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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어느새 하늘은 긴 밤을 준비하듯 어두워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의 한복판에 자리한 계절답게 애매한 날씨만큼이나 하늘의 색깔도 애매하다. 이론적으론 검은색과 하늘색의 중간이니 엷은 검정 정도 되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연두색에 가깝다.

퇴근이 시작된 시점에 맞춰 차량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빌딩 숲은 시간이 흘러 완벽하게 어두워진 밤이 오면 현란한 장관을 이룰 것이다.

“후우…….”

신희는 기다란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퇴근 시간을 20분이나 넘기고 있었다. 여전히 본부장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회의에 참석한 그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케줄대로라면 이미 30분 전에 끝났어야 할 회의였다. 하지만 다다음 달 보스턴에서 있을 모터쇼 실무 기획 회의니 안건의 중요도가 컸고, 당연히 오가는 말은 길어질 것이다.

그가 주재하는 회의는 기본적으로 한 시간 연장은 각오해야 한다는 직원들의 우스갯소리가 절대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희는 불평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니 오히려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회의가 길어지면 이후 저녁 일정에 대해 조율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그것도 해치워야 했다.

신희는 빠른 손놀림으로 인터폰을 들었고, ‘도정순’이라는 이름이 적힌 메모 용지를 들여다보며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건너편에서 나이가 있음직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권영모 본부장실입니다. 본부장님의 회의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시간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여자는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차후에 본인과 통화를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주 잠시, 누굴까,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곧 접어 두기로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녀의 비서 업무 제1 원칙이며 동시에 그가 가장 처음 주문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비서가 된 지 6개월이 흘렀고, 제법 잘해 내고 있다고 자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지키기 때문이라 여겼다.

전화를 끊은 신희는 본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우자동차그룹 신사동 사옥 마케팅본부장 권영모의 사무실은 그의 외모와 성격만큼이나 단정하고 꾸밈이 없다.

각도가 조금 흐트러진 명패를 바로 세우면서 그의 이름 석 자를 손끝으로 찬찬히 훑어 내렸다. 입술 끝이 비틀리더니 이내 보조개가 움푹 팬다.

스물아홉 해를 살면서 그녀가 가장 잘한 일은 권영모의 비서가 된 것이다. 급류를 탄 듯 정신없이 흘러가던 삶이 그 속도를 늦추고 찬찬히 굴러가게 된 건 그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물론 그가 제게 해 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기가 적절했을 수도 있다. 그녀도 긴 일생에 한 번쯤은 평화를 영유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듯 없는 듯’이라는 말로 업무 원칙을 부여한 그가, 신희는 더없이 고마웠다.

그때부터였을까.

그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보내오는 섬세한 눈길에, 스칠 때마다 닿는 체온에 가슴 한구석이 바스라진 건.

“퇴근 안 했습니까?”

본부장실을 나오고 나서도 40분을 더 기다려서야 신희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침나절에 비해 조금은 까칠해진 얼굴과 매듭이 흐트러진 넥타이가 눈에 금세 띄었다.

“네. 회의는 잘 끝나셨어요?”

“내일 저녁에 또 한 판 해야겠어. 왜들 준비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거지?”

잘생긴 입매를 불만스럽게 비튼 그가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신희를 지나쳤다. 신희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회의가 길어지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의자에 몸과 함께 피로감도 묻은 영모가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쓰는 것이 보였다. 이따금 그가 난감해할 때 자주 행하는 습관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터득하고 학습한 바에 의하면 이럴 때는 여유가 필요했다.

“차를 드릴까요?”

“고맙군. 한 잔 부탁해요. 채 비서는 이만 퇴근하고.”

“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예정됐던 ‘도정순’이라는 분과의 약속은 차후로 미뤘습니다. 본부장님께 직접 전화를 드리겠다고…….”

“아…….”

영모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다섯 손가락을 차례대로 움직여 책상 위를 쳤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듯했다. 그중 검지를 이용하여 규칙적으로 툭툭 치며 고민을 이어 가던 그가 짧게 뇌까렸다.

