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너는 지금 어디 있니





“……사탕 줄까?”

시우의 말에 그제야 찬혁의 굳은 얼굴이 펴졌다. 그녀는 가방에서 사탕 주머니를 꺼냈다. 낡아서 해진 비단 주머니는 외할머니가 시우에게 건네준 유품이었다. 시우는 십여 년 가까이 거두어 키워 준 외할머니가, 엄마인 순영보다 더 진짜 엄마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바지 안쪽에 늘 차고 다니던 주머니는 없는 게 없는 보물 주머니였다. 거기에는 두둑한 동전과 사탕, 말캉한 캐러멜 등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외롭게 자라는 어린 손녀가 불쌍했는지, 시우가 학교를 마치고 오면 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곤 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할머니가 주는 사탕이나 캐러멜을 먹으면 금방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시우가 꺼낸 낡은 비단 주머니가 이상한지, 찬혁이 연신 주머니를 힐금거렸다.

“주머니가 좀 특이하게 생겼어. 늘 그런 주머니에 군것질거리를 넣고 다니는 거야?”

찬혁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먹어.”

그가 사탕 비닐을 벗겨서 한입에 넣었다. 시우처럼 아껴서 녹여 먹는 대신에 어금니로 탁 깨물어서 아작아작 씹었다.

“고소하네. 이건 무슨 사탕이야?”

“누룽지 사탕.”

“주머니에 더 있어?”

시우가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군것질은 좋아하지 않지만, 주머니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싫어서 할머니처럼 사탕이나 캐러멜을 사서 자주 채워 놓곤 했다. 찬혁에게 사탕 2개를 더 건네주니, 하나는 입에 넣고 나머지 하나는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여동생이 있는데, 맛있어서 가져다주려고.”

마음 씀씀이만큼이나, 동생의 얘길 하는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혼자 외롭게 자란 시우는 부모만큼이나 동생 혹은 언니, 오빠라는 단어 자체가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동생이 몇 살이야?”

“내년이면 여덟 살인데, 정말 예뻐. 우리 찬주가 아기 때, 작은 손가락 사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면 탁구공처럼 잔뜩 오므리곤 했어.”

그가 한 손에 검지를 넣고 오므리는 시늉을 했다. 아기의 손 모양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런 찬주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어. 한글도 모두 익히고 영어도 꽤 잘해.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춤도 추는데, 볼 때마다 귀여워서 미치겠어.”

불현듯 그의 동생 찬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못다 한 말이 있는지, 시우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시우, 너와 눈매가 많이 닮았어. 엷은 쌍꺼풀에 동공이 큰 새까만 눈동자가.”

눈동자에 관한 이야기보다 자연스럽게 나온 시우라는 호칭이 귓가를 간질였다.

“생긴 모양이 비슷해도 천진한 네 동생의 눈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거야.”

가로놓인 삶이 버거워서 아침마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이시우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그의 여동생의 눈동자가 감히 비교할 거리가 되겠는가. 같은 검은색이라도 하나는 흑요석처럼 빛날 테고, 또 하나는 잔뜩 흐려서 퇴색되어 가는 탁한 흑색일 것이다.

차창으로 시선을 돌린 시우의 옆모습을 찬혁이 주의 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너를 처음 봤을 때는 찬주가 떠올랐는데, 요즘은 찬주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자꾸 네가 생각나.”

“…….”

“이시우. 이런 내가 이상하지 않니?”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시우가 차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별로.”

그 후, 찬혁은 시우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그녀를 따라 내리지도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 몇 걸음 떼었을 때, 차창을 사이에 두고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원스럽게 생긴 눈매가 기다랗게 휘어졌다. 순간, 그가 다시 묻는 거 같았다.

‘……이시우. 이런 내가 이상하지 않니?’

시우가 소리 없는 대답을 전했다.

‘아주 많이 이상해. 그러니까 더는 가까이 오지 마.’라고.



* * *



‘가까이 오지 마’라는 경고가 그에게 전해진 것일까. 그 후, 찬혁은 스치듯이 마주쳐도 가벼운 눈인사만 전할 뿐,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중심에 선 그가 말을 붙이면 자신 역시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주목받는다. 주목받으면 말이 오가고, 말이 오가다 보면 구설에 휘말린다. 누군가의 입에 오르는 건 질색이다. 그들은 씹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원할 뿐, 정작 진실을 원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2학기가 지나고 지루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사실 방학이라고 해 봐야 정규 수업이 없을 뿐, 일과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특히 성적이 좋은 특별반 아이들은 교실이 아닌, 학교에서 마련해 준 학습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투정 섞인 말로 불만을 늘어놓지만, 시우는 집보다 학교가 더 좋았다.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곰팡내가 나는 방과 술에 취해 비틀대는 엄마와 수시로 바뀌는 엄마의 남자가 드나드는 집보다는 냉난방이 잘 되어 있는 시설 좋은 학습실에서 틀어박혀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겨울 방학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특별반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화제의 중심은 방학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전교 1등, 박찬혁에 관한 이야기였다.

