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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턱에 걸려 있던 마스크를 콧잔등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마지막으로 선글라스까지 쓰면 외출 준비 끝.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윤희는 현관문을 살짝 열고 빠끔히 고개를 내민 채 주변을 살폈다.

없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니, 절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옆집을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초조하게 승강기를 기다리면서 혹시나 마주치진 않을까 싶은 마음에 윤희는 결국 계단을 이용했다.

13층을 계단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여유를 부릴 틈 없이 빠르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

도착한 카페에 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간 윤희는 가장 먼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선 누군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윤희의 걸음이 다시 재빨리 옮겨졌다.

“최보!”

“정윤희?”

“친구야!”

윤희가 자신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보영에게로 울먹이며 달려갔다.

“너 꼴이 그게 뭐야? 이 여름에 마스크랑 옷차림은 또 뭐고?”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사정이.”

뛰어오느라 목이 탄 윤희는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마셨다. 이제야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 꼴 뭐냐고. 아, 창피해. 나 그냥 갈래. 전화로 얘기하자.”

“어허!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나왔는데. 그냥 그렇게 가시면 저 굉장히 섭섭해집니다, 대리님!”

판촉 디자인 작업 의뢰를 위해서 왔던 보영이 서둘러 서류를 가지고 일어나려고 하자, 윤희가 급하게 끌어 앉혔다.

“그럼 빨리 설명해. 내가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이라면 외주 맡길게.”

“그게 디자인이랑 무슨 상관이지?”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요. 그 정신으로 어디 괜찮은 판촉물이 나올까요? 이번에 의뢰하시는 피아니스트 고영수 씨가 굉장히 예민한 분이세요, 정윤희 씨!”

참다못해 단어마다 힘을 주어 언성을 높이는 보영에 결국 윤희는 크게 결심을 하듯 무거운 입술을 떼어 냈다.

때는 한 달 전, 인생에 길이길이 개자식으로 남게 될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던 날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윤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고백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랑 같이 잤는데, 하필이면 일주일 전에 너희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야, 목소리 낮춰!”

행여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윤희는 상체를 최대한 수그리고 보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웬일이니. 그럼 네가 원나잇을 했다는 거야?”

여전히 조심성이 가미 되지 않은 말투였지만, 윤희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터라 조금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으응…….”

설핏,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윤희는 취해 있었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엄청난 외모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자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얼굴이었고,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오가는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다.

어쩌면 술이 아니라 분위기에 취한 것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이고, 앞으로 볼 일 없을 남자였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전 해 본 적도 없는, 심지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미친 충동이었다. 27년 평생 그런 일탈을 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꼬락서니로 나온 거야? 행여나 그 남자랑 마주칠까 봐?”

“못 알아보겠지?”

“못 알아보긴 하겠지만, 시선은 좀 받겠는데.”

“헉? 정말?”

“웬 여자가 해괴망측한 꼴로 돌아다니는데, 그 남자 입장에선 얼마나 무섭겠니?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경찰에 신고 당하기 전에 당장 멈춰.”

“다행히 아직 마주친 적은 없어.”

“옆집 산다며.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내가 그 남자의 패턴을 분석해 본 결과,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저녁 7시에 퇴근해서 오더라고. 그 이후에는 집에서 잘 안 나와.”

“근데 오늘은 왜 그러고 나온 거야?”

“바보야. 주말이잖아, 주말. 혹시 모르니까.”

윤희의 말에 보영은 여전히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혼잣말로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난 주말까지도 일한다고 이러고 있네.”

“친구 만나서 수다 떤다고 생각해, 그냥.”

보영은 딱히 위로가 안 된다는 말을 덧붙이고서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다 치더라도 평생 그러고 살 거야?”

“나 지금 사는 오피스텔 재계약 기간 3개월 남았거든? 그때까지만…….”

“그 남자 때문에 이사까지 가려고? 그럴 필요 있니?”

이사가 어디 애 소꿉놀이도 아니고, 더군다나 근방에서 이 보증금과 월세에 지금 수준의 집을 구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을 따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낸 남자와 마주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냥 딱 한 번 마주쳐 봐, 혹시 알아? 그 남자도 취해서 너 못 알아볼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럴 리가…… 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 이마를 탁, 하고 치는 윤희를 보영이 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맞아! 그날 그 남자도 술을 마셨을 거 아냐? 그래서 취했을지도 모르지. 그럼 나 몰라볼 수도 있는데!”

“행운을 빈다, 친구야.”

“아, 머리 아프다. 머리 아프니까 달달한 카페 모카 한 잔 더 시켜야겠어.”

