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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완벽하다
1화
그녀
1. 완벽남의 프로포즈


내 남편은 완벽하다.
키 185에 군살 없고 탄탄한 몸. 이탈리아 조각상 뺨치는 완벽한 얼굴선. 그를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금테 안경 밑에 빛나는 별빛 같은 눈동자.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아름다웠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그 얼굴보다 딱 2% 더 멋지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정도로 외모가 잘났으면 성격이 까칠할 것이라 믿고 싶겠지만, 이 남자는 그마저 완벽하다. 그와 함께했던 지난 6개월간 나에겐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짜증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얼굴엔 늘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목소리는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오랜 외국 생활 덕인지 세련된 매너까지 몸에 배어 있다. 차에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기본이요, 길을 걸을 땐 늘 내 어깨를 살포시 감싸고 길 안쪽으로 에스코트한다. 이런 그와 함께 거리에 나서면 뭇 여성들의 시선이 따갑다.
‘뭐야 저 여자.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저런 멋진 남자랑?’
‘아마 여자 집이 부자겠지. 재벌 집 딸 아닐까?’
이런 수군거림은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어쩌겠는가, 너무 잘난 남자와 사는 세금이라 생각해야지. 그와의 결혼 생활이 5개월에 접어든 지금은 그런 질시의 눈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 이 잘난 남자가 내 남편이다. 슬며시 어깨에 힘도 줘 본다.
‘완벽한 외모에 자상한 성격, 세련된 매너. 그렇다면 머리가 비었겠지, 아니면 통장이 비었든가.’
‘그 남자 백수 아냐?’
‘혹시 바람둥이? 네 유산을 노리는 사기꾼?’
내가 이 남자와의 결혼을 공표하고 일주일 만에 후다닥 식을 올리기까지 내 친구들조차 가자미눈을 하고 그를 의심했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를 밝혀내려 애썼지만 결국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는 좋다 못해 천재였고 통장 잔액은 헤아릴 수 없음이요, 백수는커녕 국내 최고 대학의 최연소 교수님이었다. 다른 여자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순정남이었고 지금 거주하는 호화 빌라는 혼인신고와 함께 내 명의로 해 주었다.
이쯤에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 이 결혼 허락 못 한다는 시어머니나 뒷목 잡고 쓰러지는 시아버지가 등장해 줘야 말이 되는 거 아닐까?
“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완벽할 수가 있니? 이건 뭐 하다못해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나 심술부리는 시누이라도 있어야지. 어떻게 네 남편은 골치 아프게 하는 시댁조차 없니? 이거야말로 사기다, 사기. 재민 씨는 존재 자체가 사기야.”
자타공인 연애박사 지영이는 한마디로 이렇게 내 남편을 정의했다. 시쳇말로 ‘사기 캐릭터’. 이 세상에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완벽한 남자라고.
이런 완벽한 남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르렀는지 다들 궁금해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평범한 스물다섯 살인 내가, 로맨스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남자를 현실에서 만난 것도 기적인데 그 남자가 나에게 반하고 프러포즈를 하게 되다니……. 언빌리버블!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도 가끔은 이곳이 어딘가, 이 행복이 꿈인가, 생시인가 믿어지지 않아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만남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철없던 스무 살,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영원히 떠나보내고 혼자서 외롭게 살아왔던 내게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으니 이제 좋은 남자 만나 따뜻한 가정 꾸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지 않다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완벽한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그날 그가 강남의 그 많고 많은 컵케이크 가게 중 하필 나의 작은 가게에 들어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러서 컵케이크를 하나씩 사 갔다는 것도, 한 달 후 나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도, 모두 다.

“컵케이크 좋아하시나 봐요?”
“아, 그게 사실은…….”
그가 가게에 들르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수려한 외모에 첫눈에 반하긴 했지만 이렇게 매일 찾아오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었다.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나는 그가 오늘도 올까, 궁금해졌고 차츰 기다리게 되었다.
“남자분들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시던데…….”
“사실 저도 안 좋아합니다.”
“네? 그럼 왜 매일?”
내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웃기만 하는 그 남자 때문에 내 뺨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정다은, 정신 차려! 지금 너 착각하는 거니? 저런 완벽남이 설마 널 보러 매일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야, 아마도 여자 친구가 컵케이크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 그래서일 거야.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증세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그 남자가 오는 오후 5시가 가까워지면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나 왜 이러지.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정말 주책없게, 이 나이에. 후아!
달아오른 두 뺨에 차가운 손등을 대며 심호흡을 해 보지만, 두근대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제 명에 못 살고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그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오후 5시경에 와서 내가 추천하는 맛의 컵케이크를 딱 하나만 사 간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아주 잘생겼다는 것 말고는.
그런 그 남자의 청혼을 만난 지(정확하게는 만난 게 아니라 얼굴을 본 지) 한 달째 되던 날 받아들인 건 나도 설명하기 힘든 일이니 그냥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해 두자.

