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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프잖아.”

“그러게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아주머니 일이 왜 남의……악, 아프다니까.”

“그 입 좀 다물어.”

“내 입 가지고 내 마음대로 말도 못해?”

“젠장!”

욕설을 내뱉은 미샤는 야나의 팔뚝을 던져 버리듯이 놓아 버렸다. 그녀의 온기를 대하고 있으니 가슴 속 어떤 감정 하나가 작은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 느껴져 불안했다. 그도 모르게 순식간에 스며든 정체 모를 감정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입 좀 다물라는데 왜 말을 안 들어먹는 건지.

“욕에 폭력까지? 미샤, 이런 사람이었어?”

“그만.”

“뭘 그만해. 욕은 왜 하고 사람은 왜 밀치는데?”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입 다물어.”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대는 야나의 입술만이 눈에 들어왔다. 도톰한 입술이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이 위험했다. 어떤 느낌인지 느껴 보고 싶은 충동이 자제심마저 가져가 버릴 지경이었다. 이미 주변에 누가 있는 건 중요치 않았다. 몸속의 아드레날린이 위험 수치까지 올라가 저릿했다. 혈관을 따라 퍼져가는 열기를 잡으려 통제력을 끌어 모으려 애를 썼지만 저놈의 입술이 가만히 있지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후회는 무슨? 내가 기억하던 미샤는 겉으론 냉정하게 굴어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어? 미샤?……흐흡…….”

“제기랄!”

야나의 팔을 확 잡아당겨 다른 한 손으로 뒤통수를 단단히 잡아 눈을 어지럽히는 것부터 시선에서 차단했다. 야나의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에 눈 밑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밀쳐내는 그녀에게 가슴이 떠밀려 얼굴을 들었다.

“왜…… 이래?”

“후회한다고 했지?”

“그래도 이건……으음.”

기습적인 키스에 당황한 야나는 그의 얼굴이 다시 다가오자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쏘아보는 듯 강렬한 미샤의 눈빛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점령해 버렸다. 세상에, 미샤가 키스를 하다니.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 그만 눈이 뿌옇게 초점을 잃어갔다. 입술을 날름 핥는 그의 혀에 얼굴이 점점 달아오른 야나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입을 다물라고 하긴 했어도 이런 방법으로 말을 못하게 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미……헉.”

어떻게든 그에게 이성을 찾아주려고 말을 꺼내려는데 불쑥 물컹한 혀가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들과의 스킨십이라고 해봐야 장난으로 볼에 뽀뽀하는 것이 전부라 이런 깊은 키스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의 혀가, 그것도 미샤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를 잃고 뜨거워지는 육체의 반응에 놀란 야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세상에!’

눈을 뜬 순간 관능으로 촉촉이 젖은 미샤의 눈에 할 말을 잃었고, 빚은 듯 오뚝한 코가 그녀의 볼을 툭툭 건드릴 때마다 목이 탔으며 욱신거리는 입술의 감촉엔 정신이 사나워졌다. 미샤는 그녀의 복잡한 심경에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님 키스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녀의 혀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가 혀를 씹을 때마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 어질어질했다.

척.

“윽.”

그의 혀가 입 안에서 빠져나가는 소리가 너무 적나라해 얼굴을 붉히던 야나는 미샤의 굶주림 가득한 시선에 얼굴을 살짝 돌려 피했다. 이 느낌은 뭐지? 분명 창피한데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뭐냐고?

“……놔줘.”

그가 전해 주는 진한 열기에 델까 두려운 야나는 막힌 목을 겨우 뚫고 미샤에게 요구했다. 삼킬 듯이 자신을 보고 있는 미샤의 눈빛이 수상했다. 힘이 빠지고 뱃속이 울렁거리는 그녀의 몸 상태가 불안해 당장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할짝할짝.

그의 얼굴이 또 사라짐과 동시에 입술이 물컹한 혀에 이리저리 치이고 핥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표물을 정한 뱀처럼 그녀를 사정없이 파고드는 그로 인해 치아와 입 안의 부드러운 살집이 점령당했다. 부끄러움을 넘어선 깊고 야릇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기분이 들었다. 야나는 그가 주는 이 낯선 느낌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싫지 않아 또 한 번 당황스러웠다.

“음.”

미샤는 경고성 띤 키스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을 막으려던 그의 의도가 남자로서의 본능에 그 목적을 잃었다. 이성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느라 바빴다. 장난이 아닌 그의 수컷으로서의 욕구가 무섭게 일어서서 반응한 행동이라 남달랐다. 아무래도 남녀 간의 관계를 다시 정의 내려야 할 판이었다. 눈으로 야나의 달라진 면을 봤을 때와 키스를 하고 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아무래도 그녀와 여기서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무섭게 발동했다.

‘이래선 안 되는 일인데.’

한 가닥의 이성이 그의 급작스런 감정에 반기를 들어 야나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게 만들었다. 후회라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그가 그녀의 입술의 온기를 잃자마자 바로 그 감정을 느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의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한 여자는 단연코 한 명도 없었다.

야나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강하게 잡아당기는 걸까?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굴어서? 그가 가진 재산을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면 그와 어머니의 관계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여자라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그녀를 더 붙잡기를 원했지만, 그의 날카로운 이성은 지금 이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우우우우우.”

“이……나쁜…….”

“경고했잖아.”