“뭐, 정말?”

“그렇다니까. 뉴스에도 짧게 나왔나 봐. 회사가 부도난 것도 모자라 아빠가 비관 자살까지 하셨으니 학교 나올 정신이 없겠지.”

“세상에. 어쩌면 좋아.”

“선생님과 남학생 몇 명이 장례식장까지 갔었는데, 찬혁이 엄마도 몇 번이나 기절하시고 찬혁이 모습도 말이 아니었대.”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의 대화에 시우의 손에 들린 펜이 뚝 떨어졌다.

“소문으로는 빚이 많아서 집을 팔고 이사 갔다던데, 찬혁이가 너무 불쌍해.”

온종일 찬혁에 관한 이야기로 학습실이 술렁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처럼, 까닭도 없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우 역시 덩달아 마음이 어수선하여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다못한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학습실을 나왔다. 여학생 학습실과 나란히 붙은 남학생 학습실 창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 여럿이 눈에 들어왔다.

시우는 오랜 습관처럼 출입구에서 세 번째 자리를 바라보았다. 칸막이 친 텅 빈 책상은 찬혁의 자리였다.

입학하고 줄곧 복도를 지날 때마다, 기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찬혁의 책상을 바라보곤 했다. 평소 얼굴에 웃음기 떠나지 않던 그는 책상에만 앉으면 다른 사람처럼 보였었다. 공을 낚아채면 서슴없이 골대로 달려가듯, 공부 역시 일단 시작하면 한눈팔지 않고 깊이 몰두하는 스타일로 보였다. 반듯한 이마에서 쭉 뻗어 나간 매끈한 콧날, 내리깔린 눈꺼풀이 사뭇 진지하고 엄격해 보여서 볼 때마다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

자신과 다른 아이.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보다 부서지는 햇살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소년,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은 자신과 다른 그를 동경했기 때문이리라.



“……찬혁이?”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시우의 물음에 서영의 얼굴 역시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도 소문 듣고 알았어. 찬혁이 아빠 돌아가시고 남자애들과 가끔 연락은 주고받았다는데, 최근 무슨 이유인지 아주 소식이 끊겼대.”

“그럼 이제 학교는 안 나오는 걸까?”

잠시 무언가를 골몰하던 서영이 불쑥 말을 꺼냈다.

“오늘 자습 없는데, 찬혁이 집에 가 볼까?”

“집을 알아?”

“나와 중학교 동창이잖아. 남자애들이랑 어울릴 때 우연히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 학교에서 멀지 않으니까, 걸어서 갈 수 있어.”

가까운 친구들과 연락까지 끊었다면 찬혁이 일부러 아이들을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빚쟁이에게 쫓겨 야반도주하듯 사라졌다는 소문까지 떠도니, 찾아가도 만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다.

“찬혁이가 싫어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찬혁이가 꼬인 데 없이 워낙 성격이 좋잖아. 아마 얼굴 보면 반가워할 거야.”

서영 역시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기 때문에 마음의 어두운 그늘이 없었다. 하지만 시우는 알고 있다. 세상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올바르고 좋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찬혁이 제아무리 구김 없이 밝은 성격이라고 해도, 갑자기 닥친 불행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 찬혁에게 값싼 동정과 위로보다는, 그 자신의 힘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게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우 역시 찬혁이 잘 지내는지 멀리서나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럼 멀리서만 지켜보고 오자.”



방과 후에 서영과 함께 찬혁의 집으로 향했다.

높은 담장으로 이어진 주택가 골목길은 부유층이 사는 곳인지, 값비싸 보이는 외제 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저기 보이는 하얀색 이층집이야.”

서영이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서양식 2층 주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높은 담장 때문에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돌담과 고급스러운 목재 대문만 봐도 집이 으리으리해 보였다. 찬혁의 집이 부자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집을 보니 아이들의 수군대던 말이 실감 나게 느껴졌다.

“찬혁이는 이미 이사 갔나 봐. 예전에 걸려 있던 문패가 없어.”

서영의 말대로 문패를 최근에 떼어 냈는지, 문패가 있던 네모난 부분이 도드라져 보였다.

