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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선배?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 응. 집에 있었구나. 정말 미안한데 문 좀 열어 줄래?

경기도에서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부친을 둔 윤경은 대학 시절, 재벌 집 딸로 유명했다. 용돈의 씀씀이가 다른 이들과는 달랐고 옷이며 가방이며, 걸치고 다니는 장신구도 고가의 브랜드였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과 후배들에게 밥을 쏘았던, 제법 호탕하고 당당한 선배였다.

신희가 2학년이 되던 때,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그때, 새벽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데 코피를 쏟았다. 지나가던 윤경이 티슈를 내밀었고, 두 사람은 같은 과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연유로 가끔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친분을 쌓았다.

윤경은 신희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와 일부러 매상을 올려 주기도 했고, 모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신희를 대동시켰지만, 그것도 졸업하고 나서 윤경이 아버지 사업체로 들어가 일을 하면서 소홀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 무작정 집으로 찾아온 전력이 있던 터라 윤경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당황스러운 게 있다면 윤경의 손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해, 신희야.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일이에요, 선배?”

신희는 과일 바구니를 건네받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윤경을 위해 마른 수건을 가져다준 후 물었다.

“물 한 잔 줄까요? 아니면 아이스커피? 선배 커피 좋아하잖아요.”

“아니. 나 물 줘.”

신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유리잔에 생수를 가득 부어 윤경에게 건넸다. 단숨에 물을 들이켠 윤경은 제집 소파에 앉듯 널브러지고는 있는 힘을 끌어모아 숨을 내쉬었다.

“나 임신했다, 신희야.”

그렇게 목뼈가 바스라지도록 한숨을 쉰 윤경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신희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라 황당하기까지 했다. 신희는 윤경의 아랫배를 흠칫 내려다봤다.

“에에? 선배 결혼했었어요?”

“아니. 혼전 임신. 남친도 있어.”

“세상에.”

애초에 이성보다 감성이 몇 배는 발달한 선배였다. 길 잃은 강아지를 발견하면 한 번은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직성이 풀렸고,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2박 3일 동안 우는 건 기본이요, 받은 게 있으면 그 이상 돌려주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인간적인 면 때문에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경을 지녔음에도 간간이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게 된 윤경이 임신을 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일지도.

신희는 윤경의 옆에 앉았다.

“그럼 오늘 청첩장 주려고 온 거예요?”

“그것도 아니야.”

“그럼요?”

“문제가 좀 생겼어. 아주 큰 문제가. 오늘 저녁에 나, 맞선이 잡혀 있어.”

“아…….”

‘맞선’이라는 단어에 뜻하지 않게 뇌가 팔딱거리는 느낌이었다. 어제오늘 계속 맞닥뜨리게 된 단어가 어쩐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남친이 있는데 맞선이 따로 잡힌 거면 문제가 좀 되겠네요. 근데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아요?”

“입이 안 떨어져. 내 남친 흙수저거든.”

“흐음.”

“너 우리 아빠 알지? 대학 다닐 때부터 내 결혼에 주력하신 거. 아마 오늘 선볼 남자도 배경 빵빵한 최고의 사윗감일 테지. 하지만 난 지금 내 남친을 너무 사랑해. 절대 헤어질 수 없어.”

“그래서 선배는 어떻게 할 거예요?”

“후배 찬스를 좀 쓰려구.”

“후배 찬스?”

“내가 며칠 동안 머리 터지게 생각을 해 봤어. 원형 탈모가 올 정도로 말이야. 지금 솔직히 남친이 있다는 것과 임신 사실을 알려 머리채 뜯기면서 아이를 지우고 남친과 헤어지느냐, 아니면 숨죽이고 기회를 노리느냐.”

“결론은요?”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임신 5개월이 지나면 아기를 지울 수가 없대. 태중에서 아기가 상당히 자라 있기 때문에 산모에게 엄청 위험하다는 거야. 그래서 우선 5개월이 될 때까진 우리 아빠 비위를 최대한 맞추려고. 그래야 재산이라도 좀 물려주실 것 아냐. 그러다가 5개월이 되는 시점에 탁 터뜨리는 거지. 빼도 박도 못하게.”

“와아. 이렇게 영악할 수가.”

“알아, 나도. 내가 영악하다는 거. 하지만 난 도저히 빈손으로 맨바닥에서 시작할 수 없어. 남친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살 수는 없어.”

“그럼 그 후배 찬스라는 게…….”

어쩐지 뒷머리가 당겼다. 윤경이 커다란 과일 바구니까지 안겨 가며 평소 자주 만나지도 않는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예상대로 윤경은 신희의 손을 덥석 쥐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는 것마냥 얼마쯤 악력까지 가하면서. 그리고 그 석연치 않은 깨달음은 이내 현실로 다가왔다.

“네가 오늘 저녁에 나 대신 맞선 자리에 좀 나가 줄래? 부탁해, 신희야.”

“……내가 어떻게요? 그쪽이 선배 얼굴 알 수도 있을 텐데?”

“난 그쪽 얼굴 몰라. 이름도 직업도 몰라. 묻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 거기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70퍼센트야.”

“그럼 나머지 30퍼센트의 확률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왜 날 그 30퍼센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거예요, 선배?”

“내가 오죽 다급했으면 너한테까지 찾아왔겠니?”

“내가 어때서요?”

“넌 좀…… 그렇잖아. 과 애들하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과 졸업생 모임에도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널 찾아온 건 그만큼 다급해서가 아니겠니? 그쪽에서 혹시 내 얼굴을 알고 있다 쳐도 너한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넌 그냥 내 부탁 받고 나왔을 뿐이라고 말하면 돼. 신희야, 부탁 좀 들어줘.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안쓰러운 목소리로 구걸하듯 부탁하는 윤경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대책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도 만드는 걸까. 머릿속에 몇 개의 폭탄이 팡팡 터지는 듯했다. 한가롭게 조깅하면서 영모로 인해 복잡해진 속을 달래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과일 먹자, 신희야.”

