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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미하일이 저 여자에게서 눈을 못 떼네.”

“저 여자의 매력이 뭘까?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어린 여자애를 좋아하나?”

“하여튼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다니까.”

‘나, 그렇게 어리지 않거든?’

야나는 여자들의 말도 안 되는 얘기들에 짜증이 났다. 원래 그 자리에 없으면 대통령도 욕할 수 있다지만 사람 있는 곳에서 욕하는 건 뭔지. 마치 미샤와 그녀가 원조교제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살이기에 스물다섯이 어리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자꾸 보니까 저러잖아.’

그녀의 암묵적인 시비를 알아들은 걸까, 그의 눈썹이 잠깐이나마 올라갔다가 내려가더니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 하나 없이, 목소리 높낮이 변화 없이 일정하게 사람들을 응시하며 자기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마치 깎아 놓은 얼음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그의 표정은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그녀에게 다른 모습과 표정을 보인다는 자체가 극히 개인적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확신했다.

‘하여튼 두 얼굴의 사나이라니까.’

야나는 그런 미샤를 보면서 조금 전 의상실에서 그렇게 환희를 맞이하며 비명을 지르던 그 남자가 맞나 싶었다. 그의 무엇이 저런 가면을 쓰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미샤의 저런 모습이 야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로봇이 따로 없네. 아, 지겹다.’

그의 무표정함과 냉정함이 서린 연설을 경청하고 있던 야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경제 얘기에 금방 싫증났다. 그녀를 보고 있던 미샤가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으레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젓는 게 보였다.

‘설마, 졸길 바라? 아, 몰라.’

일부러 설탕같이 달콤한 시선을 던진 야나는 그에게 살짝 혀를 내보이곤 작은 가방에 넣어 온 책을 꺼내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놓았다.

“와, 강적이다.”

“왜?”

“미하일이 데리고 온 여자 말이야.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책을 꺼내 보고 있잖아.”

“미하일은 어디서 저런 창피한 여자를 데려왔을까?”

‘창피한 것 좋아하시네. 너희들처럼 다른 사람 욕할 시간에 지식이라도 쌓겠다는 데 뭐가 어때서? 흥!’

야나는 그녀의 행동에 또 수군거리는 여자들에게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당당하게 책을 펼쳤다. 그렇지 않아도 미샤와 만나느라 공부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 이번 시험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석이조다 싶었다. 과제야 그럭저럭 했다 쳐도 점점 횟수가 늘어가는 그의 방해공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차였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도 일단 그녀의 몸에 그의 손이 닿으면 생각이란 걸 하기 힘들어 책을 꺼내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 혼자만의 욕망이나 감정이 아니니 뿌리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봐요?”

“……?”

야나는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음성에 그냥 그러거니 생각하고 글자를 계속 흡수해갔다. 그런데 책 옆에 기다란 손가락이 톡톡톡 치는 게 보였다.

“미하일하고 함께 온 아가씨 맞죠?”

“네? 아, 네. 맞아요.”

“안녕? 난 니콜라이 사하로프.”

“네, 전 야나 한입니다.”

그녀는 의자를 당겨와 아는 척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날카로운 눈매와 지적인 콧날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그녀를 향해 웃고는 있어도 입매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다정하게 말을 걸고는 있어도 뭔가가 거부감이 들게 했다.

“한이라면 혹시 한국 사람?”

“네, 맞아요.”

“그럼 서울 살아요?”

“아, 네. 그런데 서울을 어떻게 아세요?”

“작년에 사업차 다녀왔었거든요. 경복궁이나 인사동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좋은 곳만 골라 다니셨네요.”

야나는 니콜라이가 한국이 아닌 서울을 아는 체 해오자 반가움에 경계심을 살짝 풀었다. 갑자기 서울에 가고 싶고 엄마, 아빠를 보고 싶어졌다. 서울이란 단어만 들어도 그립고 좋은 걸 보면 그녀도 향수병을 가지고 있긴 한 모양이다.

“한국에 안 가고 싶어요?”

“사하로프 씨가 말씀하기 전까진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들으니까 갑자기 가고 싶어지긴 하네요.”