“맞선.”

신희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커졌다. 단 두 글자였지만 앞뒤로 생략되고 함축된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저녁 맞선을 볼 예정이었고 아까 통화 속 도정순이라는 여자는 맞선을 주선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 몇 차례 반복되다 보면 색다른 시선을 갖고 대하게 된다. 신희는 올여름부터 시작된 그의 맞선 퍼레이드를 상기했다. 벌써 세 번째던가. 아니, 오늘 취소된 약속까지 더해 보면 네 번째였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도 있다며 쓰게 웃고 넘겼지만, 네 번째가 되다 보니 조바심이 들이쳤다.

“오늘 취소된 약속이 맞선이었다고.”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시켜 주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였지만 지금의 신희에겐 잔인하기 짝이 없다.

감정의 동요를 애써 삼킨 신희는 잘 훈련된 미소로 응했다.

“아, 네. 그러십니까? 저, 본부장님.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래요.”

그의 대답이 허공에 흩어졌다. 조용히 본부장실의 문을 닫고 나와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 우습게도 그가 어떤 여자와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상상이 떠올랐다. 맞선을 계속 보다 보면 그는 언젠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게 되는 걸까.

찻물 주전자를 인덕션에 올리는 손길은 담담했지만 표정은 더없이 허허로웠다. 어차피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수많은 여직원들의 가벼운 흠모의 대상이었고, 그녀들의 커피 타임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고, 이상형의 기준을 제시하는 남자였다. 신희도 매우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하긴 했으나 그녀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고, 늘 생각했다.

자신의 결핍을 그가 알아봤다는 생각.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 달라고 주문했던 거라는 생각.

착각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여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사로서 베푸는 배려를 호의로 생각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았지만 편의대로 ‘착각’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그저 이렇게 혼자 그를 품다가 어느 순간이 오면 깔끔하게 정리하게 될 거였지만 그 ‘순간’이 그의 결혼이 될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열기를 더해 가며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투명 유리 주전자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국화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담갔다가 잠시 후 다시 꺼냈다. 젖어 버린 티백을 휴지통에 정확하게 조준하여 버렸다.

버려지는 것에 익숙한 채신희.

이젠 그녀가 버려야 할 차례였다.





#1. 7시 30분과 7시 30분



겨울과 봄의 중간. 그날도 애매한 계절이었다. 겨우내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던 가로수들이 이제 막 옷을 덧입으려 할 때였다. 몸무게의 상당 부분 비중을 차지하는 두꺼운 코트가 더는 필요치 않을, 그래서 몸보다 마음이 더 가벼워지는 그런 때였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학년,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분위기가 활기를 더해 주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그 활기는,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차츰 피곤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됐던 긴장이 오후가 되자 불안감과 강박증으로 변해 갔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나열된 화분을 다시 점검하고, 거울의 각도를 조절했으며, 책상을 두 번 세 번 닦았다. 그래도 부족한 마음에 창문의 블라인드를 몇 번이나 내렸다 걷었다를 반복했다.

그 긴장은 신사동 사옥으로 발령이 난 후 첫 출근이지만 아직 권영모 본부장을 대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됐다. 신차 출시를 앞두고 선우모비스, 선우파워텍, 선우다이모스 임원진들과의 회의가 하루 종일 릴레이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 본부장이 무척 바쁜 사람이어서 그다지 피곤할 일은 없을 거야.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 날도 많다는 소문이 있더라구. 힘내, 채 대리.’



그녀가 속한 홍보 3팀의 팀장이 신희의 발령 소식을 접하고 건넨 위로의 말이었다. 홍보본부의 끄트머리에 위치하여 그저 사보를 제작하는 두어 달만 반짝거리며 바쁠 뿐인 한가로운 직장 생활을 영위하다가, 갑자기 사옥까지 옮겨, 그것도 본부장실의 비서로 발령받았으니 헬게이트가 열렸다 생각했을 것이다.

