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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놀랍게도 결혼을 기점으로 하워드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아침에는 이 여자, 점심에는 저 여자, 저녁에는 그 여자 하면서 지저분하게 놀던 것과는 딴판으로 조세핀을 하늘 떠받들듯 모셨다. 매일같이 벌이던 술판은 단호하게 접었고,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를 따라 꼬박꼬박 교회에도 나갔다. 일찍이 그가 교회에 나가는 날이란 그저 고지식한 주교를 희롱하기 위함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도 이런 발전이 없었다.

그리 사람이 뒤바뀌자, 자연스레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국왕은 그제야 안심하며 왕위를 물려주었고, 즉위식에서 하워드는 유일하게 잘난 외모를 뽐내며 여느 배우 못지않게 멋들어진 사진을 여럿 남겼다. 게다가 이듬해엔 조세핀 왕비가 임신까지 하였으니, 그야말로 왕실의 겹경사였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라고. 마냥 즐거운 웃음소리만 흐드러지던 왕실에 갑작스러운 비극이 몰아닥쳤다.



‘왕비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난산이었다.

하룻밤이 넘도록 아기는 머리 끄트머리조차 보이질 않는데,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왕비는 점차 기력을 잃어 갔다. 국왕은 왕비와 자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당연히 왕비를 우선해야―’

‘저는 괜찮아요. 아이를 우선하도록 하세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조세핀 왕비는 간청했다. 아이는 그녀의 꿈이고 미래였다. 아홉 달 배 속에 품어 길러 낸 아이를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끝내 왕비의 뜻을 꺾지 못한 하워드는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택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무탈하게 태어났으나, 조세핀 왕비는 아이를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

국왕은 비탄에 잠겼다. 잉그람 국민들도 현명하고 자비롭던 왕비의 죽음을 기렸다. 평생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나라의 수치로 역사 속에 이름을 새길 줄 알았던 하워드를 탈바꿈한 장본인이자, 아랫사람을 손수 보듬고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왕비였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왕비를 많은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조세핀 왕비를 향하던 국민들의 애정은 이제 오롯이 어린 왕자에게로 옮겨졌다. 조부의 이름을 따 알렉이라 이름 지어진 왕자는, 부디 좋은 왕이 되시라는 왕비의 유언대로 밝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칼이나 매끄럽게 잘빠진 턱선, 혹은 날렵한 콧날은 딱 젊은 시절 하워드의 판박이였으나, 여린 새싹처럼 맑은 연둣빛 눈은 죽은 조세핀 왕비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를 알면 둘을 깨치는 영특한 머리나,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단 있는 성품은 두말할 것 없이 왕비의 유산이었다.

곧 새로운 왕비를 들이리라는 세간의 예측과 달리, 하워드 국왕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왕비란 조세핀 하나라며 단언하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중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국왕은 고관대작이라면 공공연히 두는 정부조차 일절 두지 않았으므로, 화려하고 음습했던 지난날과는 완전히 결별한 듯 보였다.

잉그람 국민들은 국왕의 변화를 반겼다. 왕실의 어른들도 조세핀의 사후 내심 염려스럽던 하워드가 저토록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자 한결 안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국왕이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은 즉, 그의 자식도 조세핀이 낳은 왕자 하나뿐이란 소리였다. 만일 왕자가 잘못된다면, 하워드 국왕의 대는 거기서 끊기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만인은 어린 알렉 왕자를 주목했다. 국왕의 유일한 자식이자,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 거기에 조세핀 왕비의 후광까지 더해지자, 어린 왕자는 이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잉그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는 하워드 국왕조차 아들의 인기에 편승하여 지지율을 유지하는 양상이었다.



‘부디 왕비님의 바람대로 훌륭한 국왕이 되어 주세요.’



국민들이 소원하던 것처럼 알렉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어른으로 장성하는 듯했다. 자신의 모든 행동거지에 만인의 시선이 쏠림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고,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데도 쉽사리 흠을 잡아내지 못할 만큼 허투루 행동하는 법이 없었다. 왕자는 아버지를 닮아 수려하고, 어머니를 닮아 우아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백마 탄 왕자의 표본이었으므로, 왕자를 향한 국민들의 성원이 나날이 높아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왕자가 어느 순간에선가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면,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미성년의 왕자가 몰래 담배를 태우는 사진이 찍혔을 때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법에 어긋나는 짓도 아닐뿐더러, 열 살 남짓할 때부터 어른들에게 알음알음 술 담배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았으므로. 왕자라고 꼭 언제나 번듯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무수하게 뒤따랐다.

성년이 되기 무섭게 어느 아가씨와 스캔들이 났을 때도, 사람들은 도리어 왕자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느냐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잉그람 국민들에게 알렉 왕자는 가슴으로 키운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미를 모르고 자라난 왕자에게 이유 없는 부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왕자가 학업은 뒷전이고 들로 강으로 쏘다닌다는 기사가 쏟아지자, 하나둘 근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 왕자는 왕족들이 대를 이어 다니던 노벨리엄 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한 참이었다. 노벨리엄 왕립 대학이라 함은 잉그람에서도 세 손가락에 뽑히는 명문 대학. 학업에 열중해도 모자랄 판에 매일같이 수업을 빠지고 놀러만 다닌다니, 하워드 국왕의 화려했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는 국민들로선 당연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왕자에게 굳건한 신뢰를 보냈다.