“아, 미안해요.”

“아니에요. 외국에 나와 있으면 다 똑같죠 뭐.”

그녀에게 러시아를 외국이라고 하면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태어난 곳은 이곳이고 한국에선 자랐다 해도 여긴 고향 같은 느낌이 없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았어도 다른 생김새에 다른 생각,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는 한국 사람들만의 끈끈한 동질감이 형성되지 않았다.

“미하일과는 어떤 사이예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인데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만났어요.”

“어떤 사이예요?”

“네? 그런 건 왜 물으시죠?”

그녀는 그제야 한국에 대한 향수병을 일깨우고 옆에 있는 니콜라이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우중충한 날씨처럼 낮게 일렁이는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그녀의 경계심을 불러왔다. 한국을 말하며 가깝게 다가온 것 자체가 이제야 의심스러웠다.

“난 미하일의 친구인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너와 내가 친구였나?”

미샤는 연설을 하는 동안 야나가 보고 있어서 신경과 몸이 간질거리는 것도 같고 왠지 가벼워진 느낌이 드는 게 이상야릇했다. 야나가 책을 꺼내 그를 외면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주 보란 듯이 책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공부에 정신없이 빠져들 땐 오히려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를 보면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앉아 유혹의 눈짓을 보내지 않는 여자라는 게,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여자라는 게 그를 뿌듯하게 했다.

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서운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헛갈렸다. 그에게 뭐가 나오길 기대하며 눈을 빛내는 여자들을 싫어했는데 야나는 그래 주길 바라다니, 이 무슨 이중적인 감정인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연설을 다 마칠 즈음 니콜라이가 야나에게 접근하는 걸 보자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입 안이 쩍쩍 말라왔다. 그에게 여유 있는 웃음을 던지며 야나에게 말을 거는 니콜라이의 입술을 당장에라도 짓뭉개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라도 그녀가 두 손바닥을 마주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걸 보자 목울대가 흔들릴 만큼 침을 삼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느껴질 때야 연설의 끝부분을 급히 마무리해 버리고선 단상에서 잽싸게 내려왔다. 자신의 여자에게 파리가 꼬이는 건 죽어도 못 본다.

“미샤?”

“내가 없는 동안 한눈팔았다 이거지?”

미샤는 야나의 옆자리에 털썩거리고 앉으며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둘러 확 잡아당겼다. 소유욕 가득한 그의 몸짓에 니콜라이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입매가 기분 나쁘게 위로 올라갔다.

‘저 녀석, 무슨 꿍꿍이지?’

니콜라이와는 아버지끼리 사업상 연결이 되어 있어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학교를 함께 다닌 것도 아니고 무얼 함께하는 사이도 아니니 친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로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니콜라이가 뿜어내는 섬뜩한 무언가가 그를 막았다. 그런데다 그가 만났던 여자마다 손을 뻗쳤으니 할 말은 끝난 셈이었다. 다른 여자들이야 니콜라이가 낚아채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야나만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한눈은 무슨. 사하로프 씨가 말을 시키기에 대답한 것뿐이지.”

그녀를 바람피운 여자처럼 대하는 미샤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녀가 처음 보는 눈빛으로 옆에 있는 니콜라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니콜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렇게 부를 일 없거든?”

“네가 왜 나서? 야나 씨가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뭐?”

미샤는 야나에게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니콜라이를 죽이고 싶은 잔인한 본성에 움찔했다. 자신에게 비정상적인 영향력을 펼치는 야나를 더 꽉 안고는 니콜라이에게 경고의 시선을 던졌다.

“둘이 친구 사이 아니야?”

“누가 그래?”

“아니었어?”

“아니야.”

“그럼 말 끝났네. 사하로프 씨? 하실 얘기 끝났으면 돌아가 주실래요? 이제 저희 둘이 있고 싶거든요.”

야나는 강인한 척 구는 미샤의 팔에서 잔잔한 떨림을 느꼈다. 이 싸늘한 남자가 자신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았다. 니콜라이가 그녀에게 서운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미샤의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귀에 달콤한 노래처럼 들리는 걸 보면 정신을 놓은 게 틀림없다.

