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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진료실에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정민의 메시지에 답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중에 만나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손가락을 움직이려던 순간,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만약 또 버리면, 내 팬클럽 회원들한테 한지원 씨 신상 전부 다 퍼트릴 겁니다. 나 두 번 버린 여자라고. 내 팬클럽 사람들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죠? 회장님이 마흔다섯인데, 애를 넷이나 낳은 사람이라 세상에 겁날 게 없대요.]

혼자 있는 공간이라 마음이 편해지자, 웃음소리도 더욱 커졌다. 지원은 진료실 회전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밀자 의자가 빙그르르 제자리를 돌았다. 자꾸만 차정민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월요일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똑바로 앉은 지원은 휴대폰 메시지 창을 터치한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

[도망 안 가니까, 일찍 와서 기다리지 마세요. 비싼 국민 배우인데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버리면 아깝잖아요.]





02 우리 연애해야죠?



시간은 밤 9시 40분을 넘겼다. 어두웠던 지하 주차장은 사람들이 지나가거나 차가 드나들 때마다 센서 등이 켜지며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지원을 기다리던 정민은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살면서 이토록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 적이 있었나 싶었다.

휴대폰을 들고, 낮에 받았던 지원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도망 안 가니까, 일찍 와서 기다리지 마세요. 비싼 국민 배우인데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버리면 아깝잖아요.]

메시지의 내용은 찬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정민의 마음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원이 더욱더 보고 싶어졌다.

휴대폰으로 명성한의원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의료진 소개 칸에서 곧바로 지원의 사진을 찾았다. 어제부터 셀 수 없이 본 사진인데도 자꾸 더 보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자신의 사진을 검색해 보는 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 끝났어요?”

― 네. 생각보다 환자가 없어서 일찍 끝났어요.

“지하 4층에 있어요. 내려와요. 아니다, 데리러 갈까요?”

생일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을 빨리 불고 싶어 서두르는 아이처럼, 왜 자꾸 말과 행동이 빨라지려고 하는 건지. 멋쩍은 마음이 든 정민이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 2분이면 가요. 주차장에서 봐요.

“아니! 끊지 말아요. 그냥 통화하면서 와도 되잖아요. 요즘은 엘리베이터에서도 휴대폰 잘 터지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지원에게 안달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정민은 뒤통수를 운전석 헤드레스트에 쿵쿵 두드렸다. 에라이, 바보 같은 놈. 너를 두고 간 여자가 뭐가 좋다고.

― 말했잖아요. 도망 안 간다고.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지원 씨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잡고 싶으니까요.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싶으니까.”

잠시 지원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지하 4층입니다’ 하는 엘리베이터 안내 음이 정민의 귓속으로 정확하게 들어왔다.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지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의 센서 등이 지원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씩 켜졌다. 몇 걸음 걷던 지원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이트 블라우스에 검은 슬랙스, 그 위로 살짝 광택이 도는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지원은, 2년 전 아토차역에서 처음 봤던 날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 정민 씨, 어느 쪽에 있어요?

지원이 물었다. 차 번호를 알려 주거나, 밖으로 나가 지원에게 알은척을 해야 하는데, 정민은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제 오후, 그토록 찾았던 지원이 있는 곳을 알아냈을 때 지나간 2년이 너무도 아깝게 느껴졌다. 지원이 일하는 한의원은 정민의 집에서 넉넉잡고 차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서로 닿기까지 허비한 시간이 정민을 화나게 했다.

한의원으로 찾아가 지원의 실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 정민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내가 꿈을 꾼 게 아니었구나. 모든 게 현실이었어. 정말 한지원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어. 속으로 몇 번이나 다행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어제오늘, 정민이 경험한 감정의 변화만을 놓고 본다면 영화 한 편을 찍고도 모자람이 없었다. 화, 안도, 설렘, 떨림, 기쁨.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굵직한 감정을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이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차창 너머로 자신을 찾고 있는 지원이 보였다.

‘그랬지. 그래서 내가 그런 거야.’

눈으로 지원을 좇던 정민은 혼자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여전히 자신을 한눈에 사로잡는 아름다운 여자여서 마음을 쉽게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서 있기만 할 뿐인데도 정민의 눈에 보이는 지원은 미치도록 고혹적이었다. 2년 전, 정민이 지원을 처음 봤던 그 순간처럼.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몇 번 저은 뒤 차 밖으로 나갔다. 정민을 발견한 지원이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정민 씨를 누가 보면 안 되니까 빨리 탈게요. 차 저거죠?”

지원은 정민이 뭐라 더 말할 여지를 주지 않고 앞서 걸었다. 정민은 지원을 앞질러 나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운전석에 앉은 정민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빨리 지원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어쩐 일인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지원이었다.

