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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한 피라칸타 나무가 세련되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분재화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꽃잎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리니 힘없이 흔들린다. 민권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는 분재화분이다. 누구의 손길도 용납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손으로만 키워온 것이어서, 이 사소한 접촉에 모종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책상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 넓은 회장실을 둘러본 그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사진 액자를 쳐다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 강수, 왼쪽에 선 형 진권과 형수인 현희, 조카 한유, 그리고 오른쪽에 선 자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년 만에 찍은 가족사진에서 변한 게 있다면 형에게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것일 게다.

민권은 사진 속의 자신이 어쩐지 묘하게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느낌만인지, 아니면 실체에 대한 자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수고와 노력이 무척 어색한 미소로 나타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있어? 생전 처음 와 본 데처럼.”

그렇게 민권이 사진에 집중하며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있는데, 별안간 문이 열리고 강수의 호통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민권은 인사말 대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책상에서 엉덩이를 뗐다.

“여긴 올 때마다 낯설어요.”

“그래서 그렇게 내 책상에 걸터앉았냐? 낯설다는 놈이 아주 자연스럽구나.”

“으음. 죄송.”

민권은 어깨를 으쓱하며 강수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대할 때면 어김없이 생기는 주름이, 오늘도 강수의 이마를 수놓고 있었다.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둘째아들에 대한 소심한 불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민권은 강수가 소파에 앉기 전 냉수와 함께 알약 하나를 삼키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강수의 반쯤 벗겨진 머리에 백발이 하얗게 드리워진 것을, 민권은 착잡하게 응시했다. 제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부친의 얼굴 표정은 예전에 비해 그 힘을 잃은 듯했다. 그렇게 태산 같던 아버지도, 바야흐로 세월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고 계시는 거다. 심장 약을 먹으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에 화조차 내지 않으시면서.

민권은 짐짓 낯빛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약 먹는 거 보면 모르냐? 죽을 때가 다 됐어, 이제.”

실제로 강수의 숨소리는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었고 민권은 내심 무척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딱 염려까지만. 그 이상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

“회의가 꽤 기네요. 10분만 더 기다리다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10분이라니. 인심 썼구나. 저번 주엔 3분 기다리다 돌아가지 않았어?”

“그땐 생방송 직전이었고 당장 방송국에 복귀하지 않으면 방송사고가 날 지경이었잖습니까.”

“웃지 마라, 자식아. 아비는 네가 방송국 피디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안 드니까.”

헤실헤실 웃으며 대꾸하는 민권을 강수는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쳐다봤다. 갈색 사파리 점퍼에 청바지차림은 수수하나 허름하게 보여 마뜩찮다. 가뜩이나 집을 나가 방송국 피디를 한답시고 회사 일엔 나 몰라라 하는 녀석이어서, 강수는 매번 민권을 볼 때마다 툴툴대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엔 무려 해외출장이라니.

아무래도 이 녀석이 아비의 가슴을 찢어버리려고 작정을 한 건가 싶다.

“압니다. 아버지가 절 탐탁지 않아 하신다는 거.”

“네가 아니라 네 직업 말이다. 경영수업 받다가 갑자기 마음 바꿔 피디 시험을 보겠다고 짐 싸들고 나가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고도 네가 호경그룹 회장 차강수의 작은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냐?”

“아…… 우리 아버지 또 10년 전 얘길 꺼내시네.”

민권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빙긋이 웃었다. 웃곤 있지만 아버지의 말 속 곳곳에 박힌 원망과 야속함의 무게가 느껴졌다. 10년 전, 그러니까 뉴욕에서 공부를 하던 중 몰래 귀국하여 방송국 피디 시험을 본 스물네 살의 그땐, 피디 시험 말고는 돌파구가 없었다.

행여 민권이 회사를 넘볼까, 내내 전전긍긍하던 형을 안심시키기 위해선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눈을 돌려야했던 것이다. 강수의 피와 땀이 어린 회사에,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인 진권을 위해 민권은 함부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진심을 알지 못하는 강수는 민권의 시험응시를 단순한 일탈로 보고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민권이 아예 방송국 피디로 10년이나 생업을 유지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강수가 민권을 향한 야속한 눈빛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그래. 이번엔 또 뭔 짓을 저지르겠다고?”

“3개월 정도 캄보디아에 다녀와야 해요.”

“보름 후가 내 생일인데?”

“물론 알죠. 그래서 제가 준비해왔습니다.”

민권은 점퍼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어 강수에게 스윽 내밀었다. 상자를 내려다 본 강수의 미간이 좀 전보다 더욱 깊게 일그러졌다.

“뭐냐, 이게?”

“물 건너 온 거예요. 아버지 매년 이맘때면 알레르기 기침 때문에 고생하시잖아요. 제 급여의 3분의 1을 털어 산거니까 다녀와선 반드시 빈 통이어야 합니다. 제가 검사할 테니까요.”

“쓸데없는 짓을 했어. 김 교수가 어련히 알아서 처방해줄까.”

