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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님 : 여자 종을 대접하여 부르거나 여자 종들이 서로 높여 부르던 말.

* 전체적인 배경은 영조 때의 정황을 따왔으나, 대부분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




1화

1. 옥돌





“저리 든든한 아드님을 두셨으니 참의께서는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방을 나서는 서익의 반듯하고 점잖은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소훈이 한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서익더러 후원 구경을 하라며 내보내신 뒤, 저를 발 안쪽으로 가까이 들이시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자신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다고 홍 참의는 생각하였다. 대체 무슨 볼일이시기에 이리 가라앉은 기색인지, 덩달아 자신까지 긴장이 되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탕제는 들고 계시지요?”

소훈 박씨가 기운 없는 미소를 쓰게 지었다.

“좋다는 약을 아무리 먹으면 뭐 합니까.”

그 뒤에 덧붙이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지.

쯧.

세자가 어제도 기행을 저질렀다 하니, 그 후궁인 소훈의 얼굴이 멀쩡할 리가 있는가. 동궁전 안에서 궁녀 하나를 검으로 그었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이러다가는 궁 안의 내관이며 궁녀들이 모두 죽어 나갈 지경이었다. 주상의 노여움은 쌓여만 가고, 폐세자 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잇고 있으니, 약이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원체 몸이 약하여 저리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은 분인데.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참의 대감께 많은 신세를 졌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소훈께서 어서 강녕해지셔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는 것으로 그 은혜를 갚는 것으로 치지요.”

홍 참의는 새삼스레 소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날, 그리 아리땁고 활발하더니, 어쩌다 이리 병색이 완연하고 나이 들어 보이게 되었는지. 그의 마음속에서 세자에 대한 역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가 소훈 박씨, 즉 연희를 처음 본 것은 자신이 16세, 연희가 12세 되던 해였다. 연희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현 주상의 등극을 반대하다 실패하여 아들인 윤성과 함께 귀양을 가며 친우인 홍 참의 아버지께 딸과 부인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정적이지마는, 어릴 적 서당 동무의 청을 거절치 못한 아버지께서 물어물어 그 집을 찾으니, 당장에 길바닥에 나앉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 데다가, 집안이 풍비박산 난 충격으로 부인은 이미 정신을 놓았고, 그 어미를 보살피기 위해 어린 딸은 기생이 되려던 와중이었다고 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아버지께서는 대외적으로는 먼 친척뻘 되는 이들이라 말씀하시며 그들을 집에 들이셨다.

연희는 영특할 뿐 아니라, 수놓기, 서예, 그림 등 다방면에 출중하였다. 때문에 4살 위인 자신의 시선이 늘 연희에게 향하는 것은 자명했고, 그는 결코 아니 될 일이라는 아버님의 판단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나 한 집안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정은 깊어졌다. 연희는 딱히 좋다 어떻다 표현은 없었지만, 자신의 감정은 확고했다. 그러다 갑자기 연희가 사라졌다. 정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셨던 아버님께서 어디론가 보내신 것이 분명했지만, 당신께서는 그저 모른다고만 하셨다.

한동안 방황도 하였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정신을 차려서는 과거를 보고 혼인도 하여 승차(陞差. 한 관청 안에서 윗자리의 벼슬로 오름)를 거듭하던 어느 날. 얼마 전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는 소훈 박씨가 자신을 찾는다 하여 들었다가, 드리워진 발 너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놀랐던 것이다.

세월도 많이 지났고, 자신의 아들도 걸음마를 뗀 지 오래이니, 옛정이 아직 남아 있다 하긴 그러하였지만, 벌써부터 진행되고 있던 세자의 기행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애석하였다. 그 기행이 벌써 몇 년째이니, 그동안 소훈의 안색은 점점 파리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다시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무슨 부탁이시든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현주를 하가(下嫁. 지체 낮은 곳으로 시집보냄)시켜야겠습니다.”

소훈의 유일한 소생이자, 세자의 고명딸인 현주는 이제 겨우 10살 정도인 것으로 아는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

“현주 아기씨를 벌써 상(尙. 공주나 옹주를 혼인시킴)하시게요? 한데, 그러자면 금혼령을 내리시지 않고요.”

“시급하여, 금혼령 없이 추진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대감께서 부마가 될 이를 좀 알아봐 주십시오.”

세자가 폐세자 될까 봐 세자빈도 몸을 사리고 있는 마당이니, 하물며 소훈이야 아니 그럴까. 세자빈이야 세손을 끌어안고 있으니 주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겠지만, 소훈은 입장이 다르다. 게다가 현주는 서인으로 전락할 터. 현주의 신분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여의려는 것이리라.

“제 처지가 이러하니,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생활하기에 어렵지 않은 집안이면 되고, 현주가 좋아하는 글을 맘껏 읽을 수 있을 정도이면 됩니다.”

“그게, 어떤 가문이 적당할지…… 조금 전 보셨다시피 소신에게도 열다섯 먹은 아들이 있긴 합니다만…….”

“참말이십니까?”

