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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외전 1. 육아의 길





“우리 현이, 잠이 안 와? 우쭈쭈.”

민권은 비몽사몽인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현을 안아 들었다. 시선을 내리니 진권이 우유병을 손에 든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흘렸다. 잠시 몸을 낮게 숙여 진권이 들고 있는 우유병을 가져다 현의 입술에 물린다.

“큰아빠가 우유를 주시다 만 거야? 자느라고? 우리 현이 배가 고팠겠네. 잠시만 있어.”

몸으로 천천히 리듬을 맞춰가면서 울고 있는 현을 달랬다. 젖꼭지가 물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현이 울음을 멈추었다. 쏟아지는 잠에 눈꺼풀이 여전히 무거웠지만, 민권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맨정신을 담으려 애썼다.

그렇게 방안을 서성대며 현을 안은 채 우유를 먹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진권이 방문한 시간이 밤 8시였는데 어느새 자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권이 사온 족발과 소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현을 진권에게 맡긴 후 부족한 잠을 자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진권을 깨워 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소주 몇 잔에 깊이 잠이 든 탓인지 아무리 그를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 그만 일어나지?”

목소리를 조금 높였지만 진권은 깨지 않았다. 그때 마침 진권이 벗어놓은 재킷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민권은 서둘러 진권의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은 현희. 조금 난감한 기색이 얼굴에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전화 통화를 했다.

― 여보. 왜 이렇게 늦어요?

“형수님.”

민권의 민망한 음성이 나가자 놀란 현희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 어머나. 삼촌?

“네.”

― 삼촌이 어떻게 그이 전화를 받아요? 같이 있어요?

“네.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와이프가 오늘 나이트 근무라 혼자 있는데 형이 왔어요. 같이 저녁 먹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질 못하고 있네요.”

― 술도 마셨겠죠?

“뭐, 조금?”

― 흐음. 알았어요. 오늘은 거기서 재우시고 아침 일찍 좀 보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형수님.”

현희는 현과 세연의 안부를 묻는 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현의 우유병이 거의 바닥을 보일 즈음, 몸을 뒤척인 진권이 가늘게 눈을 떴다.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이 까맣게 어두운 걸 확인하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잠은 집에 가셔서 주무셔야지, 형님.”

민권이 조금은 탐탁지 않게 진권을 내려다봤다. 세연이 요 며칠 계속 밤 근무라 혼자 현을 케어한 탓에 피곤하여 잠시 맡겼는데, 이토록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다니.

“으음. 미안. 내가 오래 잤나? 지금 몇 시지?”

“한 시간만 지나면 내일이 돼.”

“벌써?”

진권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민권이 현을 안아 어르는 것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현이 울었어?”

“응.”

“이상하다. 우유를 분명히 먹였는데.”

“흐음. 이상하기도 하겠지. 우유병을 쥐고 잠이 들어버렸으니 현이가 우유를 먹었는지 어쨌는지 알게 뭐야.”

“내가 우유를 먹이다 도중에 잠이 들었다는 거야?”

“애석하게도.”

“소주 때문인가.”

진권이 다시 한 번 마른세수를 하자, 민권이 이번엔 취조하는 투로 날카롭게 물었다.

“형. 솔직히 말해 봐. 한유 키울 때, 형은 아무것도 안 했지?”

“무슨 말을!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네 형수 시키는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했지. 최고로 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쁘진 않았다고 본다.”

“흠.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최고로 가정적이지는 않다고 이실직고를 하시네.”

“너도 키워 봐. 한 1년 더 키워보고 말해. 그때도 지금처럼 헌신할 수 있는지.”

“6개월을 내가 키웠는데 향후 1년인들 못할까?”

민권의 음성에서 얼마쯤 빈정거림이 느껴지자 진권이 눈동자를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권은 아주 태연하게 현을 안고 있었다. 민권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이 태어나자마자 세연과 민권은 함께 6개월 간 육아휴직을 했고, 2주 전에 함께 직장에 복귀했다.

낮엔 육아도우미의 손에, 밤엔 세연 혹은 민권의 손에서 날이 갈수록 커가는 현을 볼 때마다 자신도 커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진권은 절대 알지 못할 거란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우월감이 든다.

“좋아. 형이 한유 키울 때 했던 게 뭔지 읊어봐.”

민권이 거드름을 피우며 묻자 진권이 이번엔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곤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할 거리를 찾고 있는 모양인데 쉽게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민권이 아는 한, 진권은 한유의 성장에 있어 기여한 바가 먼지처럼 작기 때문이다.

“우유 먹이기.”

“그건 내가 더 많이 해줬지. 형수님한테 물어볼까?”

“기저귀 갈기.”

“흐음. 그것도 내가 더 많이 했을 걸?”

“업기.”

“왜 이러실까. 내 기억 속에 단언컨대 형은 단 한 번도 한유를 업은 적이 없어.”

“안은 적은 있어.”

보무당당하던 진권의 태도가 조금씩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목소리마저 기어들어갔다. 민권은 이 여세를 몰아 더욱 몰아붙였다.

“안은 적이야 있겠지. 그거라도 안 하면 아빠라고 불릴 수 있겠어? 자, 어때? 내가 이겼지?”

“음. 난 가야겠다, 이만.”

“형. 지금 가면 음주운전이야. 대리 부르기 귀찮으면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세연이는 내일 아침 8시나 되어야 들어올 테니까. 형수님 조금 전에 전화 왔기에, 형 여기서 재운다고 했어.”

