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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prologue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려는지, 겨우내 창가를 지키던 제라늄이 숨죽인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려나.’ 홀린 듯 제라늄 꽃을 응시하고 있을 때 요란하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서린이 두툼한 갈색 가운을 걸쳐 입었다. 날이 약간 풀리긴 했지만, 볕이 잘 드는 창가를 제외하고는 실내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틈틈이 하는 서빙 아르바이트로는 매달 내는 집세조차 빠듯했다. 더구나 중앙난방이 아니라 값비싼 전기 난방식이라, 겨울에는 난방기를 트는 대신 두꺼운 옷을 입으려고 노력했다. 서린이 털 실내화까지 찾아 신고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주말 아침에 걸려 올 전화가 없을 텐데.’

1년 전, 파리에서 아를로 거처를 옮긴 후, 파리에서 사귄 몇 안 되는 친구들의 소식도 차츰 뜸해졌다.

‘혹시 윤우의 전화가 아닐까.’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그녀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윤우와 파리에서 꽤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그러나 아를로 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와는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진 상태였다. 그다지 유쾌한 이별은 아니었지만, 헤어지고도 여전히 가까운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타국이기 때문이리라.

아를에 정착한 뒤로 부쩍 잦아진 그의 전화가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늦은 밤, 술 취한 목소리로 함께했던 시간 운운하며 과거를 떠올리게 할 때마다, 난감한 기분이 들어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했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그의 전화가 아니기를 바라며, 서린은 가방 속에 있는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인을 보니, 한국에서 걸려 온 정연의 전화였다. 비록 말없이 한국을 떠나왔지만, 먼 타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계신 부모님 소식이 늘 궁금했다.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비서, 정연은 부모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3개월 만에 걸려 온 전화가 반가운 동시에, ‘혹시 좋지 않은 소식인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 서린이니?

다정하게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목이 막혀 왔다.

“네. 저예요.”

― 한국은 오후인데, 그곳은 아직 이른 시각이지?

서린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7시, 평일이라면 서둘러 씻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있었어요. 그보다…….”

서린이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묻는 것조차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 일은 무슨, 그냥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했어.

서린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윤우와 함께 한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프랑스에 도착한 뒤 한국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다만, 정연 혼자만 알고 있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녀에게만 사는 곳과 연락처를 알렸다. 당시엔 이것이 서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잘 지내고 있어요. 축제 기간이라, 요즘은 서빙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지만,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있어요.”

― 윤우와는 가끔 연락하고 지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죽이 잘 맞는 친구였잖아요. 가끔 연락하고 지내요.”

― 차라리 파리에 있지, 왜 낯선 도시에서 터를 잡아.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을 텐데…….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5년이 지났잖아요.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혼자가 익숙해요.”

사실이었다. 혼자보다는 함께 있으므로 더욱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두 번째 사랑마저 실패로 끝났을 때, 결국 삶은 혼자 감내해야 하는 아픔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전화선 너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 하여튼. 고집은.

오랜만에 듣는 정연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전화비가 신경 쓰였다.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인지 엉뚱한 게 다 신경 쓰였다. 외로움과 함께, 부유한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그녀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였다.

겨우내 움츠린 자연처럼, 인내의 시간을 견뎌 내니 따스한 봄바람처럼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남과 어울리는 즐거움보다는 오롯한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다. 느리게 가는 시간과 소박한 음식,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계절의 변화에 감동했다. 그리고 비로소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생각날 때마다, 이따금 잠을 설치고는 하지만.

“엄마, 아빠는 좀 어떠세요. 별일 없죠?”

결국, 참지 못하고 서린이 물었다. 묻는 말에 매번 괜찮다고 대답하던 정연이 오늘따라 대답이 느렸다.

― ……그게, 회장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셔. 최근 회사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수습하느라 애먹었거든.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

그녀의 아버지, 하 회장은 한 기업을 책임지는 경영자라는 타이틀에 맞게 강한 정신력과 남다른 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지난 5년간 마음이 흔들릴까 봐 애써 한국 소식을 피했는데, 갑작스럽게 이런 소식을 들으니 심장이 조여 왔다.

― 심각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최근 건강 때문에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요양하시는 중이야. 근데 나이 탓인지, 요즘 들어 부쩍 네 이야기를 하셔. 믿고 기다리자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시지만, 그래도 네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시는 눈치야.

잠깐이라도 한국을 다녀올까. 하지만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 얼굴을 뵐 수 있단 말인가.

― 회장님 건강도 건강이지만, 그보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연이 전화한 이유는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짧은 침묵을 참지 못하고 서린이 재촉하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 지금 회사 사정이 안팎으로 좋지 않아. 강태인 실장 덕분에 위기는 모면했지만, 작전 세력까지 붙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닌가 봐.

태인의 이름을 듣자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사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태인 오빠가 그동안 아빠 밑에 있었어요?”

― 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연수원 마치고 법무팀으로 들어와서 지금껏 회장님을 도왔어.