“한 시간 반이면 많이 기다린 건가요? 2년을 기다려 봐서 그 정도는 시시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참 안 갔어요.”

지원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차분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너무 보고 싶은데. 어떤 얼굴로 웃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혹시 차 여기 세워 둔 거 아닌가요?”

“집이 한의원 바로 옆 오피스텔이에요. 출퇴근할 때는 차 안 써요.”

“그렇구나……. 집도 나랑 엄청 가까웠네요. 그런데 어쩜 한 번도 스치지 않았을까.”

정민의 안타까운 탄식을 지원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지금은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2년 만에 얻은 기회를 이렇게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 정민은 서둘러 차의 시동을 걸었다.

“저녁 먹었어요?”

“야간 진료 있는 날은 간단하게 먹어요. 따로 저녁 시간이 없거든요. 샐러드나 샌드위치나 과일 같은 거. 오늘은 그마저도 못 먹었지만.”

“배고프겠다……. 뭐 좀 먹어 가며 일하지 그랬어요?”

또다시 지원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보다 더 생생한 웃음이었다. 정민은 오로지 청각에 의존해 지원의 존재를 확인했다. 더 많은 감각의 욕구를 채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 뭐 먹어요? 그런데 차정민 씨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요즘은 기자들이 할리우드 파파라치처럼 지능적으로 연예인들을 따라다니던데요.”

“원래 인간의 생존 본능은 늘 진화하죠. 뛰는 기자 위에 나는 연예인 있다는 속담 몰라요? 아, 공부 잘한 사람들은 굳이 알 필요 없는 속담인가?”

마음이 조여드는 탓인지 농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원에겐 재미있는 말이었나 보다. 유쾌하고도 짧은 웃음소리가 정민의 달팽이관을 빙글빙글 돌았다.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 번화가로 들어서자 긴장이 풀어졌다. 차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밝게 빛을 뿜어 대는 빌딩들이 눈에 들어오자 비로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지원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밤이랑은 너무 다르죠?”

지원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아주 상투적인 질문을 했을 뿐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많이 다르죠. 달라서 그랬나 봐요. 너무 다른 곳에 있으니까, 나도 그곳에선 서울의 한지원과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말 어렵게 하지 말아요. 지나치게 의미 부여도 하지 말고. 바르셀로나에서 나랑 있었던 사람은 분명히 한지원 씨 맞아요.”

정민은 지원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부지런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목적지는 아주 가까웠다. 보안이 잘된 곳이라 종종 동료 연예인들과 만남을 가지는 레스토랑이었다.

“어쩐지 처음 본 사람 같네요.”

의자에 앉은 지원이 정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2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함께 저녁을 먹던 그때도 지원은 정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이를 어지간히 먹은 사람들보다 더 원숙하게 굴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지원의 눈빛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그럼 처음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나는 한지원 씨를 찾았으니까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미리 예약을 해 둔 덕에 곧바로 음식이 나왔다. 샤프란이 든 파에야와 감바스, 얇게 썬 하몽이 올려진 샐러드가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놓였다. 음식들을 내려다보던 지원이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날이 날이니만큼 스페인식 요리를 주문해 놓은 정민의 노력을 알아챈 거였다.

“일부러 코스 말고 단품으로 주문했어요. 배고플 텐데, 코스는 감질나니까.”

“고마워요. 배가 고픈데도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점심을 그럭저럭 먹긴 했지만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온종일 붕 떠 있었거든요.”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네요. 먹읍시다. 나도 이제야 시장한 걸 느끼네요. 종일 먹은 게 없어요.”

정민은 시원하게 칠링 된 화이트와인을 지원의 잔에 따라 주었다.

2년 전의 지원은 술을 꽤 잘 마셨다.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겨 가며 와인 세 병을 비워 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취하고도 남을 법한 양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딱 적당했다. 웃음만 더 많아졌을 뿐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던 지원은, 정민이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음주 매너가 깔끔했다.

잔을 부딪치고 가볍게 목을 축인 두 사람은 각자의 앞에 놓인 접시에 적당히 음식을 덜었다. 포크를 쥔 지원의 손이 부지런히 테이블 위를 돌아다녔다. 배가 고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지원은 자신의 손을 기웃거리는 정민의 눈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접시를 비워 나갔다.

지원과는 반대로 정민이 음식을 먹는 속도는 조금씩 더뎌졌다. 수시로 불쑥 치고 오는 바르셀로나의 추억이 식욕을 억눌렀다.