「알렉 왕자가 지금까지 보여 온 성실함을 생각하라, 그의 일탈은 오후의 짧은 낮잠 같은 여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오르내린 것이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고귀한 왕자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 돌아가신 왕비 전하, 부디 아드님께 축복을!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한 달 뒤, 국민들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잉그람의 저녁 식탁 위에선 절대로 꺼내면 아니 될 불문율로 여겨지는 화제이며, 아크라이트 왕실 수백 년 역사에 영원토록 새겨질 치욕.

어느 일간지의 기자가 명명하기로 <봄비에리의 참극>은 정확히 5년 전 가을에 발발하였다.



때는 왕도 오킹엄의 거리가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십일월.

곡식이 무르익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그때, 잉그람을 비롯한 중앙삼국은 매해 그러하듯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산티그마 교단을 국교로 삼은 세 나라가 함께 기념하는 축제란 바로 십일월의 아흐레 날 열리는 성 봄비에리 축일이다.

600여 년 전, 잔악한 이교도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 교회에 보관된 성물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봄비에리 수도사는 일찍이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로, 작금에 이르러선 용기와 신념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지는 위인이다. 마침 추수와도 일맥상통하는 시기겠다, 성 봄비에리 축일은 오래전의 성인을 추모하는 날임과 동시에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다 함께 즐기는 축제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날, 알렉 왕자는 근자에 잘 어울리던 질 낮은 귀족가 자제 몇몇과 함께 만취하여 오킹엄의 뒷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날이 어두워진 다음이라, 그들 말고도 얼굴 벌게진 술주정뱅이들이 거리에 한가득한 것이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취객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고, 이에 왕자는 들키지 않고 무사히 처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불운은 꼭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처럼, 왕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하이에나처럼 왕자를 뒤쫓던 삼류 기자들이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당연하게도 왕자는 오래가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붙잡혔다. 평소 왕자를 충견처럼 따르며 기자들을 내쫓던 스튜어트 보좌관이 축일을 맞이하여 잠시 고향으로 내려간 것이 화근이었다.

다 함께 먹고 마시는 축제에서 고주망태가 된 것이 뭐 그리 유난스러운 일이겠느냐만, 사사건건 기사로 오르내리는 왕자의 경우에는 유난스러운 일이 맞았다. 더욱이 요새 벌이는 기행으로 왕자의 행동거지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왕자를 다루는 특종 하나가 삼류 신문을 날개 돋친 듯 팔리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독사들이 들끓는 왕궁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은근히 순수한 구석이 있는 왕자는 기자들에게 순순히 먹잇감을 내어 주고 말았다.



‘전하. 캐서린 공주 전하께서 왕위를 탐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응? 캐서린? 우리 고모?’

‘예, 캐서린 공주 전하요. 왕위를 노리신다고요.’




몇 번이고 선문답을 주고받고서야 왕자는 겨우 기자의 질문을 이해했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왕자는 만취하여 붉어진 얼굴로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에이, 왕위로 되겠어요? 우리 고모가 얼마나 욕심쟁인데.’

‘그 말씀은 공주 전하께 왕위를 양보하시겠다는 뜻인지……?’

‘왕위든, 재물이든, 권력이든. 원하시는 건 뭐든 다 가지시라 그래요.’




이건 특종이다.

기자들은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왕자를 더욱 옥죄어 들었다.



‘최근 왕자 전하를 둘러싼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 왕실의 어른이신 버트윈 공은 왕자 전하의 잇따른 기행에 우려를 표하고 계시며―’

‘누구요?’

‘버트윈 공이요. 전하의 당숙 되시는…….’




기자의 설명에도 왕자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기야 왕자의 당숙, 즉 하워드 국왕의 사촌은 그 숫자만 무려 열일곱에 달했다. 만취했다면 헷갈릴 만도 하다.



‘있잖아. 그 머리 벗겨진 노인네. 나만 보면 맨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꼰대.’

‘너한테도 그러냐? 나한테도 그러던데.’

‘좆같네.’




술에 취하여 뒤에 너부러져 있던 왕자의 친구들이 킬킬대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기자들 틈으로 조심스레 사진기를 들이민 어느 사진 기자가 남몰래 그들의 사진을 찍었다. 차례로 백작가의 삼남, 자작가의 차남, 또 다른 백작가의 사남, 남작가의 장남이다. 왕자만은 못해도 충분히 파급력 넘치는 인사들이었다.



‘좆같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친구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왕자가 문득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기도 안 차는 질문에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왕자의 의문이 가시질 않자, 난데없이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어느 기자가 친절히 ‘좆같다’의 뜻을 알려 주었다.



‘끔찍하다는 뜻입니다.’

‘아, 그래요?’




그걸 또 순순히 주워 삼킨 왕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술내 가득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전하?’



당혹스러운 광경을 보다 못한 어느 기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껏 허리를 꺾어 가면서 웃던 왕자는 눈물 맺힌 눈가를 슥 닦으며 가까스로 웃음을 갈무리했다. 그렇잖아도 만취하여 발그스름하던 뺨이 이제는 홍당무처럼 아주 붉어졌다.



‘아, 그게, 미안해요. 말이 너무 웃겨서.’

‘좆같다는 말이요?’

‘네, 그거.’




왕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려는 무슨, 좆같잖아요.’



쩡하게 얼어붙은 기자단에서 간신히 한 줄기 질문이 새어 나왔다.



‘그 말씀은 혹 버트윈 공에게 하시는 것인지……?’

‘음, 그렇게 되나? 아니지, 꼭 당숙한테만 그럴 수는 없지.’




혼자서 중얼중얼하던 왕자가 금세 흐드러지도록 웃었다.



‘그냥 왕실이 좆같네.’

‘……네?’

‘좆같은 왕실,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싸늘한 침묵 사이로 찰칵, 환한 미소 머금은 왕자를 찍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