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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샅샅이 들여다보듯 살피는 이환의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머릿속이 먹통이 된 것 같은 재희는 어서 이곳을 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윤재희.”

“…….”

“윤재희 씨.”

“…네 팀장님.”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이환은 너무도 정중하게 존칭을 쓰며 손을 내밀었고 재희는 망설였다.

“윤 대리는 상사의 인사를 거절합니까?”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억지로 내민 손을 꽉 움켜쥐는 이환의 손이 몹시도 뜨거웠다.



***



불량 제품 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종일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재희는 목덜미가 뻐근한 것 같아 손을 들어 올리다 말고 팀장실 팻말이 붙은 문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앉아 있는 이환의 모습이 보였다.

“…….”

저 남자가 팀장이라니.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늘 해 오던 일에서도 실수를 연발했고 오후가 내내 엉망이었다. 앞으로 겪게 될 일들에 대한 난감함이 무겁게 그녀를 덮친다.

일방적으로 둘의 관계를 끝냈던 그날 이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를 꽤 많이 만났었다.

어떤 때는 미리 요일과 시간을 정해 만나기도 했었고 어느 날은 불쑥 걸려 온 전화에 서둘러 달려가기도 했었다.

만날 때마다 한 거라고는 대부분이 섹스뿐이었지만 시간이 그저 지나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우습겠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도 추억이라는 것들이 생겨났다.

더욱이 처음엔 그저 암담한 현실에 부딪혀 마주한 유일한 탈출구 같았던 남자는 함께하는 시간 동안 제멋대로 가슴으로 들어와 버렸다.

딱히 어느 순간이었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가랑비처럼 천천히 스며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마음 깊숙이 그를 담아 버린 후였다.

그런 마음을 깨달아 버린 후 그와 함께한 순간들은 더 이상 그냥 지나쳐지는 것들이 되지 못했다.

그를 기다리며 들었던 음악과 나란히 차를 타고 달리던 때에 떨어지던 별똥별. 가까이 다가서던 그에게서 맡아지던 남성용 화장품 냄새. 미련한 윤재희는 그런 것들조차 여전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가장 힘이 들었던 건 잠들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가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귓가에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제 몸을 파고들던 강인한 사내의 몸과 온몸을 전율하게 만들던 시간이 제멋대로 떠올라 한참 동안 몸을 뒤척이고는 했다.

강이환이란 사람에게서 남자를 알았고 그에게서 남녀 사이의 가장 친밀한 행위인 섹스를 배웠다. 서툴고 아무것도 모르던 여자는 오르가즘을 알아 버렸고 그로 인해 자신이 너무도 타락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남자가 직장 상사라니….

그때였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일에 열중하고 있던 이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조차 짙게 느껴지는 눈빛과 진지한 표정. 눈빛이 얽혔을 때 재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얽힌 사이가 되었을까.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앞으로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



새로운 팀장이 온 기념으로 가볍게 저녁이나 먹자는 제안에 부서 사람들 전체가 퇴근 후 회사 근처 고깃집으로 향하였다.

지글지글 숯불 위에서 익어 가는 고기는 맛있는 냄새를 풍겨 댔고 사람들은 흥에 겨워 잔을 부딪쳤다.

“팀장님. 술은 좀 하십니까?”

재희의 옆자리에 앉은 조인국이 벌게진 얼굴로 술병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이미 술잔이 몇 차례 돌아간 후였다.

“남들 마시는 만큼은 마십니다.”

“오오오. 역시 남자십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의 잔에 술이 채워지고 조인국이 건배를 제안하자 일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진다.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연기를 타고 홀 안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즐거운 가운데 재희만 심각한 얼굴로 잔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엔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이게 몇 잔째인지 모르겠다. 이미 주량 초과다.

“윤 대리님,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누군가의 걱정 어린 말에 재희는 흐리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술이 찌르르하다.

이미 주량을 넘긴 탓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쓰디쓴 뒷맛에 인상을 찡그리며 잔을 내려놓는데 멀리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이환과 눈이 마주쳤다.

“…….”

오후 근무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른다. 하긴, 좁은 사무실에서 안 마주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이 상황이 영 불편한 재희와 달리 그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윤재희 씨, 윤재희 씨.



높낮이가 일정한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윤 대리, 뭐 해? 팀장님 한 잔 드리지 않고?”

정신을 차려 보니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재희는 지금껏 직장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는 능력보다도 인간관계라고 여겼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던 선배들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저 남자 강이환 때문에.

재희는 조인국이 내민 술병을 받아 들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내색하지 말고 지내야 했다. 제가 어떤 기분이든, 그가 과거에 자신과 어떤 사이였든지 말이다.

술판은 이내 다시 흥겨워졌다.



10시가 가까운 시간. 아쉬움이 남는 사람들이 2차를 외쳐 댔지만 회식은 거기에서 끝났다. 차를 가져온 사람들은 대리 기사가 도착하자 각자 집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어 차로 향했다.

“참, 윤 대리는 같은 방향이 누구더라?”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던 조인국이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물었다. 모처럼의 과음으로 어지러워하던 재희는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국을 바라보았다.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그럼, 택시 잡아 줄까?”

“윤 대리는 내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나랑 같이 갑시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틀자 이환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재희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다.

“오오. 팀장님이 데려다주신다면 저희야 안심이죠. 재희 씨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봐요.”

“팀장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억지로 떠밀리듯 이환에게 맡겨진 후 사람들이 전부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만 남게 되자 재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환에게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세요. 저는 택시 탈게요.”

도로는 달리는 차량들로 복잡했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 차량이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타. 데려다줄게.”

귓가로 스며드는 낮은 저음. 재희를 내려다보는 이환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팀장님.”

“아무도 없을 땐 편하게 불러.”

“…아뇨. 전 팀장님으로 부르는 편이 더 편합니다.”

“그놈의 고집은 여전하네.”

쓸쓸한 눈웃음을 지을 줄 아는 이 남자와 이렇게 서 있는 게 낯설다. 종일 참고 있던 질문이 더는 참아지지 않고 흘러나왔다.

“저 여기 있는 거 알고 오셨어요?”

“아니.”

“정말 모르고 오셨어요?”

이환은 잔뜩 취한 채 따지듯 고개를 추켜든 재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재희의 고집스러운 눈빛에 그의 한숨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맞아. 알고 있었어.”

“…….”

“내가 여기 온 게 뭐 문제라도 되나?”

“듣자 하니 오라고 하는 곳도 많았던 모양이던데 대체 여길 왜 왔어요?”

따지듯 묻는 재희를 지나쳐 이환이 성큼성큼 차로 향하더니 문을 열고 명령조로 말했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

“대답 듣고 싶다며.”

고갯짓을 하는 이환의 태도를 보고 있으려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타라면 누가 못 탈 줄 아나. 재희는 그를 노려보며 보란 듯이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