그녀가 사라진 빈자리를 그가 채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엉켜 왔다.

“몰랐어요.”

― 그동안 담쌓고 지냈으니, 모를 만도 하지.

태인과 서린의 관계를 알 리 없는 정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근데, 위기를 모면하다니,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 몇 년 전부터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았잖아. 게다가 지난해부터 이런저런 사고가 터지면서 해외 수주 건 줄줄이 취소되었어. 사고 처리에 자금난까지 겹쳐서 법정 관리까지 갈 뻔했는데, 강 실장이 선후배 인맥 총동원해서 막았어. 사고 건도 피해자 가족 일일이 만나서 합의 끌어내느라 정말 애먹었고.

서린의 조부가 맨손으로 일군 혜성 그룹은 여러 계열사가 있지만, 건설에 중점을 둔 기업이었다. 조부에게 혜성 그룹을 물려받은 서린의 아버지, 하 회장은 오래전부터 좁은 국내 시장보다는 해외 수주에 중점을 두고 사업을 확장해 갔다. 국내 1, 2위를 다툴 만큼 규모가 크고 그 못지않게 내실 있는 기업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건설 경기가 악화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접해 왔었다.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작전 세력은 또 뭐예요?”

― 사실 간신히 고비를 넘겼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거든. 회장님께서 가진 지분을 일부 넘기는 조건으로 다른 계열사의 도움을 받았고, 그 일로 그룹 내의 입지가 많이 흔들렸어. 이번 일을 계기로 회장님은 아예 차기 대표를 강 실장으로 점찍으신 거 같아. 사실 지금으로서는 혜성 건설과 회장님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강 실장밖에 없으니까.

태인은 혜성 그룹의 장학생 출신으로 서린의 부친인 하 회장이 아들처럼 의지하고 아끼던 사람이었다.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요?”

― 이사회를 앞두고 회장님께서 고민이 많으신 거 같아. 강 실장을 차기 대표로 밀어야 하는데, 뿌리 자체가 혈연으로 이루어진 회사이다 보니, 주변 반발이 만만치 않아. 게다가 은밀한 소식통에 의하면 하 이사가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여서 장난질하는 거 같아.

서린의 숙부인 하 이사는 사려 깊고 통찰력 있는 부친과는 달리, 과하다 싶을 만큼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일부 계열사를 물려받고도 그룹 일에 사사건건 관여한다고 어머니가 푸념하는 소리를 자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돼요?”

서린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평소 말을 아끼는 정연이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을 보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 어제 강 실장이 네가 있는 아를로 출발했어.

느닷없는 말에 서린의 말문이 막혔다.

― 그간 잘 몰랐는데, 강 실장이 잠적한 너를 찾으려고 그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던 모양이야. 우리가 연락한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는지, 며칠 전 찾아와서 네 주소를 묻더라.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다른 건 몰라도 회장님 일이 걸려 있으니, 차마 거절을 못 했어.

“미안하긴요. 제가 무슨 낯으로 그런 사과를 받아요. 아무리 제 생활이 중요해도, 가족인데 함께 도와야죠. 그동안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회사 경영은커녕 경제지조차 읽지 않는 서린이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이런 어려운 시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사람 된 도리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태인을 다시 만난다고 하니, 겁이 덜컥 났다.

“비행기 시간을 알려 주세요.”

― 정확한 시간은 잘 몰라. 어제 출발했으니, 아마 지금쯤 도착하지 않았을까? 전화 끊고 강 실장 전화번호를 찍어 줄 테니, 직접 통화해 봐.

“네, 그럴게요. 그리고 대충이라도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 강 실장은 네가 가진 지분이 필요할 거야. 그리고…….

정연이 또다시 말을 흐렸다.

― 아니다. 이건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니까, 일단 강 실장을 만나 봐.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결국 네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니까.

정연이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라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주방 앞을 서성이던 서린이 거실 곳곳에 놓여 있는 캔버스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화구를 바라보았다. 작업실과 주거를 겸한 공간이지만, 시간과 함께 미술 도구며 그림이 쌓이다 보니, 집이 아니라 작업실에 더 가까워졌다. 그림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끼니를 거르는 일이 허다하니, 주거 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색하긴 했다.

태인이 이곳으로 온다니, 온갖 생각이 뒤엉켜서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샤워부터 하고 작업실을 정리한 뒤에 그가 오면 차분하게 상황을 들어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욕실로 들어간 서린은 샤워를 마치고 세탁해 놓은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거울을 보니, 어딘가 까칠해 보이는 안색이 마음에 쓰였다. 가벼운 화장이라도 할까 하다가, 새삼스럽다 싶어서 연한 핑크색 립글로스만 가볍게 바르고 말았다. 어질러져 있는 화구를 치우고 정연이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어째선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갔다. 평소 주말이면 이민자들이 많이 찾는 아침 시장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차를 마셨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가로운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는 했는데, 오늘은 소소한 즐거움 대신에 집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