좀 전까지 애걸하며 눈물을 짓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윤경은 생글생글 웃으며 주방에서 과도를 가져왔다. 바구니에서 멜론 하나를 꺼내어 우그적 썰자 멜론이 반 토막으로 갈린다. 잘린 멜론 조각이 마치 복잡한 제 머릿속 같았다.



* * *



‘그쪽에서 내 이름을 알 거야. 넌 그저 웃으면서 짧게 대답만 대충 해 주고 나오면 돼. 어어어, 근데 지금 네 상태론 맞선은커녕 근처 편의점에 갈 수준도 못 되겠다. 내가 변신시켜 줄게.’



윤경은 스타일리스트까지 자처하고 나섰다. 옷을 고르고 액세서리를 고르고 화장품에 대한 코치까지 한 윤경 때문에 결국 토요일 저녁, 신희는 시내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앉아 있게 되었다. 바람까지 불어 마음 들뜨게 만드는 주말 저녁이 엉망이 되어 버린 이유를 굳이 윤경에게 전가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을 다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피숍은 맞선 분위기를 자아내는 테이블로 가득했다. 각각의 테이블마다 남녀가 마주 보고 앉아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직원이 이름이 적힌 네임보드를 치켜들면, 먼저 와 있던 상대방이 일어나 손을 흔드는 식으로 맞선이 성사되고 있었다. 맞선 전용 커피숍인가. 차라리 그쪽이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어색하고 생소한 분위기를 용케 견디면서도 자신이 최고의 신랑감 신붓감임을 어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마치 똑같은 제품을 공정에 맞게 뚝딱 만들어 내는 커플 공장처럼 여겨졌다.

신희는 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7시 30분. 초조하게 흐르던 시간은 어느새 약속된 순간에 이르렀다.

핸드폰을 도로 백 속으로 넣던 그녀는 땡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를 듣고 비켜 있던 시선을 카운터 쪽으로 돌렸다. 그 종소리는 맞선 상대방을 찾는 손님이 왔을 때 직원이 울려 주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들고 있는 네임보드에는 ‘최윤경’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쯤 긴장된 가슴과 표정을 서둘러 갈무리한 신희가 손을 번쩍 든 순간, 가슴이 아래로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네임보드를 든 직원 옆에는 남색 슈트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영모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2. 운세 풀이



영모는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흡사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쳐다보듯 조금은 생경하고 낯선 시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회사에서만 보던 존재를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났으니, 그 이질감은 꽤 컸다.

늘 보아 오던 단정하고 얌전한 무채색 톤의 투피스 정장이 아닌, 연두색 기운이 감도는 얇은 니트 원피스는 몸매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고, 한 갈래로 묶어 내리곤 했던 긴 생머리에는 굵은 웨이브가 들어가 육감적인 느낌까지 갖게 했다. 펄로 인해 윤이 흐르는 입술은 차라리 준수한 편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들이 맞선에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채신희’가 왜 ‘최윤경’으로 둔갑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영모는 테이블 위로 아찔하게 시선을 빼앗고 있는 도드라진 젖가슴 골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신희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저, 저기. 보, 본부장님.”

조바심에 혀로 입술 끝만 축이던 그녀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그녀와 달리, 영모는 꽤 느긋한 심경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음. 말해요.”

“그게, 그러니까…… 사실은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최윤경이라는 사람이 제 학교 선배예요.”

말을 이어 가다가도 중간중간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애초에 윤경의 애절한 부탁을 냉정하게 외면했어야 옳았다. 늘 그랬듯이 다가오는 존재에게 거리를 두고 밀어내야 함이 옳았다. 넌 좀 그렇다는 윤경의 한마디에 갑자기 발끈해져선 냉큼 부탁을 수락해 버리다니. 한술 더 떠 하필 이런 자리에서 그와 부딪힐 게 뭔지.

가져선 안 되는 것들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역시나 쓰디쓴 절망감뿐이었다.

기분을 환기시키고자 적당하게 숨을 고른 신희는 오늘 있었던 윤경과의 만남과 그녀가 처한 상황, 그리고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배경에 대해서 제법 담담하게 설명했다. 문제에 맞닥뜨리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해결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이 짧은 설명으로 이 상황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신희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영모는 신희의 설명을 끝까지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 놀랍도록 신기한 우연이었지만 한편으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맞선이라는 시간을 버티고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직원이 커피를 가져오고, 영모는 한 잔을 신희 앞으로 밀어 주었다. 상황의 인과 관계에 대한 오해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긴장으로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출근 첫날 구내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그때처럼.

“우선, 커피부터 마시지, 신희 씨.”

“어, 네. 본부장님.”

신희는 그가 건네 오는 안온한 한마디에 얼마쯤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코너까지 몰린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재주를 지닌 것 같다.

헤이즐넛 향이 작은 테이블 위로 퍼져 나갔다. 뜨거운 기운이 뱃속까지 스며들자 신희는 한결 더 누그러진 얼굴로 그를 흘깃 쳐다봤다.

“나하고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게 처음인가?”

“네. 그런 것 같아요. 식사는 한 적 있지만요.”

“아, 식사. 그렇지. 이런 기회도 자주 오는 게 아닐 테니 내 기분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다 납득했으니까.”

그럴지도, 또 아닐지도 모른다. 영모는 한 모금 커피를 들이켜며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을 완벽하게 납득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하기 그지없는 맞선이라는 순간을 견디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