“오늘은 이거 한번 맛보세요. 제가 새롭게 개발한 컵케이크예요. 남자분들도 좋아하시게 단맛을 줄이고 위스키를 가미했는데…….”
깔끔한 슈트 차림에 넥타이까지 단정히 맨 그는 숨이 막히게 멋있었다. 그를 보면 떨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난 컵케이크만 내려다보며 속사포처럼 떠들어 댔다.
“이 반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놀라서 고개를 들자 하늘빛 티파니 상자 안에서 빛나는 은반지가 보였다.
“네에?”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뭐지? 지금 이 멋진 완벽남이, 나한테, 프러포즈 하는 거야?
“매일 아침, 다은 씨의 커피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모닝커피처럼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이고 있는 이 상황이 그저 꿈만 같았다. 어떡하지? 나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엉켜 있던 생각들이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네!”
나는 그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나 자신이 무모하다고 여겨질 때가 간혹 있다. 바로 이 순간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를 놓치기 싫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는 그의 손은 따스했고, 외롭던 마음에 행복이 잔물결처럼 번져 갔다.

이것이 내 완벽한 남편의 프러포즈였고, 지금부터 시작되는 우리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2. 레드벨벳(1)


“그러니까, 너네…… 아직…… 한. 번. 도?”
연애박사 지영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자 그녀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냈다.
“응, 한 번도.”
“결혼 5개월, 만난 지 6개월 넘었는데, 아직 한 번도?”
“그 사람이 신혼여행 때 그랬거든. 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서로를 알아 가자고…….”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도 곧 수긍했었다. 워낙 급작스럽게 한 결혼이라 갑자기 다가가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슬슬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비정상이든 남편이 비정상이든, 아니면 둘 다든. 아무튼,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단짝 지영에게 슬쩍 고민을 상담한 건데, 그게 이렇게까지 펄쩍 뛸 문제일 줄은 몰랐다.
“하이고! 참 천천히도 알아 간다. 쯧쯧.”
혀를 차던 지영이 다시 내 앞에 고개를 쑥 들이대고 물었다.
“키스는? 키스는 했겠지, 설마?”
“응, 그야 물론 했지. 종종 뽀뽀해, 우리.”
“뽀뽀?”
“응. 볼에 쪽, 가끔은 이마에도 쪽!”
“풉! 뭐냐, 너네. 소꿉장난하니?”
지영이가 기가 막힌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다. 우린 어쩜 소꿉장난하는 애들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매사에 완벽한 사람이니 연애 숙맥인 나를 알아서 잘 리드하리라 믿어 왔건만, 허우대만 번지르르했던 건지 그는 아직도 신부인 나를 고이 모셔만 두고 있다.
“그래, 그거야. 너의 그 완벽한 남편님 결점은 바로! ……그거라고.”
“그게 뭔데?”
“네 남편, 고잔가 봐.”
“고자?”
조금 전까지 온통 무지갯빛이던 내 세상이 지영의 그 말 한마디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고자! 고자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제야 외로움 끝, 행복 시작이라 외쳤던 내게 고자 남편이라니!
“어쩐지, 너무 술술 풀리더라. 어떻게 그런 완벽남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했다.”
“설마…….”
“설마는 무슨! 남자 나이 서른이면 한창때인데 이상하잖아. 남녀가 한 지붕 밑에서 다섯 달을 같이 살았으면, 아무리 각방을 써도 지금쯤은 덮쳤어야 정상이지. 남도 아니고 신혼부부가 이게 뭐냐고. 어휴!”
지영은 세상이 무너진 듯 한숨을 폭폭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애박사 지영이 남자를 볼 때 제일 중요시하는 게 속궁합이었다.
아무리 멋있어도 하루 이틀이지 얼굴 뜯어 먹고 살 거냐, 돈이면 다라지만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냐 하면서. 남녀 간의 사랑은 따지고 보면 다 그것, 음양의 조화라고 누누이 말해 온 그녀였으니까.
“다은아, 너 그 사람 진심으로 사랑해?”
“진심으로?”
“응. 그러니까 평생 수녀처럼 살아도 될 정도로 사랑하냐고.”
그를 보면 늘 가슴이 설렌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설렐 것 같은 나의 이상형이자 내 꿈속의 왕자님이다. 하지만 평생을 수녀처럼 살라면…… 그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수녀처럼은 글쎄…….”
“야, 당장 이혼해. 아직 애 없을 때 갈라서. 요즘 섹스리스 부부가 왜 사회적 문제겠니.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지금은 신혼이니까 그 잘난 얼굴 뜯어 먹고 살 거 같지? 아니야. 너 나이 들면 들수록 허무해진다. 남편 사랑받는 여자는 얼굴에 윤기가 좔좔 흐르지만, 소박데기 여자는 기미가 한 바가지야.”
내 친구 지영이는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연애 고수이자, 시집간 언니 둘에 네 명이나 되는 사촌 언니들 영향으로 결혼 생활에 대한 이론까지 빠삭했다. 그저 지영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연애는 성공이요, 결혼 생활도 순탄할 게 틀림없다.
“왜에?”
여전히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한지 지영이가 말꼬리를 길게 빼며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 이유 하나로 이혼을 하니?”
“얘가 이렇게 뭘 몰라. 너, 그거 이혼사유야. 그것도 중대 결격사유. 배우자의 성적 욕구를 무시하고 정서적 육체적으로 방임한 죄. 하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순진한 정다은 씨가 알 리가 있나. 네가 그리 어수룩하니 그 남자의 덫에 걸린 거야. 봐라, 봐! 얼굴에 딱 쓰여 있네. 난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냐, 네가. 응? 어느 날 왕자가 짠 하고 나타나 키스 한 번 하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 결혼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는 거냐고!”
이럴 때면 지영이는 잔소리꾼 엄마이자 오지랖 넓은 언니가 되어 버린다. 사실 지영이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 비록 법적으론 유부녀지만 생물학적 처녀인 지금,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건 나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