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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서재의 소파에서 차분히 책을 읽던 남자아이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질 무렵 남자아이는 보던 책을 덮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창가로 다가가 웃음의 근원지를 찾았다.

“넌…….”

별 하나 뜨지 않는 어두운 밤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우울할 때 듣기만 해도 기분이 풀리는 웃음을 가진 여자아이가 정원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져버린 여자아이의 존재에 늘 그래왔듯이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에서 왔다는 어머니의 친구가 딸을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여자아이가 자신을 보던 눈빛이라니……. 신기한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더니 덥석 안기는 것이 아닌가. 그날 이후로 그 여자아이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것인지 친한 척 굴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아내는 것인지 그가 어디에 있든 눈앞에 등장하고는 했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인상을 찌푸리면 겁을 먹은 듯 물러서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입술을 삐쭉거리며 자리를 피했으며, 혹시라도 귀찮아져 소리라도 지르면 울면서 도망가고, 옆에 있든 없든 책만 쳐다보면 화가 나 가버리는데 이 아이는 달랐다.

일단 자신을 ‘도련님’으로 대하지도 않았고, 소리라도 지르면 두 귀를 잡고 더 크게 소릴 질러 기함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화를 내면 미간을 손가락으로 펴는 대담함까지 가진 여자아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말든 여자아이는 곧잘 재잘댔고, 간혹 대답이 필요한 질문을 했을 땐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달라붙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는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면 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머니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태도에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자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마주하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예쁘죠?”

“…….”

남자아이는 옆으로 다가온 경호원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밖에 나가 아가씨랑 같이 있으세요.”

“…….”

“도련님?”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하루에 소화하기엔 빡빡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도련님이 늘 안타까웠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회장님이 짜놓은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바빠 친구들과 노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들 도련님보고 선택 받은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그가 보기엔 사육 당하는 동물에 불과했다.

그런 도련님의 눈빛이 여자아이가 드나들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시계를 힐끔거리지를 않나, 쉬는 시간이면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처럼 선생님에게 핑곗거리를 대곤 집 안을 살펴보질 않나, 방해 받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여자아이가 거실에 들어오면 무심한 척 책을 보기도 했다.

나중에야 도련님이 여자아이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쓴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은 처음이고 기쁜 일이기에 여자아이가 도착하면 바로 알려 드렸는데, 매번 평소와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지금도 여자아이에게 가고 싶은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건조하고 메마른 어조로 거절하니 안타까움을 지나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운 것도 탈이라면 탈이었다.

“밖에 나갈 시간 없어.”

“잠깐이라도…….”

“됐어.”

잘 숨기고 있다 생각했는데 경호원에게 들키니까 갑자기 부끄러움이 온몸에 밀어닥쳤다. 집 안에는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눈이 있어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경호원 눈에는 자신의 감정이 보였나 보다. 하긴 산속 깊이 버려진 무덤처럼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 집 안에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아이가 나타났는데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참으려 해도 눈이 저절로 여자아이에게로 향하는 것을.

“오늘 아버지 들어오시나?”

“아침에 출장 가셨습니다.”

“후후…….”

남자아이의 입에서 비웃음기가 담긴 미소가 흘러나갔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위기가 온 것 정도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복잡한 여자관계를 자랑하는 아버지를 못 견뎌하는 어머니가 언제쯤 항복할지 알 순 없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한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어머니를 따라 이 집을 벗어날 수 있다면,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지겨운 후계자 수업 따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니 좋을 것 같았다.

“도련님?”

“저 아이가 왜 눈에 들어왔는지 알아?”

“…….”

그의 대답을 원하지 않는 질문임을 알기에 두 입술 꾹 다물고 도련님의 미소 어린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몇 년 동안 웃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저 아이만 보면 웃으시잖아.”

“……!”

도련님의 애잔한 말에 그간 겪었을 심리적 고통이 느껴져 목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회장님의 일이라면 집안사람들도 쉬쉬하고 있었지만, 두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모르겠는가. 사모님을 버젓이 옆방에 두고서도 다른 여자들을 집에까지 데리고 들어와 자는 행동이 벌써 몇 해였다. 게다가 아들이라고 해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 우습지?”

“아닙니다.”

발레리는 목소리에 감정을 싣진 않았어도 마음은 불편해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열세 살짜리가 할 소리인가 말이다.

“꼬맹이!”

조금 전까지 밖에 나갈 시간이 없다고 냉정히 굴던 남자아이였건만, 여자아이가 정원에 있던 나무에 발이 걸려 넘어져 울기 시작하자 과감히 몸을 돌렸다. 서재 문이 쾅 닫히고 아래층으로 달려가는 남자아이의 발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처럼 재빨랐다. 남자아이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이 정원 입구에서 딱 멈춰서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으면 좋다고 하시지.”

남자아이의 등장에 두 눈이 토끼 눈이 되도록 울어대던 여자아이의 울음이 정말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그리곤 남자아이에게 두 팔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잠시 난감해 하던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재촉하듯 두 팔을 살짝 흔들자 군말 없이 몸을 내어줬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가슴에 냉큼 안겨 들어서는 목에 얼굴을 묻고 잠시 울더니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남자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던 웃음소리를 가슴까지 전해지도록 아주 예쁘게 웃었다.