소훈께서 그를 빤히 바라보셨다.

“세자 저하를 탄핵하는 무리들에 대감도 끼어 있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홍 참의는 속으로 뜨끔하였다. 그 시선에 비난은 섞여 있지 않았다. 세자의 행실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러할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대감댁은 싫습니다.”

종2품인 이조참의가 싫다니? 이 상황에서 마다할 입장은 제가 아닌가. 기울어 가는 세자의 적녀도 아닌 서녀인 현주에게 이조참의의 외아들 정도면 차고 넘친다.

“대감께서 정승까지 내다보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드님께도 같은 꿈을 꾸실 테고요. 제가 현주에 대해 꾸는 꿈은 반대입니다. 세도 있는 가문은 싫습니다. 당쟁에 휘말려 남편이 죽느니, 차라리 벼슬을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재물이 너무 많아도 세도를 탐하게 되니, 그저 나라의 녹 없이 먹고살 정도로 적당한 가문이면 됩니다.”

당쟁에 휘말려 아비와 오라비를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지아비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으니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저 먹고살 만한 양인 집안이어도 좋겠습니다.”

“현주 아기씨께 양인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적당한 가문을 알아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참의가 나간 뒤, 소훈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지난밤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지병으로 원래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편이지만, 지난밤에는 꿈자리까지 사나워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어느 때던가. 문득 눈을 뜨니, 제 앞에 시퍼런 새벽빛을 받고 앉은 이가 있었다. 세자 저하셨다. 또 무슨 일이신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고름도 풀어지고 흐트러진 차림새에, 소매에 묻은 거무스름한 자국은 필시 핏자국이렷다. 오늘은 또 어느 궁녀를 죽이신 것인가! 어찌하여 그리 파행을 일삼으시는가! 마음을 얼마나 다치셨기에!

“어제 활터로 향하던 길에 현주를 보았다.”

아. 흥분되지도 격앙되지도 않은 평이한 어조는 오랜만이셨다.

“많이 컸더구먼.”

세상에 났을 적에 한번 안아 보신 이후로는 처음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출가시키라.”

저를 보지 않으시고 한참을 방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주시더니 하신 말씀이 그렇다. 몇 달 만에 찾아오시어 하시는 말씀은 그리 원망스러웠다.

“고작 10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셨다. 지금의 온갖 추문으로 얼룩지기 전의 명료하고 선명하던 시선이셨다. 그 푸른 시선에는 측은지심이, 그리고 무력감이 깃들어 있었다. 참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그대는…… 몸이 약하여 다행이다.”

결국 그녀의 절박한 물음이 담긴 시선에서 비켜서시면서 마저 덧붙이는 말씀이 그러하였다.

그 말씀은…… 곧 죽을 저는 괜찮지만, 앞으로 살날이 많은 현주가 당할 일이 걱정되신다는 말씀입니까? 세자빈이 저하를 구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음해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일이 그렇게나 빨리 진척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큰일을 당하기 전에 현주를 궁에서 내보내라 그 말씀이십니까?!



“쿨럭.”

기침이 시작되어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온몸을 들썩거리며 기침을 하고 나서 입에 대었던 천을 떼어 보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는 몸이 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니, 다행이라 생각하셨군요.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니…….

하지만 저는 눈을 감아도 현주가 걱정될 것 같습니다. 세손께서는 외가가 든든하니, 폐서인 될 걱정까지는 없으시겠지만, 현주는…… 저 어린것이 이 세상을 혼자 어찌 살아갈까요? 딸은 어미 팔자를 닮는다는데, 저보다 더 딱한 지경에 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훈의 처소를 나오던 홍 참의는 생각이 많았다. 솔직히 소훈이 자신의 아들을 달라 하였어도 흔쾌히 허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자의 장인까지 나서서 세자를 탄핵하며 주상의 분노를 충동질하고 있는 판이니, 그 세자와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라.

“한데, 이 아이가 어디로 갔지? 근처에 있으라 하였거늘.”

얼마 안 있어 치를 소과를 준비하느라 방 안에 앉아 책만 읽는 탓에 엉덩이에 욕창이 생길 지경이라며 억지로라도 궁 구경을 좀 시켜 주십사 하던 부인의 청이 하도 간곡하여, 오늘 입궐하며 함께 들어온 아들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게지?



홀로 밖으로 나선 홍서익은 주변 구경을 하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소 꽃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님께서 나오실 때까지 자신을 흘끔거리는 나인들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는 꽃구경이라도 하는 척이 나을 성싶기 때문이었다. 어찌 저리들 보는지 모르겠다.

이제 15세로 또래보다 키도 훌쩍 큰 데다가 어엿하게 도포까지 차려입은 터라 준수하고 훤칠한 대장부로 보이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세자 저하의 후궁 되시는 분의 처소라 그런지 둘레둘레 꽃이 지천이었다. 이쪽으로 가 볼까나? 아버지께서 멀리 갔다가는 길을 잃을지 모르니 근처에 있으라 하셨으니, 처소 주변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오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뒤뜰의 연못가를 지날 즈음.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