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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나는 평범한 아낙이 꿈이었느니라.’

초가의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기둥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청근의 머릿속으로 지나간 기억이었다.

어머님께서 길례를 서두르겠다 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혼처가 정해졌다. 신랑 될 이의 조부께서 당파 싸움에 진력내신 뒤로 자손들은 조용히 학문에 매진하는 집안이라 하였다. 그에 상궁이 대신 나서서는 현주께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니냐 여쭙자,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조용한 집안에서 그저 시부모 봉양하고, 남편 떠받들며 자식 키우는 재미로 살고 싶었다고.

그때는 청근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니…… 시부모 봉양하는 것은 다행히 아직 아버님께서 생존해 계시니 얼마든지 정성을 다할 수 있지마는 남편을 떠받들고 자식 키우는 재미는 청근 자신도 느껴 보지 못하리라. 어머님의 아픈 일생 앞에서 제 신세 타령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쉬움을 느낄 만큼 여유 있는 하루하루도 아니었고. 그저…….

어느 집이 이른 저녁을 짓는지, 코끝으로 연기 내가 스쳐 갔다. 어느새 저녁을 지을 시간이었다. 그녀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몸을 감싼 거친 삼베에 피부가 쓸리며 여기저기서 쓰라린 아픔이 일었다. 어머님과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셨을 적에는 출가외인이라 상복조차 갖춰 입지 못하였으니 그 불효에 비하면 이 정도 아픔쯤이야. 나이 12살에 청상과수가 되어 서방님을 위한 상식(上食. 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궤연 앞에 올리는 음식)을 짓는 처지를 동네 아낙들은 딱하다며 혀를 찼지만, 청근은 상복이라도 입고 서방님을 기릴 수 있는 처지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서방님이 돌아가시고, 탈상(삼년상이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 번이나 하고도 남을 세월이 더 지나갔지만, 아직까지 상복을 벗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애초에 자식 된 도리로 따지자면 친정 부모님에 서방님, 그리고 낙향하자마자 돌아가신 시어머님까지 합쳐 총 12년 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세월이 지나도 벗을 생각은 없었다.

청근은 고개를 들어 노을이 물드는 하늘을 보았다. 붉은 노을빛은 길례를 올리고 처음 뵈었던 서방님의 미소처럼 고왔다. 창백하지만, 인자하게 미소 지어 주시던 모습이 처음부터 좋았다. 언젠가 궁에서 만났던 사내의 미소와 비슷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보았던 궁 밖의 사내는 한 살 터울인 세손 오라버니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수려했었다. 그래서 길례를 올릴 서방님도 그러시리라 기대했었고.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를 닮았던 서방님으로 옮겨 간 인자한 미소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혼인할 적에 이미 약관을 넘기셨던 서방님은 기침이 잦아 바깥출입이 적은 편이셨다. 아니, 혼인한 뒤 두어 해 동안 오히려 자리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더 많았다. 궁에서 큰 변이 났다는 소식이 연거푸 전해져 온 뒤로 슬픔과 악몽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던 저를 업고 안마당을 거니시던 것이 꽤 무리라 할 정도로.

부모님을 여읜 것을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얼마 못 가 서방님의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녀가던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쯧쯧거릴 때면 청근은 서방님마저 잃을까 봐, 더럭 겁이 났었다. 그래서 궁에서보다 열 배, 백 배의 정성을 들여 약을 달였지만, 서방님께서는 그 해 가을을 넘기지 못하셨다.

부모보다 앞선 자식의 불효에 상심한 아버님께서는 낙향을 결정하셨다. 아들임과 동시에 함께 글을 읽고 논하던 글벗을 잃은 허전한 마음을, 소싯적에 적을 두었던 서원 근처로 내려감으로써 달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청근까지 한성을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셨지만, 그녀로서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한성에는 그녀를 붙잡아 둘 이가 그 누구도 없었으니까.

부엌으로 들어서는 청근의 귀에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께서 또 기침을 하시는가. 하나뿐인 아드님을 잃으신 상심을 극복하지 못하신 탓에 아버님께서도 많이 쇠약해지셨다.

덜컥 겁이 났다. 아버님마저 돌아가시면 세상천지 자신은 혼자였다. 스무 해 가까이 살아오면서 기쁜 날은 없었다. 늘 마음 졸이며 불안해하고, 누군가를 잃을까 슬퍼서 눈물 흘리고. 그런 삶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슬픔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수저질도 한 번 하실 것을, 청근이 권해 드리면 간신히 두 번 하시는 것을 안다. 진지라도 입맛에 맞는 것을 양껏 차려 드리면 좀 나을까 하지만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역시나 오늘도 바가지가 쌀독의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자, 청근의 시름이 깊어졌다.

한성을 떠나올 적에 정리하였던 가산의 대부분과 노비들도 아버님께서 서원을 보수하고 유지하는 곳에 증여하시어 남은 것은 이 초가집뿐. 아버님께서는 학문에 심취하신 분이라 원체 집안 살림에는 관여치 않으셨고, 서방님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더욱더 세상과 동떨어져 계신 분이니 가세 걱정은 오롯이 청근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궁에서 나올 적에 어머님께 받았던 패물들을 하나둘씩 팔았고, 몇 해가 지나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진 뒤로는 삯바느질을 하였다. 하지만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눈이 짓물러 바늘귀에 실을 꿰지 못할 지경까지 바느질을 하여도 아버님께 올리는 진짓상과 서방님 상식은 늘 초라하기만 하니, 기침이 영 낫질 않으시는 것이다. 이럴 때면 현주에서 폐해진 연유의 참담함보다 호조에서 정3품인 현주에게 전해지던 의자(衣資. 의복 등의 물자)와 식물(食物. 먹을거리)이 끊어진 것이 간절해지곤 했다.