주변의 야유가 두 사람을 감싸고 야나가 얼굴을 붉힐 무렵 미샤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혼란스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에게 양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여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 노력도 다 허사였다. 분노의 표출로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는 그녀의 가슴이 급격하게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걸 보는 게 너무 어지러웠다. 얼굴을 예쁘게 붉히고선 어떻게든 가쁜 숨을 정리하려고 붉은 혀를 빼어 무는 것을 보자 그의 호흡마저도 거칠어져 버렸다.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 위를 야나의 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는 그의 목울대가 심하게 울렁거렸다.

“미친……뭐야? 왜 또 다가와?”

“원한다면 더 해줄 수도 있어.”

“됐거든.”

“그럼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겠지?”

“칫, 저질.”

“하하하.”

야나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어여쁜 입술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는데도 그는 웃음만 났다. 그녀의 비난 어린 눈초리에도 기분만 좋았다. 도망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한참을 웃던 미샤는 주위의 시선에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모시고 올까요?”

“아니 됐어.”

“야나 아가씨가 예쁘게 자라셨어요.”

“…….”

야나를 기억한 발레리의 말을 인정하기에 미샤는 침묵을 선택하곤 소란스런 주변을 무심한 듯 쳐다봤다. 야나가 그의 사라진 과거를 들춰낼 수도 있는데도 미샤는 태어나 처음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파헤쳐 볼 심산이었다. 어쩌면 그의 입술을 적셔 주었던 그녀의 촉촉함을 더 느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야나를 또 만나야 했다.

“미샤.”

“……!”

야나의 등장에 여기 왜 왔는지 잊고 있었던 미샤는 올가의 파리해진 낯빛에 잠깐이나마 풀어졌던 표정이 다시 얼었다. 이젠 어머니가 버리고 갔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갈기갈기 찢어졌던 가슴만 생각하면 더 차갑게 굳어 버린다.

얼마나 오랜 시간들을 오열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짐작이나 하실까? 그 큰 집에서 아버지는 방치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으며 버텨온 시간들을 짐작이나 하실까? 미샤는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증오했고 기계처럼 대한 아버지는 더 증오했다. 어머니가 새 삶을 찾아 웃고 행복해 하는 동안 자식인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통은…… 미샤는 심장을 좀먹는 고통을 누른 후 울먹이는 어머니를 냉정히 외면했다.



*



찬바람이 쌩 불 정도로 차갑게 멀어지는 미샤를 향해 혀를 찬 보베가는 무너지려는 올가를 잡아챘다. 아들에 대한 외사랑이 참 눈물겨웠다.

“올가, 그만 울어.”

“신문이 아닌 눈앞에서 미샤를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저리 차갑게 구는데도?”

나쟈 보베가는 아내인 올가를 품에 안으며 눈물을 흔적 없이 닦아 줬다. 아들인 미샤가 신문에 나온 날이면 거실이 온통 신문으로 뒤덮여 너저분해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아들이 그리워, 아들이 자랑스러워 미샤에 대한 조그마한 기사라도 나오면 전부 스크랩을 해 모으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알기에 뭐라 말하진 않아도 혹시라도 아내의 그리움이 상처가 될까 걱정스러웠다.

17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는……제 엄마에게 상처나 주고, 쯧쯧쯧.

자식은 어머니를 버릴 수 있어도 어머니는 자식을 버릴 수 없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래도 날 보러왔잖아요.”

“속을 뒤집으러 온 거겠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보베가의 투덜거림에 축축한 얼굴을 닦아낸 올가는 입가를 부드럽게 풀고는 남편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 누가 되었건 미샤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젠 미샤에게도 진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어?”

“내 말을 믿어 줄까요?”

어쩌면 미샤가 지금 그대로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선 상처는 그녀가 다 가지고 싶었다.

“언제가 되었든 알게 될 일이야.”

“날 더 원망하는 건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미샤의 의견은 반영된 것이 아니니 원망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결정이었다 해도.

“당신이 계속 나쁜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난 미샤만 괜찮다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좋아요.”

“그렇게 좋아?”

보베가는 조금 전까지 울었던 아내의 입가에 어린 잔잔한 미소에 기쁘게 웃었다. 그동안에는 웃어도 늘 그늘이 느껴져 마음이 무겁더니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 조금 전 야나를 보고 웃는 미샤 얼굴 봤죠?”

“그래, 의외더군. 야나와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나?”

“야나 엄마가 모스크바 대학에 교수로 있을 때 우리 집에 자주 들락거렸죠.”

“미샤가 야나를 좋아했었나?”

신문이나 뉴스에 오르내리는 미샤의 이미지만 놓고 봤을 때, 야나가 어떤 식으로 도발을 해도 안 넘어갈 것 같더니 의외로 쉽게 무너져 놀랍긴 했다. 미샤의 아버지인 세르게이의 성격이라면 야나처럼 행동한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가슴에 희망이 생긴다.

“그건 잘 모르겠고, 야나를 꽤 신경 쓰긴 했었죠.”

“그래?”

“네, 그런데 야나가 많이 놀랐을 텐데 어디 갔나 몰라요.”

“울 타입은 아니니까 걱정 마.”

“미샤가 심했잖아요.”

올가는 미샤가 야나를 보는 시선에서 조금의 희망을 보았다. 직접 얼굴을 보진 못해도 아들 녀석이 점점 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아들과 헤어져야 했지만 단 하루도 미샤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미샤가 좋은 아내를 만나 그녀가 주지 못한 행복을 느끼길 바랄 뿐이었다. 올가는 조금 전 아들이 야나에게 보인 반응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곤 혼자만의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