엉거주춤 재킷을 집어 들던 진권이 슬그머니 다시 내려놓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즘 들어 진권에게선 예전의 예민함이나 날카로운 면모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진권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아주 가끔 그 시절의 위엄이 그립기도 했다.

진권은 아주 가끔 오늘처럼 소주를 사들고 찾아오곤 했다. 형과의 술자리는 세연이 밤 근무 시간에 이루어지며 새벽이 되면 파하곤 했다. 두 사람이 잠시 멀어졌었던 그 시간만큼, 다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민권은 그 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Rrrrrr.

“현아. 엄마다, 엄마. 여보세요?”

협탁에 둔 핸드폰이 인세연 세 글자를 품으며 시끄럽게 울렸다. 민권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고 아내의 음성에 반가워했다.

― 나예요. 안 자고 있었네.

“응. 현이 우유 먹였어. 당신은? 저녁은 먹은 거야?”

― 당연하죠. 밥은 칼 같이 찾아 먹어요. 내 걱정은 말아요. 현이 목욕은 시켰어요?

“응. 이제 하려고.”

― 혼자 하려면 힘들 텐데.

“여기 일꾼이 한 명 있어.”

― 일꾼? 뭐지? 아주버님 혹시 오셨어요?

“맞췄네.”

― 못살아. 아주버님이 아기 목욕을 시켜보셨을까 모르겠네.

“안 해봤을 거야. 그래도 시켜야지. 혹시 알아? 한유 동생이 태어나면 프로가 되어 있을지?”

― 알았어요. 두 분이 손발 맞춰서 잘 해보세요. 나 이만 끊을게요.

“그래, 수고해!”

세연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진권이 다가와 물었다.

“뭘 한다는 거야?”

“목욕. 자, 이제부터 형하고 나는 현이 목욕을 시킬 거야.”

“목욕? 아서라. 난 한유 목욕도 한 번도 시켜보지 않았어.”

“그러니까 첫 경험을 해봐야 하는 거야. 형 둘째 안 가질 거야? 둘째 땐 한유보다는 신경을 써야지?”

민권이 제법 논리적으로 말하자 진권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이 목욕이라니. 이보다 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벌써 민권의 발길은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셔츠 소매를 걷고 민권을 뒤따른 그는 민권이 하는 턱짓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뭐?”

“욕조를 가져와야지.”

“저기 큰 욕조에다 하는 거 아냐?”

“큰일 날 말씀하시네. 저기서 목욕시켰다가 애 물 속에 빠뜨릴 일 있어?”

민권이 잔소리를 퍼부었고 진권은 민망해하며 아기 욕조를 가져왔다. 민권은 말없이 현을 진권의 품에 척 안긴 채 호스를 통해 욕조에 물을 받았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수온을 맞추는 민권을 보고 있자니, 가히 수준급 솜씨인 듯했다.

“자, 물은 됐고, 현이 아빠한테 올래?”

민권은 진권의 품으로부터 현을 건네받은 후 욕조에 천천히 담갔다. 현이 두 발로 물장구를 치며 꺄르르 웃었다. 남자아이치고 웃음이 많아 민권과 세연은 딸이 되려다 아들이 된 게 아닐까, 농담을 하곤 했다.

“자 형, 나 하는 거 잘 봐둬. 알았지?”

민권은 현을 욕조에 앉히곤 다리부터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뽀송뽀송한 살결이 물기로 윤이 났다. 비누로 손바닥을 문질러 거품을 알맞게 낸 후 현의 몸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몸을 모두 씻긴 후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을 땐 현을 아예 안고서 머리만 욕조 쪽으로 향하게 하는데, 그 행동이 여간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진권은 내심 감탄했다.

민권이 제수인 세연뿐만 아니라 아내인 현희한테서도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왠지 모르게 흐뭇해진 진권은 괜스레 허전해진 손을 어쩌지 못하고 욕조 물에 담갔다.

그러곤 넌지시 물었다.

“넌 둘째 계획 있어?”

“응. 당장은 어렵고 세연이나 나나 좀 한가해지면. 현이가 아들이니까 둘째는 딸을 낳아야지.”

민권이 야심차게 포부를 밝히면서 은근 진권의 표정을 살폈다.

“형도 한유 동생 낳아야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다.”

“노력해 봐. 형수님도 은근 바라시던데.”

“글쎄다. 한유한테만 신경을 쏟고 싶긴 한데.”

현의 발가락을 살짝 만지작거리며 진권이 말끝을 흐렸다. 한유가 어렸을 땐 거의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새벽까지 회사에 머물러 있는 게 다반사였으며, 현희나 한유를 며칠 만에 만난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다시 그런 날이 온다면, 한유 동생을 낳는 날이 온다면 이번엔 멋진 아빠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진권의 얼굴에 퍼지는 씁쓸한 회한을 민권은 금세 눈치챘다. 현의 머리를 모두 감기고 일어선 그는 진권의 도움을 받아 현의 몸을 닦아냈다. 옷을 갈아입히고 잠을 재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난 거실에서 잘게.”

방으로 들어가는 민권과 현을 향해 진권이 가볍게 말했다. 돌아선 민권이 그런 진권을 불러 세웠다.

“형.”“응?”

“형도 좋은 아빠야. 나보단 덜 하지만.”

형제 사이로 여유 낙낙한 웃음소리가 흘러갔다. 다붓하고 작은 미소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