“당신, 아이 같은 거 알아?”

“내가?”

미샤가 모른 척 양어깨를 으쓱 해보이곤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다정한 애정 표현에 따스한 호흡을 교류하며 야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의 애정 표현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 순간 여자들의 신음이 전염병처럼 옆으로 퍼져갔다.

“웃어?”

“응, 당신이 귀엽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알까?”

“뭐? 귀여워? 내가?”

“조금 전 사하로프 씨가 갈 때의 당신 표정을 직접 못 본 게 아쉽다. 사악하면서도 아주 귀여웠거든.”

아이처럼 이겼다고 어깨를 펴고 으쓱하는 게 과히 어른스럽진 않았어도 그가 좋아하니 그녀도 행복했다. 그녀에게 욕망만 가진 줄 알았는데 소유욕을 빙자한 질투를 보여주는 게 가슴에 스며들어 기뻤다. 혼자만 감정의 변화를 겪는 건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객쩍은 소리는. 네가 한눈만 안 팔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네.”

“바람이 별 거야? 다른 남자 보면 바람이지.”

“엑,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미샤는 나 만나고 다른 여자 한 번도 안 쳐다봤어?”

“그래.”

“진짜?”

그녀는 미샤의 무뚝뚝한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그의 눈빛엔 담긴 진실을 보자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졌다. 길 잃은 강아지가 어미 개를 찾은 것처럼 머리를 그의 팔에 문질러대며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그만하고, 많이 지겨웠어?”

“미샤는 안 지겨워?”

“지겹긴 하지.”

“그런데 왜 왔어?”

야나는 화제를 돌리려는 미샤에게 더 이상 독촉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그냥 던져 본 질문인데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이해 못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의 위치 정도에 있는 사람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아?”

“인생이 짧다고 이야기하기엔 네 나이가 너무 어리단 생각 안 해?”

“그래도 하기 싫은 건 안 해.”

“후후, 그런 네가 부럽다. 잠깐만.”

야나는 의자 뒤로 등을 기대며 허탈하게 말을 하는 미샤가 왠지 처량 맞아 보였다. 그리고 옆의 사람이 말을 걸자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돌려 대화에 집중했다. 가끔 울적해 보이는 미샤의 눈을 보면 그녀가 모르는 상처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누군가?”

“만나는 여자입니다.”

‘만나는 여자?’

히히, 미샤가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자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그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온 건 처음이라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소개할지 짐작해 둔 건 없었다.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함께 밤을 보내곤 있어도 그의 생각까진 나누고 있지 않으니 기대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미하일이 만나는 여자라고 밝힌 게 처음이지 않아?”

‘저 여자들 지겹지도 않나?’

야나는 미샤의 말 한마디에 또다시 수군거리는 여자들에게 혀를 차며 등을 돌렸는데도 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들은 척 만 척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두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하는 수준이 고등학생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그래, 맞아.”

“저 어린 여자, 혹시 섹스를 잘하나?”

“에이, 저 어린애가 하면 얼마나 잘하겠어? 미하일이 다 리드하겠지. 일일이 다 가르쳐서 하려면 고생깨나 할 걸? 저 어린 게 유혹이나 제대로 하겠어?”

“그래도 알아? 그 미숙함에 반했을지?”

여자들의 뒷담화를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니 자연스레 신경이 쓰여 화가 치솟았다. 세상에, 못하는 말이 없었다. 남녀 간에 꼭 섹스를 잘해야 관계가 이어지나? 서로 좋아서 만난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으이그, 저질 같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진짜 미샤가 나 때문에 고생하긴 하나? 저 인간들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아야 하는데 은근히 신경 쓰이네?’

“미샤?”

“왜?”

“있잖아, 나 때문에…….”

“잠깐만.”

‘으이씨, 궁금한데.’

야나는 한참 대화에 열중하던 미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사랑을 나눌 때 그녀가 미샤를 고생시킨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육체관계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해도 두 사람이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데 이 남자,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말을 받아 주지도 않고 쌩하니 고개 돌려 또다시 대화에 빠져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심각한데 그가 안 받아 주자 괜스레 삐딱해지면서 입가에 심술스런 미소가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