“김 교수님이 알아서 잘 치료해주시겠지만 작은아들의 정성도 잊지 마시라는 말씀이죠. 이제 가면 6월에나 돌아올 텐데 저 보고 싶어 몰래 눈물짓지 마시구요.”

“데끼! 이 녀석아!”

강수가 약상자를 집어 들고 민권을 향해 던지려는 듯 조준하자 민권이 고개를 이리저리 휙휙 기울이며 피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다 마지막엔 크게 웃는다.

“미리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민권은 속이 문드러지면서도 아들의 일에 가타부타 관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강수가 고마웠다. 외롭다, 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쓸쓸한 눈물을 보이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아버지로서 의연하게 그 자리에 계셔줘서 늘 고마웠다.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셔서, 민권은 늘 고마웠다.

“축하는 받으마. 그런데 나하고 한 가지 약속할 게 있다.”

허허 웃던 강수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않으려 했지만 벌써부터 등이 꼿꼿하게 선다.

“뭡니까, 아버지.”

“이번 방송이 만족스럽지 못할 시 그룹으로 들어와. 이만큼 네 생활을 용인해줬으면 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아니냐? 민권아?”

어쩌면 이미 예상했던 말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든 그로 하여금 그룹으로 들어오게 만들 거라는 것은, 피디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분명 강수는 작은아들의 미래를 보장해주기 위함일 터다. 하지만 막상 강수의 입에서 직접 떨어진 그 말은, 민권에게는 더없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씀, 취소합니다.”

웃으면서 내뱉은 민권의 말에, 강수도 피식거렸다. 무거운 한숨이 민권의 입 안에서 내내 맴돌았다.



회장실을 나온 민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에서 토해지듯 내렸다. 그를 알아본 직원들의 눈인사를 받으며 서둘러 로비를 가로질러가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차민권.”

돌아보니 진권이 중년의 비서 두 명과 함께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고 있었다. 민권의 얼굴에 반가움이 잠시 올랐다가 사라졌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눈빛. 자신을 쳐다보며 짓는 저 표정을, 민권은 너무도 오랜 세월을 겪어왔다. 진권에게 다가간 민권은 손을 내밀며 농을 건넸다.

“여어. 차 전무님.”

진권이 민권이 내민 손을 맞잡는다. 올 해 초 당당하게 전무이사로 승진한 진권은 호경그룹 차기 후계자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 있었다. 아버지 강수의 기대와 바람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진권은 명실 공히 승승장구 중이었던 것이다. 진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얼굴을 얼마쯤 자연스럽게 편 후 물었다.

“아버지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응. 며칠 후에 해외출장이 잡혀 있어서 아무래도 생신 때 못 뵐 것 같았거든.”

“캄보디아에 나간다고 들었는데.”

“소식 빠르네. 아무래도 아버진 전생에 여자였던 게 틀림없어. 수다를 너무 좋아하셔.”

민권이 던진 농담에 진권도 피식 웃었다. 형이 이렇게 웃는 얼굴을, 민권은 무척 오랜만에 대하는 듯했다. 어렸을 땐 둘도 없는 형제였지만 머리가 크고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하나둘씩 부여되기 시작하면서, 진권은 눈에 띄게 변해갔다. ‘자신의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것’이란 장남으로서 가질 수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형수님도 잘 계시지? 한유는?”

“그렇지 않아도 한유가 삼촌 왜 한 번도 안 오냐고 물어봐. 네 형수도 그렇고. 캄보디아 가기 전에 한 번 들러. 저녁이나 같이 먹게.”

“그럴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어. 아버지 생신에도 못 온다니까?”

“왜 그렇게 바쁜 거냐?”

“봄이니까.”

민권은 쓰게 웃고는 진권의 어깨를 툭 쳤다. 정감어린 손길이었지만 진권에겐 그저 무색무취의 행동인가 보다.

“다녀와서 봐, 형. 수고하고.”

그의 인사에 진권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스쳐지나갔다. 민권은 퍼뜩 든 생각에 다시 진권을 불러 세웠다.

“형.”

“왜.”

“시간 되면 아버지 모시고 목욕탕에 다녀와. 등 밀어드리면 좋아하셔.”

섣부른 조언인 걸까. 진권은 웃는 듯 마는 듯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발길을 돌렸다. 진권이 온 몸에서 풍기고 있는 견제의 분위기가, 민권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아까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면서, 아무래도 피디의 길로 진로를 바꾼 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씁쓸한 맛이 입가에 감돌았다.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피부로 느껴졌던 진권의 벽은 여전히 높고 두꺼웠다. 단 한 번도 욕심내 본 적 없었는데. 그저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회사니, 응당 자신의 모든 것도 바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하지만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진권의 저 견제는 어쩌면 처음부터 필요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양아와 입양아가 아닌 사람, 그 뚜렷한 선이 진권과의 사이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데. 그러니 그렇게까지 날을 세우고 대하지 않아도 되는데.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 채로, 민권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