“혹시 모르니까 초인종을 눌러서 확인해 보자.”

서영이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세요.’라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찬혁이 친구인데, 혹시 찬혁이를 만날 수 있을까요?”

― 찬혁이? 그런 사람 안 사는데.

서영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하지만, 예전에 여기 살았던 분들,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

― 집을 경매로 사들여서, 예전 주인은 잘 모른단다. 정 궁금하면 동사무소에서 물어보렴.

이사 갔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막상 그가 이곳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서영 역시 같은 감정인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대문 앞을 한참 서성였다.

“……가자.”

두 사람은 말없이 왔던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어둑한 골목길을 걷다 보니, 돌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실 찬혁과는 특별히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버스 안에서 짧은 대화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마치 든든하게 곁을 지켜 주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서글펐다.

축제 날 버스를 함께 타지 않았다면, 그의 동생 찬주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리고 버스 차창으로 그와 오랫동안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박찬혁은 그저 자신과 상관없는 성운고 전교 1등 정도의 무게로 남았을 텐데.

그날, 버스 안에서 찬혁이 물었다.

‘찬주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자꾸 네가 생각나. ……이런 내가 이상하지 않니?’라고.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날 솔직하게 답해 줄 걸 그랬다.

입학하고 줄곧 너를 지켜보았다고. 환하게 웃어 줄 때마다 가슴이 설레어서 차마 고개 들 수 없었다고. 바람조차 피해 가는 어두운 골방, 좁은 창틈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너를 바라보았다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고.

‘박찬혁, 너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니? 나만큼이나 내일이 두렵고 잠에서 깨어나기가 두려워서 혼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건 아니니?’



* * *



겨울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정규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여전히 찬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대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었다. 시우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기억에서 박찬혁이라는 아이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바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전교 1등은 다른 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2등급 꼭대기에 있던 시우의 내신 성적은 박찬혁이 사라짐으로써 1등급까지 올라갔다. 이대로라면 최상위권 대학을 노려볼 수 있겠다고 담임 선생님이 어깨를 두드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시우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쉽게 열광하고 쉽게 잊어 가는 아이들만큼이나, 담임 선생님의 무신경함이 싫었다. 또한, 찬혁이 없는 권태로운 학교생활에 점점 더 흥미를 잃어 갔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학교를 나왔다. 할머니와 둘이 살던 전주 시골집에 가고 싶지만, 주머니에 있는 돈은 고작 버스비 정도가 전부였다. 버스를 타는 대신 편의점에 들러서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나머지는 복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을 나와서 앙상한 가로수가 늘어선 둑길을 걸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같은 생각을 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찬혁을 생각하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춘다던 어린 찬주를 상상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우아한 거동이 인상적이던 그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태어났으니 사는 거라고. 죽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비 없이 태어난 자신과 찬혁은 다르다. 시우에게 불행은 내쉬는 호흡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록 내쉴 때마다 숨이 탁탁 막히지만, 할머니의 말씀처럼 지금껏 죽지 않고 근근이 살고 있으니까.

시우가 잔뜩 흐려진 탁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찬혁의 불행이 자신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상상한다.

저승문 앞에 서서 어린 손녀를 두고 가기가 고통스러운지,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늙은 할머니와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뒤늦게 달려온 들뜬 화장과 요란한 차림의 엄마라는 여자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처음 타 본 고속버스와 서울이라고 적힌 초록색 이정표까지.

유흥가 골목, 낡은 여인숙을 개조하여 만든 볕이 들지 않는 좁은 방과 얇은 판자벽 사이로 들려오는 달뜬 남녀의 신음과 이어 들리는 찢어질 듯한 비명, 그리고 옆방의 누군가가 시끄럽다고 외치는 고함까지.

난무하는 욕설과 날카로운 쇳소리와 둔탁한 소리의 향연. 그리고 언제나처럼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일상.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주칠 때마다, 음침한 눈으로 시우를 훑어보는 엄마의 남자. 그리고 또…….

할머니가 사라진 시우의 세상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온통 역겨움으로 가득 찼다. 그 역겨움에 불행 하나를 덧붙인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있다면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고 싶었다. 박찬혁만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당신이 원하는 게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그 고통 전부를 자신이 받겠다고.

‘어째서 그의 불행을 대신 받으려고 하느냐.’라고 신이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빌어먹을 신은 시우의 간절한 기도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 후, 시우는 찬혁을 다시 만났다. 그것도 영등포 여인숙 골목에 있는 허름하고 낡은 제집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