무슨 일을 하냐는 정민의 질문에 지원은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세상에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자 그럼 그 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라 했다. 참 기가 막힌 여자였다. 그런데 기막힌 여자의 화법이 자꾸만 정민을 끌어당겼었다.

“음식은 입에 맞아요?”

“맛있네요. 내일 스케줄은 어떻게 돼요?”

“오후에 대본 리딩이 있어요. 촬영은 2주 뒤부터 시작하고요. 혹시 촬영 일정 받은 거 있나요? 어쨌건 지원 씨도 출연하는 배우 중 한 명인데.”

그러고 보니 곧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지원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지원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직은요. 일요일이나 제가 휴무인 화요일로 촬영 스케줄을 맞춰 주시겠다고는 했어요. 단순히 손 대역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 많던데요. 나도 소품용 한복을 입어야 한다면서요?”

“그렇겠죠. 손만 나온다고 해도, 입고 있는 옷의 소매 깃이 보일 테니까요.”

“출연료도 엄청 짜던데. 월급 받고 일하는 의사면서 한의원에 너무 헌신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 생각 말아요. 지원 씨가 「깊은 밤」 출연에 승낙한 건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니까. 모르긴 해도, 한의대 합격했을 때보다.”

지원이 웃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와인을 머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와인은 지원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적당히 배가 차니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다. 지원은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정민을 지그시 바라봤다.

“본인은 모르죠? 지금 본인의 모습이 어떤지.”

“어떤데요?”

“예뻐요.”

지원이 웃으며 내민 잔이 정민의 잔과 다시 부딪쳤다.

“정말 궁금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사라질 생각이었어요? 기차에서 만나고, 같이 바르셀로나를 돌아보고. 저녁을 먹은 뒤 분수 쇼까지 함께 봤던 완벽한 하루였어요. 그 모든 순간 동안 지원 씨는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걸 감췄던 거 같아요. 멍청하게도 나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요. 지원 씨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지원 씨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한지원이라는 이름도 내가 지원 씨 캐리어에서 우연히 봐서 안 거잖아요.”

지원이 고요히 테이블의 한곳을 응시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나 싶더니 다시 영롱한 빛을 띠며 제자리를 찾았다. 와인 한 모금을 더 머금었다 삼킨 뒤에야 지원의 눈길이 정민에게 돌아왔다.

“처음에는 나에게 적극적이었던 정민 씨의 마음을 오해했던 것 같아요. 아니, 정민 씨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걸까요?”

“무슨 뜻이죠?”

“내가 연예인들에 대해 아는 건, 기사를 통해 눈으로 읽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기사라는 게 작은 소식도 요란하게 부풀려 전하는 데 취지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연예계라는 편견이 있었어요. 기사로만 보면 다들 너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잖아요. 친구들이나 간호사들이 찌라시라는 걸 보고 이야기해 주는 가십들은 더욱 기가 막혔고요.”

“쉽게 만나고 금방 헤어지는 건 그 사람의 성향이지 직업으로 분류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지원의 잔이 빈 것을 본 정민은 즉시 잔을 채워 주었다. 지원이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게 맞겠죠. 나에게도 문제가 좀 있었어요. 그때는 내 자존감이 바닥일 때였거든요. 나는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건데도 좋은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고, 그럭저럭 공부도 잘했고요. 그랬는데…… 내 자존심을 짓밟은 일이 생긴 거죠. 그 일의 충격에서 허덕일 때, 스페인에 가게 됐어요.”

“무슨 일인지 묻지 말아요?”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자신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애써 눌렀다. 앞으로 볼 날이 더 많은 여자였다. 천천히 알아 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요. 어쨌건 그 시기에 내 스스로가 느끼는 나는 최악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정민 씨를 만난 거죠. 정민 씨가 대놓고 그랬죠? 첫눈에 반한다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맞아요. 진심이었으니까.”

지원이 떨리는 한숨을 뱉었다. 말을 하는 지원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그런데 정민 씨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정말 별로인 여자인데 차정민이라는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나에게 이렇게 사탕발림을 할까, 솔직히 삐딱했어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를 찾지 않을 거면서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줄까, 내내 의심했죠.”

“진짜 예뻐서 그랬어요. 얼굴도 너무 예뻤지만 말투, 행동, 분위기. 지원 씨의 모든 게 내 눈엔 너무 예뻤어요. 그것도 모르고 나를 바람둥이라 생각했어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차정민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히 느꼈으니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니까 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어요. 과연 내가 이런 관계를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하고요.”

정민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진심으로 지원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래서 더 알아 가고 싶었다. 혹시라도 후회할까 봐 마음을 더없이 솔직하게 표현했다. 너무 혼자서만 앞서 나갔던 걸까? 지원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뒤늦게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