청근은 허리가 아플 때까지 구부리고 쌀독의 밑바닥을 긁으며, 아까 멍하니 앉아 있던 스스로를 꾸짖었다. 어설픈 감상에 젖어 있지 말고 낮에 받아 온 바느질감을 시작하였다면 벌써 마름질을 끝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밤새 일을 마쳤을 테고, 끝낸 일을 새벽같이 가져다주고 품삯을 받는다면 내일 조반에는 조금 나은 진짓상을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2. 새 사또



“나리, 웅복이가 돌아왔습니다요.”

밖에서 집사가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심부름 갔던 이가 오늘쯤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늦게까지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있던 서익이었다.

“들이게.”

잠시 후, 며칠 내내 노심초사하던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얼굴이며 패랭이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이가 들어섰다.

“그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던가?”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서익이 기가 막혀 반문하였다.

“보아하니, 하루 세끼 챙기는 것도 힘들어 보였습니다요. 젊은 마님이 그 집 대문을 친 싸릿대처럼 빼빼 말라서는―”

서익이 눈살을 찌푸리자, 웅복은 제 상스런 말이 상전의 귀에 거슬려 그런가 하여 잠시 주춤하였다. 하지만 서익이 어서 계속하라며 손짓을 했다.

“마님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는 것 같더라굽쇼. 시아버님 되시는 분이 서당 훈장 노릇 하실 적에는 그나마 좀 나았다지만, 자주 몸져누우시는 통에 그나마도 그만두셨다 하고요. 그래서 하루 이틀 지켜보았는뎁쇼, 마님이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을 해서 다음 날 갖다 주고 삯을 받아서는 겨우 보리 한 되 사고, 또 그날 밤 할 바느질감을 한 아름 받아 오고……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더만요. 가만 서서 지켜보는 이놈도 힘들었는데, 그러고 앉아 꼬박 바느질을 하는 분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요. 양반댁 마님은 다 호의호식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 댁도 있더라굽쇼.”

이럴 줄 알았다. 아니, 이렇게까지는 아니길 바랐는데. 서익은 둥둥 울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게다가 벌써 주청을 올렸다고?!”

“예. 아버님.”

“아니, 탄탄대로인 조정의 벼슬을 두고 어딜 내려가? 양의(陽義)가 대체 어디에 있는 곳이란 말이냐! 대감께서는 어찌 모르셨단 말입니까?”

“양의는 경기도에 있는 현입니다.”

“내가 지금 그것이 궁금해 묻는 게냐?!”

아버님에 이어 어머님께서도 목청을 높이셨다. 평생 한성에만 계셨던 분들이시니 경기도만 하여도 시골구석으로 여기시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당연히 놀라실 일이었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향후의 출세가 보장된 조정에서의 승직을 내팽개치고 외관직을 청하였으니 말이다.

오늘 아침, 그런 뜻을 품고 입궐하려던 서익에게 ‘내일부터는 부수찬 나리가 아니라 수찬 나리가 되시겠습니다’라며 활짝 웃으신 어머님이시니, 결코 죄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승직 예정이던 정6품보다 한 품계 더 높은 종5품(從五品) 현령(縣令)을 제수 받았습니다.”

“다들 피하려는 외관직을 신청하였으니 더 높은 품계를 주신 게지! 외관직의 종5품이면 조정의 종6품보다 못한 것이야! 그리 지방으로 돈다면 기껏 올라가 봤자 종2품(從二品) 관찰사란 말이다! 그래서 외관직에 있는 자들이 다들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해 안달이거늘 오히려 밖으로 나가겠다니, 네가 정신이 나간 게냐?!”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이리 노발대발하실 것을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기에 확실히 제수 받을 때까지 쉬쉬하였던 것이다.

“단번에 장원 급제하여 참상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하여 기특해하였더니, 뒤늦게 속을 썩이려는 게냐?”

“부수찬은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리 노여워만 하시지 말고 대감께서 오늘이라도 손을 쓰시어 어서 일을 되돌리는 쪽으로 하셔야지요.”

어머님께서도 나서셨지만, 서익이 고개를 숙이며 말씀 올렸다.

“이미 되돌릴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 명하신 임기를 시작하려면 내일 당장 길을 떠나야 합니다.”

“허어, 이런 고얀!”

아버님께서는 노발대발하셨고 어머님께서도 머리를 짚으셨지만, 서익은 단호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저, 저! 이런 짓을 벌인 것이 죄송한 것이 아니라, 미리 말 못한 것이 송구하다고?! 못한 것이 아니라, 아니 한 것이겠지! 그 전에 알았다가는 네 뜻대로 일이 처리되게 두지 않았을 테니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엉?!”

“조정에 뜻이 없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가 그 무슨 망발이란 말이냐!”

“외관직으로도 충분히 나라를 위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가문에는 먹칠을 해도 된다는 소리냐?!”

“외관직이 가문에 먹칠을 한다 하시는 것은, 역시나 벼슬길에 계신 아버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라 봅니다.”

“뭣이?! 네가 지금 나를 속물이라 하는 게야?!”

서익이 입을 다물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아버님께서 벼루를 집어 그의 앞으로 던지셨다. 큼지막한 벼루가 그의 무릎 근처에 떨어지며 쩍 하고 깨져 나갔다. 단정히 펼쳐져 있던 서익의 흰 도포 자락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난장판인 방과 서익을 보며 어머님께서 한탄하셨다.

“아버님께서 네게 어떤 마음을 품고 계셨는데! 그것을 정녕 몰라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