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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에메랄드 컷, 솔리테어, 클래식 4프롱.”

꽈배기를 한입 더 깨물어 씹었다. 하나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에메랄드처럼 직사각으로 커팅해, 네 개의 누름발로 잡아 반지를 만들었단 뜻.

“웨딩밴드까지 세트가 8천만 원대는 받으시겠네. 그중 삼분의 일은 로고값이고.”

남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송아는 몇 발짝 뒤를 의식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계속 뱉었다.

“퍽이나 잘 팔리겠다. 여기가 맨해튼인 줄 아나? 아무리 커팅법에 특허를 받아도 그렇지. 라운드 쓰리 스톤 반지는, 9천만 원대. 완전 도둑놈의 시키!”

남자의 오른쪽 눈썹이 싸악 치켜졌다. 그는 팔짱을 끼고 송아를 예의 주시했다.

“브릴리언트 컷, 사파이어 채널 스타일, 요건 1억 2천만 원대쯤? 이딴 걸, 도대체 누가 끼라고 만들었니?”

그러나 곧 “흐흠!” 참지 못하고 등 뒤에서 기척을 냈다. 송아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말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의 가슴께에 <싸이듀> 로고 배지가 달려 있다. 직원이다.

“앗!”

“코스프레 중인가요? 보석상 앞에서 빵 먹는 장면?”

송아는 당황하여 입에 든 꽈배기 빵을 꼴깍 삼키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틀어 올린 머리, 검은 정장, 검은 선글라스까지. 아! 주얼리 광고의 단골 콘셉트, 티파니에서 아침을.

커피까지 들고 있으면 딱, 남의 주얼리숍 앞에서 오드리 헵번 코스프레하는 정신 나간 된장녀다.

“그, 그게…….”

창피와 당황이 올라와 말문이 막혔다.

“안목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노출도 하지 않은 신상품을, 가격까지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예상하시는지. 상품 설명은 그대로 잡지 광고를 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물론, 퍽이나 잘 팔리겠다느니, 누가 끼라고 만들었느니, 하는 소리는 빼고요? 아, 완전 도둑놈의 시키라는 말도.”

송아는 뜨악해 남자를 훑었다. <싸이듀> 매장 직원들은 인물들이 좋다더니. 이탈리아 테일러숍에서 갓 뽑은 것 같은 고급스러운 회색 슈트가 착 달라붙는다.

“죄, 죄송해요, 직원분이 계신 줄 몰랐어요.”

저렇게 잘생긴 남자에게 당하는 망신이, 그냥 그렇게 생긴 남자에게 당하는 망신보다 왜 더 창피할까?

“네, 계신 줄 몰랐으니, 진심이었을 거라는 게 더욱 마음 아픕니다. 이토록 보석에 대해 해박하신 분이요.”

“정말로 죄송해요.”

잽싸게 도망쳐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사과했다.

“아니, 사과를 받자는 게 아녜요. 당연히 우리 제품이 별로일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신상품들이 왜 그렇게 그쪽분을 출근길부터 화나게 했는지, 그 이유는 좀 궁금하군요. 명품 잡지 몇 권 읽고 높인 안목은 아닌 것 같은데.”

잡지 몇 권 읽고 익힌 안목 맞다. 그런데 잡지 얘기는 왜 자꾸 하시나. 나한테 잡지 냄새라도 나나?

“호, 혹시, 처, 처음부터 다……?”

“네, 모조리, 꼼꼼히 다 듣고 봤습니다만.”

송아는 등이 저릿해 남자를 올려다봤다. 짙은 눈썹, 쌍꺼풀 없는 크고도 긴 눈, 우뚝한 코, 거기에 여자만큼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이라. 정말 잘생긴 남자다.

그러나 상처 입었다는 듯 열 손가락을 착 펴고 인상을 쓰는 그 눈엔 어쩐지 장난기가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실례를……. 흐음, 저, 직접 디스플레이를 하신 건…….”

“네, 참여했죠. 아이디어도 직접 내고요? 몇 달을 공들인 것들을 오늘 아침 막 선보이며 사람들 반응을 살피기 위해 나왔습니다만?”