추가 주문을 하고 돌아온 윤희를 향해 보영은 그제야 접어 두었던 서류들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너 얼굴 안색도 좀 안 좋아 보여. 뭐랄까, 좀 누렇게 뜬 것 같은데.”

“그래? 화장실을 며칠 못 가서 그런가?”

“변비니?”

“알면서 뭘 물어.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상이 더 심해져.”

“약이라도 좀 먹어. 남자가 지금 네 얼굴 보면 그날 밤에 저지른 일에 대해 이불을 차며 후회할 정도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영의 직설적인 표현에 윤희가 눈을 새치름하게 치켜떴다.

“일 얘기는 안 하실 건가요, 대리님?”

“아차, 나 너랑 일 얘기하러 온 거지?”

“네,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삐졌어? 그 몇 마디 했다고?”

“어서 일 얘기나 하시죠.”

윤희의 재촉에 보영은 못 말린다는 얼굴을 하고서 서류를 꺼냈다.

“이번 판촉물 콘셉트 말이야. 의뢰인이 뭔가 모던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영과 디자인에 대한 시안을 상의했다. 커피를 각자 두 잔씩 비웠을 때쯤에야 상의는 끝이 났다.

“작업 끝나는 대로 바로 메일로 보내 줘.”

“응.”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다니지 말고. 오히려 나 좀 봐 주세요, 하는 것 같으니까.”

보영은 카페 앞에 주차해 놓은 차에 올라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윤희의 속을 뒤집었다.

“운전이나 조심해.”

보영이 탄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윤희는 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마스크를 내릴까 말까 수없이 고민하다가 도박하는 심정으로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모자를 과감하게 벗어 버렸다. 마침 도착한 승강기 안으로 몸을 실어 넣은 윤희가 초조하게 모자를 매만졌다.

“그래, 인생 뭐 있어? 날 몰라볼…….”

그때였다.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안하던 윤희는 하마터면 악! 하고 고함을 질러 버릴 뻔했다. 막 닫히려던 승강기 안으로 그 남자, 류승언이 탄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얼굴 위로 승언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알아본 건가?

“저기요.”

승언의 부름에 윤희가 두 눈을 번쩍 뜨고 크게 팔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네?”

당황해하며 되묻는 승언에 윤희가 다시 한번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잘못 보셨어요!”

“아니, 버튼 안 누르세요?”

“네?”

“층수요. 몇 층 가세요?”

승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정말 못 알아보는 건가?

“13층이요.”

윤희의 말에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13층을 꾹 눌렀다. 밀폐된 공간에서 무거운 정적이 유영했다. 서늘한 기운으로 인해 척추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승언을 기억한다. 술기운이 감돌아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이었지만, 확실히 몸을 나누던 그 순간만큼은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았다. 훈훈한 얼굴만큼이나 운동으로 다져진 듯한 몸이 꽤 보기 좋았다.

적당히 그을렸던 피부색과 틈틈이 박혀 있던 근육, 그리고 격렬했던 몸짓까지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땡!

승강기가 13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윤희는 자꾸만 후끈해지려는 제 몸에 손부채질을 하며 재빠르게 집 앞까지 달려왔다. 손이 너무 떨려서 비밀번호도 잘 누르지 못하고 있는 윤희의 귓전으로 그의 현관문이 열렸다.

빨리 들어가라, 빨리 들어가라, 너라도 빨리 들어…….

“저기요.”

윤희의 손이 비밀번호를 다 누르지 못하고 공중에 멈췄다.

“네?”

그의 시선은 승강기에서 본 것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비웃음이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희열에 쌓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몰려오는 불길함에 미동 없이 남자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윤희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두 눈이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굳이 아는 척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괜히 피곤하게 그러고 다니지 마세요. 더 신경 쓰이거든요.”

여유로운 얼굴과는 상반된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그가 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윤희를 덩그러니 남겨 둔 채로.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남자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다. 윤희는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더욱 조심했다. 그 역시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것이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존재가 하룻밤의 쾌락으로 끝난 것만 같아서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보영이 의뢰한 일을 끝낸 윤희는 자축 파티를 위해 동네 대형 마트로 향했다. 생각보다 수입이 짭짤해 큰맘 먹고 소고기로 몸보신을 할 작정이었다. 마블링이 풍부해 보이는 한우와 야채,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맥주를 사서 설렘을 가득 안고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바지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엄마.”

─너는 어쩜 전화 한 통을 안 하니? 엄마가 먼저 안 하면 절대 안 하지?

엄마의 핀잔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핑계로 연락을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런 딸을 이해해 주던 엄마는 갑자기 1년 전부터 조금만 연락이 안 돼도 이렇게 다급하게 연락을 해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그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부모님의 큰 사랑이라고 여기며 윤희는 늘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