#1. 다시 나타난 말칙(꼬맹이)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조명들이 온 세상을 밝힐 만큼의 빛을 내고 있는 공간을 그와 그의 뒤를 따르는 남자 둘이 채우고 들어섰다. 연회장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떠들썩했지만 그의 관심 사안은 아니니 따로 시선을 두진 않았다.

그가 이런 파티 장소에 나타난 것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은 와야 했다. 벌써부터 그를 발견해 가까이 다가오려는 무리들이 보이자 치미는 짜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경호원인 발레리가 있으니 그에게 달라붙을 인간들은 없을 테지만. 그런 관심들이 지겨워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 여기 오게 만든 사람 앞에 섰다.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보러 오는 일이었다.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 그의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학장님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보베가 씨.”

“미하일?”

그는 파티 좌석의 상석이자 오늘의 주인공인 남자 앞에 당당히 서서 예의에 한 치 어긋남 없이 인사를 전했다. 그의 등장에 주변이 들썩거리며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향한 놀란 시선들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두 남자가 악수를 하는 사이 그의 콧속으로 익숙하다 못해 가슴에 사무친 향기가 진하게 스며들었다. 습관적인 기억이 그 향을 기억하는지 가슴이 벌렁거리려 하자 그는 눈에 힘을 주며 과감히 차단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참아내야 했던 그리움이 증오로 변해 버린 것을 어머니는 아실까?

“미샤……?”

“……!”

어머니의 애타는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깊이 파고들어 왔다. 이미 켜켜이 쌓여 더 찰 곳 없는 기억 창고가 고통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견뎌낼 것이다. 어머니가 없던 세상을 혼자 힘으로 버텨냈으니 이런 쓰라림쯤은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

“오, 세상에. 미샤.”

“어머니가 알던 미샤는 이미 17년 전에 죽었습니다. 전 미샤가 아니고 미하일 빅토르비치 보예보츠키일 뿐입니다.”

몸속 깊은 곳에 있는 고통을 끄집어내듯 어금니를 사리문 그는 얼음이라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어머니와 어머니의 남편인 보베가를 쳐다봤다. 한 남자의 옆에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있을 때보다 행복해 보이긴 했다. 자식이라면 어머니가 행복하니 기뻐해야 할 테지만 그의 상처 입은 가슴은 삭막한 사막처럼 바짝 말라 버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넌 여기 오면 안 돼. 네 아버지가 알기라도 하는 날엔…….”

“후…… 아버지와 어떤 약속이 있었던 모양인데, 제가 무서워할 것 같습니까?”

어머니의 겁먹은 모습에 울컥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인상을 팍 썼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떤 제안을 했을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라면 그에게서 어머니를 빼앗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가 무섭다고 어떻게 자식을 17년 동안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미샤…….”

“전 그저 인사만 드리러 온 거니까 그런 표정 그만 지으세요.”

“그래, 미하일. 인사하러 와 줘서 고맙네. 그동안 유럽에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제 소식을 아신다니 의외네요.”

어머니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옆 눈에 스치자 흔들리려는 감정을 들킬세라 이를 악물며 내씹었다. 거대한 산 같았던 아버지와 혼자 싸워야만 했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흑흑.”

“올가?”

‘어머니, 아프신가요? 그 고통 속에 저만 두고 나오셔서 행복하시던가요?’

기어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향해 무언의 질문을 던진 그는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어쩌면 그는 울고 있는 모습이 아닌 뻔뻔한 모습을 기대한 건지도 모른다.

“제가 와서 파티를 망친 모양이니 불청객은 이만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미하일, 내게는 뭐라 하든 상관없네만 자네 어머니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말게. 자네로 인해 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야.”

“지금 절 탓하시는 겁니까?”

“그러지 말고…….”

“보베가 씨 눈엔 자식을 버린 어머니의 상처는 보이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의 상처는 안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17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 이렇게 질책 받을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미샤는 자신을 향한 곧은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차갑게 내쏘았다. 흐느껴 우는 어머니도, 그런 어머니를 감싸 안으며 자신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보베가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라져 버린 어머니를 찾는 심정이 어떤 줄이나 알고 지껄인단 말인가. 상처는 성장해 나가면서 무뎌지고 사라지는 줄 알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버림받은 기억은 자라는 동안 그에게 악몽으로 다가와 매일 괴롭히는 것으로 모자라 그의 자아를 짓밟아 버렸다.

‘뭐지?’

비어 버린 가슴속에 잔인한 기억의 편린들이 자리 잡기 전에 털어 버리려 고개를 젓던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머니에게 다가서는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 여자가 이상한 감정을 담은 오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만난 여자가 아닌 건 분명한데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어머니를 안으며 그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봤을까? 어? 발레리가 왜 놀라지?

옆에서 숨을 들이켜는 발레리를 힐끔 한 번 쳐다보곤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혀 때가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맑은 눈동자가 그의 신경을 묘하게 긁어댔다. 그의 차디찬 눈빛을 끄떡없이 받아내며 여유 있게 웃는 여자의 당찬 성격에 호기심이 발동한 미샤는 눈썹을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