아, 이 남자 일부러 더 미안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참 잘못했다. 만약 피땀 흘려 만든 잡지가 가판에 막 눕자마자 누군가, ‘저딴 걸 누가 보라고 만들었어?’ 표지만 보고 헛소리하면 진심으로 상처받을 것 같다.

“어휴, 정말 죄송해요. 사실, 이번 디스플레이 참 예뻐요.”

송아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진심을 가득 실어 사과했다.

“후후, 좋습니다. ‘용서’해 주죠.”

‘용서’란 단어를 뱉으며 그는 장난처럼 입술을 슬쩍 송아의 귀에 가져다 댔다. 흠칫 놀라 옆을 홱 돌아보니, 그는 이미 단정히 바로 선 뒤다.

그러나 송아의 귓속엔 이미 달콤한 ‘용서’가 콕 박혀 버렸다. 그리고 코끝엔 애프터쉐이브의 잔향이, 뇌리엔 그보다 더 섹시한 음성이. 온 세상이 그가 되어 그녀를 조곤조곤 누르는 것 같았다.

두근, 심장이 묵직하게 울렸다. 두근두근, 그렇게 뛰기 시작했다.

송아는 훔치듯 그를 몰래 올려다보았다. 선 굵은 턱선에 둔탁한 턱 보조개가 묘하게 패었다. 물씬하게 전해지는 남성성.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보고 싶은 멋진 턱이다. 술에 취해 조금쯤 흐트러지고 사흘 정도 깎지 않은 수염이 푸릇하다면 좀 더 짜릿할 거 같아.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남자의 시선은 그녀를 비껴 쇼윈도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표정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저건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머쥔 남자만의 도도한 자신감. 송아는 갑자기 폭발적으로 궁금해졌다.

판매 직원일까, 디스플레이어일까, 아니면 디자이너?

디자이너라기엔 모델 뺨치는 슈트 핏이 단정했고, 판매 직원이라기엔 제품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강렬했다. 만날 여자 모델들만 보지만 종종 저런 핏을 구경한다. 아니, 종종 볼 순 없을 정도로 괜찮다. 숨은 근육이 좀 짱짱하신 듯.

쇼윈도 너머 그의 시선이 갑자기 송아를 향했다. 얼른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어떤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솔직히 말해 주죠? 훨씬 더 심한 욕을 해도 좋으니 솔직하게만.”

웃음기를 가득히 머금은 그의 주름진 입술이 근사하다. 거기다 대고 답할 수 없었다.

‘당신네 대표, 황진헌에게 기사 좀 쓰자고 했다가, 개망신당하고 까였거든요.’

신분을 들켰다가 광고라도 떼이면 큰일이다. 대신 사과하는 마음으로 솔직히 말했다.

“으음, 신상품들도 디스플레이도 정말 사랑스러워요. 여태까지 봐 왔던 것보다 월등히요. 진주들이 흩뿌려진 토이 드레스도 진짜보다 더 정교하고요. 전체적으로 결혼식을 꿈꾸는 신부의 설렘이 잘 표현되었네요. 하지만.”

“네, 좋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반지로 만들어 끼기도 힘든 최고급 아키야 진주를 토이 드레스 부속으로 쓴 게 화가 났어요. 정말 유니크하고 아름다운 커팅의 다이아 반지들인데, 가격이 너무 과해요. 쓰러지게 끼고 싶게 만들고선, 절대로 낄 수 없는 가격의 것들을 과시하듯 전시했죠.”

“오호!”

“네, 전 속물이고 허영덩어리라 감탄보단 욕이 나오네요.”

“이것들은 프리미엄 라인입니다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뒤늦게 오묘한 웃음이 퍼졌다. 송아는 이를 꽉 다물었다. 이렇게 아는 체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 사람에겐 저도 모르게 진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설명이 되었으면 가 볼게요.”

송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이번엔 진짜로 도망쳐야 할 때다. 이 남자와 나란히 서서 대화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뜬다. 더 이상 재잘대다간 다니는 회사 이름까지 나불나불 불어 버릴 것 같다.

