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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일러두기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01 잘 지냈나요?





월요일 오전. 한의원을 찾는 환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전 예약자 명단에는 단 두 명의 예약 환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예약하지 않고 불쑥 들어설 환자가 몇 명이나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평소보다 예약 환자 수가 적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진료를 시작하고 한 시간 남짓, 예약 환자 두 명의 진료를 끝낸 지원이 자리에 앉았을 때, 모니터에는 11시 예약으로 새로운 환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지원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했다. 환자의 이름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유정후라…….’

지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는데 퍼뜩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정후. 그는 만 서른두 살의 남자였다. 어깨를 무리하게 써서 담이 온 것 같다는 접수 내용을 여러 번 읽어 봤지만 그래도 남자의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때 진료실 밖 대기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한의원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탄성 비슷한 소리도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지원이 벗고 있던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며 대기실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 똑똑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진료실 문이 열렸다.

“한 원장님, 11시 예약 환자분 들어오십니다.”

“네.”

어느새 대기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별일 아니었구나, 대수롭지 않게 조금 전 상황을 넘긴 지원은 모니터에 뜬 유정후라는 이름을 클릭했다. 풀썩하고 환자의 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제야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를 함과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한지원 원장님.”

“…….”

순간 지원은 온몸이 굳은 것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지원과는 반대로 눈앞의 남자는 한껏 웃으며 지원을 바라보았다.

남자치고는 긴 머리, 그리고 좀 많이 자랐다 싶은 수염이 곧바로 지원의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해서는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을 한 남자였다. 아마 다른 남자가 긴 머리에 면도하지 않은 얼굴로 앞에 앉아 있었다면, 지원은 당장 저 머리카락과 수염을 좀 잘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 어떤 거부감도 생기지 않았다. 지원이 싫어할 만한 외적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잘생겨 보였다.

입고 있는 하얀 셔츠와 회색 슬랙스는 별다를 것 없는 심플함 그 자체였지만, 그가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해 보였다. 하얀 셔츠의 단추는 제일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단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의 몸은 옷으로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지원은 알고 있었다. 셔츠 속에 숨겨져 있는 몸이 얼마나 이상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지원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엊그제 영화 한 편 촬영 끝냈거든요. 과한 액션 장면을 소화하느라 막판까지 몸을 너무 막 굴렸어요.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드라마도 들어가야 하는데, 왼쪽 어깨가 자꾸 아파서요. 양손잡이지만 주로 왼손을 쓰는 편이긴 한데, 이번에 유독 혹사했네요.”

온몸의 감각마저 잊을 정도로 굳어 있는 지원과는 다르게 ‘유정후’라는 남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말하는 태도가 너무 유연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오른쪽 다리를 들어 왼쪽 다리 위에 얹었고, 지원은 말없이 그 긴 다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한 원장님, 진료 안 하세요?”

지원의 정신을 깨운 건 남자의 뒤에서 지켜보던 김 간호사였다.

“아, 네.”

갑자기 머쓱해진 지원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조용하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너무 놀란 탓에, 평정을 잃고 당황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남자는 왜 갑자기 한의원에 나타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걸까?

“차정민 씨, 유정후라는 사람은 누군가요? 진료 기록이 남는 걸 꺼리셔서 측근의 이름을 빌리신 건가요? 그건 불법인데.”

남자의 등장에 놀랐던 첫 마음이 조금씩 변질되었다. 뭔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골이 났다. 그래서인지 2년 만에 보는 남자에게 지원이 처음 건넨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지원의 목소리가 냉랭하긴 했는지 남자와 김 간호사가 얼굴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확인 절차였다. 지원이 알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분명히 유정후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진료를 받는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어쨌거나 지원이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제 본명입니다. 유정후. 차정민은 예명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예명을 쓴다는 것도 잘 알고, 제 본명도 잘 아는데. 한 원장님께 섭섭하군요.”

그래서였나? 유정후라는 이름이 친숙했던 이유가. 언젠가 검색창에 차정민의 이름을 넣었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싶어 바로 인터넷 화면을 닫긴 했지만, 차정민의 본명이 유정후라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손 좀 주시겠어요?”

곧바로 차정민이 팔을 내밀었다. 지원은 최대한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며 그의 맥을 짚었다.

“잠깐만요.”

지원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 건 차정민의 침착한 저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차정민을 쳐다봤을 때,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간호사님, 제가 한의사 선생님과 조용하게 건강 상담을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 직업이 이렇다 보니, 밖으로 사적인 내용이 나가는 걸 원하지 않아서 드리는 부탁인데,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원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기어코 차정민은 지원과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냈다.