모두들 신희의 발령을 의아하게 받아들였지만, 신희 자신만은 그 이유를 짐작할 듯했다. 연말에 제작된 사보에서 <선우 인(人)과 술의 상관관계>라는 기획 기사가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에 직장 생활이 얼마나 차지하는가가 주요 골자였다. 어쨌든 직원 모두 공감한 인기 기사인 셈이었다.

보무당당하게 신사동 사옥으로 옮겨 왔지만 권영모 본부장의 현란하고 화려한 이력은 여전히 신희에겐 부담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와 본사에 입사, 2년간 전략기획본부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고 디트로이트 지사로 날아가 3년간 기획팀의 팀장으로 있었다.

그가 3년 동안 디트로이트 지사에 안겨 준 매출액은, 지난 10년간의 매출액에 필적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 초 신사동 사옥 마케팅본부장으로 발령받아 일약 초고속 승진 한 것이다. 젊은 나이고 어떤 학연이나 지연도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이룩한 성과여서 선우자동차그룹 역사에 길이 남을 존재로 부각됐다.

자자한 명성만 들어 왔던 그의 직속 부하 직원이 된 지금, 신희의 머릿속은 암전이었다. 얼른 집으로 가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만 싶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출근 첫날이니 얼굴을 보고 퇴근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의무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곤 있지만, 그냥 가 버릴까 하는 마음도 반쯤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을 챙겨 들려 하던 그녀는 문득 들려온 구둣발 소리에 손길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비서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영모가 보였다.

사보에서, 그리고 로비의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연혁 표에서 익히 보았던 얼굴이었다. 단정한 스포츠형의 헤어스타일, 반듯하게 누운 눈썹 아래 적당한 크기의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꽉 다물린 입술 끝이 비틀리고 미간이 구겨져 있는 것만 빼면 여직원들의 환호와 경외심을 충분히 받을 만한 외모라고 생각됐다.

신희는 다급히 자리에서 나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영모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는 여의도 사옥에서 일할 때 몇 번 본 적 있는 선우다이모스의 기술팀장이었다. 불만족스럽게 일그러진 영모의 눈매와 쩔쩔매며 뒤따라오는 기술팀장의 표정으로 봤을 때, 회의가 탐탁지 않게 끝난 모양이다.

그는 신희를 흘깃 보더니 그녀의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았다. 그러곤 손에 들린 태블릿을 신중하게 들여다본다. 기름한 손가락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비서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고 신희의 어깨에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채신희 씨?”

묵묵하고 낮은 음성이 태블릿 화면을 향한 채 내뱉어졌다. 신희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제 소개를 했다.

“네. 본부장님. 여의도 사옥 홍보팀에서 발령받아 온 채신희입니다.”

“브로슈어만 봤을 땐 파워 트레인에 무게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 특히 14번은 가장 많이 쓰일 제품인데 동일 제품의 재작년 제품과 비교해 0.1이나 무게가 초과돼요. 밥은 먹었어요?”

뭐지? 이 맥락 없는 흐름의 질문은?

여전히 태블릿에만 시선을 둔 채 흘러나온 영모의 질문에, 신희와 기술팀장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분명 둘 중 하나에게 던진 질문일 텐데 그 대상이 누군지 갈등하는 눈빛을 서로에게 보냈다. 기술팀장이 먼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라티오 함량을 늘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함량과 무게 배분이 부적절합니다. 기술 쪽으로 한 번 더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배고프지 않아요? 하루 종일 긴장했을 텐데?”

신희는 그제야 앞선 질문은 기술팀장에게, 뒤 질문은 자신에게 건네고 있음을 깨닫곤 황급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본부장님.”

“해결책은 언제까지 보고 가능합니까? 직원 식당 저녁 메뉴가 괜찮던데 내려가서 먹어요.”

“글쎄요. 우선 회의부터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밥 생각이 없습니다.”

“일주일 안에 보고서와 브로슈어까지 새로 만들어 오세요. 그러지 말고 내려가요. 나하고.”

“알겠습니다.”

“아……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