“과격한 칭찬,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욕을 먹고도 기분이 참 좋군요.”

욕을 해 줬는데, 남자는 짙푸르게 웃었다. 그러곤 갑자기 송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답으로 쓰러지게 끼고 싶으시단 반지들을 실컷 껴 보게 해 드리죠. 명함 주시면 예약해 드릴게요.”

그러나 그때! 송아는 오묘한 실망감에 마음이 울렁였다. 다시 본 남자의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

0.5초도 안 되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0.5캐럿, 남성용 인그레이브드(오목하게 묻힌) 스타일. 선보인 적 없는 최신 상품.

“이쪽 일 합니까? 겉보기엔 학생같이 아주 어려 보입니다만.”

디자인조차 참 세련되었다. 그가 다정하게 걸어오는 말투만큼이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대답 대신 그의 손바닥에서 시선을 치웠다. 반지가 정말 욕 나오게 고급스럽다. 그의 그녀는 반듯한 집 딸이겠지. 아주 예쁠지도. 그러나 그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난 뉴욕에서 공부했어요. 매주 습관처럼 맨해튼의 수많은 매장들을 들락거리면서 보석 구경을 하던 게 도움이 많이 되었죠. 여기선 그러기가 쉽지 않죠?”

그는 송아를 보석 관련 종사자로 착각한 것 같았다. 장난기가 가시지 않은 채 송아를 주시하는 남자의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관심을 가득 실어 그윽하게 내려다봐 주는 눈길, 그 열기가 달콤하면서도 싫었다.

“와서 마음껏 구경하고 공부하고 가요. 사라고 눈치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부담은 내려놓고.”

사실 이건 굉장한 배려인데. 왜 저 멋들어진 미소에 부아가 치밀까.

“편하게 볼 수 있게 VIP 리스트에 넣어 줄게요. 명함 없으면 전화번호만 주든지.”

그의 음성이 다디달다. 전화번호를 달라는 말이 꼭 데이트 신청으로 들린다. 착각인 거 알아. 진짜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 그런 거 절대 아냐. 송아는 괜한 심술이 치받쳐, 턱을 들고 도발적으로 답했다.

“데이트하자고 유혹하시는 것 같네요.”

순간, 남자의 눈빛에 강렬한 열기가 일어나며 턱 보조개가 오목하게 들어갔다. “하하!” 그는 소리 내어 시원하게 웃었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달콤하고, 입가에 팬 주름이 어른스러우면서도 색정적이다.

“와, 한 방 맞았군. 좋아요! 이따 퇴근하고 매장으로 와요. 보석 얘기나 하면서 데이트 비슷한 거라도 해 봅시다. <싸이듀>가 자랑하는 ‘숙녀의 방’에서 내가 직접 구경시켜 줄 테니. 자, 전화번호!”

그의 말이 점점 짧아지며 권하는 수위가 높아졌다. 아, 그 말로만 듣던 숙녀의 방? ‘숙녀의 방’은 VVIP 전용 고객들이 편안하게 보석을 쇼핑하기 위해 머무는 최고급 서비스룸이다.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니 편집 기자 따위에게 공개할 필요도 없다.

송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숙녀의 방’이란 단어에 내면의 허영심이 들끓었다. 아니, 그보다 결혼반지를 낀 그의 손을 뻔히 보면서도 그와 함께 보낼 시간, 그 ‘데이트 비슷한 거’에 천박한 기대가 실렸다. 저 남자에게 끌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아뇨, 전화번호는 못 드려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부러 더 싸늘히 답했다. 그러나 섹시한 그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싹 빠지는 걸 보니,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사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매달 광고를 싣는 곳에, 장난치듯 반지 구경하러 가는 주책을 떨 순 없었다. 그냥 이 사람 하나에게, 살짝 미친년으로 찍히고 끝내야지.

“저, 처음 보는 남자에게 명함 같은 거 막 주고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이 남자가 나쁜 거다. 결혼반지를 말짱하게 꼈으면서! 아침부터 쓸데없이 마음을 울렁거리게 뒤집어 놓은 죄가 크다.