“아, 무슨 말씀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종종 간호사까지 경계하는 예민한 환자들이 있었다. 그 탓인지 김 간호사도 더는 묻지 않고 곧바로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김 간호사가 나가자 지원은 불안해졌다. 이제 정말 피할 수 없이 차정민과 둘만 있게 되었다. 2년 만이었다.

차정민. 그와의 재회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쩌면 매일 그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차정민이라는 남자가 지원에게 남긴 여운은 진하디진했으니까.

그런데도 늘 생각으로만 그려 보곤 했던 일이 갑작스럽게 실제로 일어나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지원은 자신의 판단력이 자꾸만 흐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정민은 지원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한지원 씨, 내가 못 찾을 거라 생각했나요?”

지원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정민이 물었다. 2년 만이었지만 다정함이 가득 찬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지원에 대한 원망이 묻어 나왔다.

“못 찾았으면 했어요.”

지원은 최대한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원 씨를 얼마나 찾은 줄 알아요?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나는 2년이나 한지원을 찾았어요.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것과 이름이 한지원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전혀 없는데도.”

정민은 지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2년 전을 이야기했다. 지원은 멍하니 정민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이까지 가르쳐 주지 않은 건 진짜 너무했잖아요. 당신은 모르죠? 서울에 얼마나 많은 한지원이 존재하는지. 휴, 정말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공허한 혼잣말로 자신의 말을 끝맺은 정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의 눈동자도 목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아까 맥을 제대로 못 짚었어요. 손 다시 주세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지원이 본업에 충실한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정민이 조금 전의 진지했던 얼굴을 싹 지우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정민의 손목을 잡으려던 지원의 손이 순식간에 정민에게 붙들렸다.

“원래 한의사들은 손놀림이 남다른가요? 직업이 한의사라는 걸 몰랐는데도 손짓이 섬세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일 때도 그렇고, 커피를 티스푼으로 저을 때도 감탄했었죠. 어쩌면 저렇게 손끝이 유연할 수 있나 싶어서.”

정민은 꼭 잡은 지원의 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원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순간이 펼쳐져 있는지.

“진료 좀 하게 해 줄래요? 아프다면서요.”

지원 또한 정민과 함께했던 그 순간 속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한 척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원은 정민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프죠, 마음이. 그동안 한지원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고생이 심했거든요. 어깨 따위야 뭐.”

“제발 좀 조용히 해요. 원래 이렇게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어요? 적어도 그날은 아니었던 것…….”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지원이 스스로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지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민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어이없어 지원도 결국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거봐. 웃으니까 예쁘잖아요. 지원 씨도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모른 척하려고 해요?”

“모른 척하려고 한 적 없어요.”

“그래요? 그럼 나 쭉 이렇게 지원 씨를 알은척하면 되는 건가?”

“이봐요, 차정민 씨. 여기는 내 직장이에요.”

목소리를 살짝 높여 보았지만, 자신이 진 게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참아 보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어도 자꾸 잇새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알아요. 그 누구보다 잘 알죠. 명성한의원 미모의 한의사 한지원 씨를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어제 받은 「깊은 밤」 첫 대본에 떡하니 한지원이라는 이름이 있었어요. 송아 역할 손 대역이자, 자문 한의사들 중 한 명으로. 말했지만, 내가 한지원이라는 이름에 2년 동안 예민했거든요.”

차정민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가 내내 궁금했던 지원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 뒤에 찾아오는 후련함 같은 것을 느꼈다.

“잠깐만요, 그 드라마 대본을 왜 차정민 씨가 받았죠? 주연 배우들 명단에 차정민 씨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깊은 밤」은 조선시대 어의들의 삶을 다룬 100퍼센트 사전 제작 드라마로 궁궐 내에서 벌어지는 어의들 간의 세력 다툼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려 낸 퓨전 사극이었다.

드라마 특성상 한의학 전문가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했기에 드라마 제작 팀에서 명성한의원 쪽으로 자문을 요청해 왔다. 명성한의원 대표 원장 권명성이 흔쾌히 협조를 약속함에 따라 드라마 속 침술 장면 또한 명성한의원 한의사들이 어의들의 손 대역을 도맡아 촬영하기로 협의되었다. 명성한의원의 유일한 여자 한의사인 지원은 의녀인 여주인공 송아의 손 대역을 맡았다.

