머 얇은 판 위에 나타나는 것이나 지켜보며 배고픔을 달랬다. 그렇게 굶주림에 시달리던 오즈가 햇볕을 쬐며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댕그랑 요란한 소리가 들려 그가 놀라 눈을 떴다.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누군가 쯧쯧 혀를 차며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동전을 컵에 던져 넣는 중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오즈는 황망하게 컵 안에 있는 동전들을 집어 올렸다. 은빛 구리빛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총 다섯 개의 동전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동냥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동냥을 받은 위대한 마도사가 화를 냈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적선을 할 수가……!]

그러고는 소중하게 동전들을 잘 챙겨 두었다.

다시 조는 척하면서 기다리자 해가 질 무렵 두 명이 동전을 몇 개 더 던져 주었다. 오즈는 모은 동전들을 박박 긁어모았다. 해가 저문 뒤에는 동전을 들고 길 건너편 상점으로 가 가장 크고 싸 보이는 빵 하나를 사 왔다.

원래 자리로 돌아온 오즈는 허둥지둥 투명한 껍질을 벗겨 냈다. 얼른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맛있다 못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빵 하나를 해치웠다. 배가 차니 좀 살 것 같았다.

빵을 다 먹고 난 뒤 오즈는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바로 아래에서 구무럭거리는 ‘문’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며칠 사이 미세하게 작아졌다는 느낌이 있었다. 아마 느낌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은 닫힐 것이고, 저 ‘문’이 닫히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은 요원하리라.

상황이 암담했다. 재료를 구하기는커녕 음식과 물도 겨우 구걸해 먹는 형편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그는 점점 더 크게 다칠 것이다. 세계를 넘어온 이들에 대한 기록에서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크게 다치거나 혹은 죽기까지 했다. 한 번 죽음의 고비를 겪게 되면 그때서야 받아 주는 것이다. 혹은 그 정도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거나.

첫날 그는 돌에 엄지손가락을 찧어 한 방울의 피를 봤고, 며칠이 지나자 넘어져 무릎을 다쳐 몇 방울의 피를 봤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그가 터득한 이치가 앞으로 점점 더 심한 부상을 입게 되리라고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문의 크기가 작아지는 만큼 오즈의 몸 또한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즈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빵은 몹시도 맛있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갔다.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도 오즈의 상황에 큰 진척은 없었다. 그는 더 꼬질꼬질해졌고, 머리는 더 헝클어지고 기름진 채 북슬북슬해졌다. 전보다 더 냄새가 났으며 이제는 매일같이 자신의 컵에 떨어지는 동전만 쳐다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위대한 마법사고 뭐고 간에 사람의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 * *



이 세계에 온 지 며칠이 더 지나자 그는 완벽한 노숙자가 되었다. 하루 종일 햇볕을 쬐며 사람들이 던져 주는 동전만 세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꽤 수입이 좋았다. 이 정도면 고기가 들어간 빵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오즈가 설레어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는 사내들이 있었다. 요 며칠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오즈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보던 노숙자들이었다. 두어 명에게서는 술 냄새도 났다.

어리둥절해서 오즈가 쳐다보자 그중 한 명이 오즈의 돈통을 걷어찼다. 쨍그랑거리며 동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걷어차인 건 돈통뿐만이 아니었다.

[악!]

대체 오즈가 뭘 했는지는 몰라도, 심기가 불편했는지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즈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렇게 얻어맞아 본 적은 처음이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충격이 컸다.

당장 떠오르는 건 공격 마법이었다. 저 노숙자들을 당장이라도 자빠트릴 수 있는 중력 마법, 잠시간 심한 고통을 가하는 저주 마법, 기절시키는 마법 등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일단은 참았다…….

‘안 돼, 세 번째 기둥의 마탑주가 이깟 일로 민간인에게 마법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 놈이 퉤 침을 뱉었다.

오즈가 한번 불붙으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저주의 불길을 내리려고 마음을 먹은 찰나였다. 실컷 분풀이를 했는지 갑자기 몰려왔을 때처럼 노숙자들은 갑자기 우르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막 마법을 쓰려던 오즈만 얼빠진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니……. 내 동전…….]

멍한 채 오즈가 주섬주섬 동전을 주워 담았다. 그러나 오늘 반나절 따가운 햇볕 아래 열심히 모은 동전은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갔는지 아니면 노숙자들이 주워 갔는지 반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한 번도 서러운 적 없이 귀하게 잘 살았던 오즈는 기가 막히고 몹시도 서러워 천천히 동전을 주워 담았다.

노숙자들에게 잔뜩 얻어맞다가 비틀비틀 일어나 손을 떨며 주섬주섬 동전을 담는 꼬질꼬질한 청년의 모습에는 퍽 처량하고 가엾은 구석이 있었다.

동전을 다 주운 뒤 오즈는 할 수 없이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깨어 있을 때면 모를까 자신이 자고 있을 때 그 노숙자 패거리가 찾아오면 답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정말로 슬슬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야만 했다.

아까 어딜 잘못 맞았는지 발목이 아파 오즈가 절뚝거렸다. 발을 질질 끌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딱 봐도 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경찰 엔리케가 고개를 갸웃하며 오즈를 위아래로 살폈다.

“이 사람이야?”

“맞는 것 같은데.”

아까 어느 시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찾아온 거라는 걸 모르는 오즈가 주춤 경계했다. 먹을거리와 돈은 저도 모르게 소중히 품에 안았다.

엔리케는 파트너와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폭행 피해자라기에 왔는데 노숙자 청년이었으니 여러모로 곤란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신고를 받긴 했으니 둘은 오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문제는 오즈가 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영 통하지 않으니 엔리케가 일단 보호 차원에서 오즈를 경찰서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둘은 덥석 오즈의 팔을 잡아 경찰차 안에 밀어 넣었다.

오즈의 입장에서 둘의 행동은 대뜸 치안 경비대쯤 되는 존재가 자신을 잡아가려 하는 것이었다. 경찰차 안에는 사방에 쇠창살까지 덧대어져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죄인 호송 마차였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게 무슨 일이지? 여기서는 얻어맞는 것도 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