곱게 놔둘 수 없었다. 가볍게 한 방 먹이고 끝내고 싶었다.

“아저씨, 여자에게 수작 거실 때는요. 결혼반지부터 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야 뉴욕 어쩌고 하는 아저씨 레퍼토리대로 홀딱 넘어오죠.”

강세는 ‘수작’, ‘결혼반지’ 등등에 힘껏 주었는데, 그는 얼토당토않은 ‘아저씨’란 단어에 무척 불쾌해했다. 아, 아저씨는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무척, 싫어하시는구나?

“아셨죠, 아. 저. 씨?”

송아는 그가 ‘아저씨’란 단어에 표정이 흐트러지는 데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약 올리듯 간들거리며 상쾌하게 훈계질을 더했다.

“다음부터 바람피울 땐, 반지부터 빼고! 제대로 잘하세요? 안녕! 아. 저. 씨!”





#2. 페이스오프(경기 시작)



선선한 가을바람이 마음을 울렁거리게 해서다. 싸르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몹쓸 공기가 동네 아저씨를 붙들고라도 고백을 막 하고 싶게 만들어서다.

그래, 좀 억울했겠지. 그는 어려 보이는 동종 업계 종사자에게 호의와 배려를 베푼 것뿐인데. 솔직히 먼저 꼬리 쳤다. 괜히 임자 있는 사람인 게 억울했다. 서른 전후쯤 되어 보이던데.

‘편하게 볼 수 있게 VIP 리스트에 넣어 줄게요.’

듣기 좋은 중저음에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까지. 그러나 그가 꼈던 반지까지 또릿하게 함께 떠올라 송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귈 남자도 아닌데 결혼반지를 꼈든 말든.

아주 오랜만에, 거의 처음인 듯 남자에게 설레어 봤다. 너무 오래 연애를 쉰 탓이다. 꾹 눌렸던 연애세포가 반항하듯 뛰쳐나왔다. 남자가 좀 근사해서 그랬어. 아니, 하나도 근사하지 않았어, 그러니 이젠 그만!

미련을 접듯 손에 든 꽈배기를 종이 봉지에 꼭꼭 싸 가방 깊숙이 쑤셔 넣었다.

“송아야, 좋은 아침!”

낯익은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만큼은 아니나, 꽤나 생긴 남자가 별로였던 아침을 더욱 망친다. 고개 숙여 까닥, 인사했다.

“네, 오 선배.”

반갑잖아도 인사는 해야 하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의 없다?”

“안녕하십니까, 오지령 선배님.”

깍듯함 속의 싸늘함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까지 거리감을 벌릴 필요가 있을까?”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요.”

“가깝잖아.”

그는 면도도 하지 않은 푸릇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폭 팬 보조개는 여전히 귀엽더라도, 그동안 사진집을 몇 권 낸 대단한 작가로 성장했대도, 세상에서 가장 함께 일하기 싫은 사람이다.

“전남친이라고 생각하면 함께 일하지 못하죠.”

“난 동료란 뜻으로 말한 건데? 역시 여태 연애를 못 한 건 내 탓인가?”

그는 기분 좋다는 듯 이죽거렸다. 그렇게 믿게 해 주기 싫다. 열이 올라 확 쏘아 주려는데, 익숙한 체취가 가까워졌다. 송아는 얼른 한 걸음 비켜섰다.

“실례.”

그는 흑심이 없었던 척, 엘리베이터의 오름 버튼을 눌렀다.

“<화이트 웨딩>에 낙하산 제도가 있는 걸 알았다면 차라리 다른 회사에 지원했을 텐데요.”

뾰족하게 말을 쏘았다. 선배가 입사한 지는 한 달 남짓.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아무래도 싫다.

“낙하산이 아니라 초빙. <화이트 웨딩>이 날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화이트 웨딩>을 선택했다고.”

송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겨우 100일을 넘겼던 연애. 그를 좋아했던 마음은 기억조차 희미한데, 남은 건 긴 상처뿐이다.

“아, 이것들이!”

그때 반갑고도 반갑지 않은 두툼한 손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쑥 뻗쳐 나왔다. 아, 씨! 구석기 편집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