“기존에 캐스팅된 김선범 형이 돌연 출연을 취소했어요. 구미가 당기는 영화 대본이 들어왔다고.”

“그랬군요. 저는 그 소식을 못 들어서요.”

“그랬겠죠. 나도 엊그제 결정한 일이니까. 그래도 인터넷에 떠들썩하게 기사까지 떴는데 못 봤어요? 나 엊그제 대본 받고 어제 곧바로 리딩 시작한 거. 밖에 간호사들은 다 알고 있던데요. 「깊은 밤」이 잘되어야 명성한의원 입장에서도 좋을 텐데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요? 애사심 부족인가?”

정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지원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여유를 찾아 주었다.

“선범 형한테 술을 살 생각이에요. 덕분에 한지원 씨를 찾았으니까. 대본에서 한지원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느낌이 딱 왔어요.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지원은 차정민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큰 키와 우수에 젖은 듯한 갈색 눈동자가 매력인 차정민은, 데뷔와 동시에 드라마 주연을 꿰차며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드라마의 성공과 동시에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그는, 정상의 자리에서 큰 사건 사고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남자. 그 대단한 남자가 지원을 힘들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자꾸 강조했다. 혼란스러운 지원의 마음도 모른 채, 정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곧바로 휴대폰 검색창에 명성한의원을 입력하고 의료진부터 확인했죠. 유레카! 한의원 홈페이지에서 내가 2년간 그렇게 찾았던 한지원이 웃고 있잖아요. 변함없이 예뻐서 밤새 얼마나 휴대폰을 들여다봤는지…….”

지원은 물끄러미 차정민의 오른쪽 어깨를 쳐다보았다. 차정민의 눈을 보고 싶은데, 그러면 2년간 꾹꾹 눌러 온 자신의 감정이 터지게 될까 봐 지레 겁이 나서였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그땐 단정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원은 정민의 안부를 돌려서 물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지원 입장에서는 나름대로의 인사를 건넨 거였다.

“보기 싫죠? 엊그제 끝낸 영화에서 고려시대 장군 역할이었거든요. 사극을 하면 머리카락이랑 수염을 기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분장이 편하니까. 내가 봐도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얼른 정리할 날만 기다렸는데, 어쩌다 보니 또 사극에 캐스팅되어서 이런 꼴로 나타났네요.”

지원은 최대한 느리고 덤덤하게 정민의 모습을 눈에 익혀 갔다. 한눈에 다 담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조금씩 쪼개어 가며 시선을 움직였다. 어느 부분 하나도 놓치기 싫을 정도로 멋진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이 점차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도 이건 좀 아니다 싶긴 해요. 그래도 어쩝니까. 지원 씨가 너무 보고 싶은데.”

정민이 손끝을 자신의 턱으로 가지고 가 수염을 한 번 문질렀다. 언젠가 정민이 말했던 대로 그는 천생 연예인이었다. 사소한 손짓 하나도 사람의 시선을 붙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잘 지냈나요?”

그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던 지원의 눈이 정민의 눈과 마주쳤다. 정민의 목소리는 2년 전에도 지금도 화창한 날씨의 호수처럼 부드럽고 잔잔했다. 지원은 입술을 곧게 펴고 입매 끝에 힘을 줬다.

“잘 지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니, 잘 지냈는데 어딘가 모르게 잘 지내지 못했어요.”

“왜요? 혹시 나를 그렇게 두고 간 게 후회돼서요?”

정민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원은 그의 움직임을 계속 눈에 담았다.

“왜 종종 마음이 공허해지는지, 왜 뭘 해도 큰 의욕이 생기지 않는지 스스로도 좀 고민이었어요. 원인을 찾기 위해 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원지에 차정민 씨가 있었어요.”

“그럼 날 찾아오지 그랬어요? 내가 지원 씨를 찾는 건 어려웠지만, 지원 씨가 나를 찾는 건 쉬웠을 텐데.”

원망하듯 쏟아 내는 정민의 말에 지원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차정민 씨는 나와 다를까 봐서요.”

지원의 허무한 목소리가 진료실 바닥에 내려앉자 정민이 곧바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지원의 뺨을 감싸 쥔 정민의 손은 2년 전과 변함없이 여전히 따스했다.

“이 여자, 단단해 보였었는데…….”

정민의 목소리에는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지원의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나는 한지원 씨와 다르지 않아요. 이렇게 돌고 돌아서 지원 씨 찾아온 걸 보면 모르겠어요?”

지원은 좀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민의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