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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뒤돌아선 하준이 화이트보드에 평가 기준과 점수를 적었다. 과목 첫 시간은 늘 그렇듯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됐다. 어떤 방식으로 강의가 진행될지, 대충 날려썼는데도 유려한 필체가 돋보였다.

“일단, 과목 이름은 번지르르하게 해 뒀는데, 별거 없어. 다큐를 찍든, 뭘 하든 너희가 좋을 대로 해. 회사 아니고 학교니까.”

“네!”

“좋아. 다음 주부터 삼 주간은 이론 수업으로 진행될 거고, 그다음부턴 바로 PPT 팀플 과제 시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름 현직 실무진이니까 도움은 될 거야.”

대학생들에게 ‘팀플 과제’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사방에서 야유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준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며 말을 이었다.

“학기 성적은 작품, 발표 및 피드백 부분이 70점. 출석이 30점. 점수 낮다고 출석 무시하지 마라.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아, 물론 예외도 있다.”

하준은 요즘 애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단영의 남동생도 스물한 살 새내기라 뭘 가장 곤욕스러워하는지 안 봐도 뻔했다.

“남자 친구가 말도 없이 군대 휴가를 나왔다든가, 입대 날이라든가,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든가, 오늘만큼은 죽어도 학교에 가기 싫다든가, 하필 오늘이 그날이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다든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떤 이유에서든 강의 제끼는 거 정확히 딱 두 번만 봐준다. 같잖은 거짓말로 핑계 대지 말란 뜻이야. 걸리면 얄짤없으니까.”

시원시원했다. 획기적이면서도 파격적인 하준의 통보에 강의실 안으로 ‘와아아―!’ 하는 함성이 가득 차올랐다.

역시 시오전자가 낳은 기획부서의 스타, 도하준! 도하준! 아이돌 콘서트에 온 팬들처럼 구호까지 붙여 가며 찬양했다. 그 가운데, 짓궂은 학생도 물론 존재했다.

“교수님, 그날이 뭔데요? 잘 모르겠어요.”

하준은 그래? 하며 질문한 여학생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월경, 또는 생리. 사전적인 의미로는 성숙한 여성의 자궁에서 주기적으로 출혈하는 생리 현상을 뜻하는데, 더 말해 줘?”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임신하지 않은 경우, 황체에서 호르몬 분비가 감소하기 때문에…….”

“꺄― 됐어요.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엄마야, 적당히 까불래!

별난 교수 오빠가 왔다며 까르륵 자지러졌다. 졸지에 ‘교수 오빠’란 수식어가 붙게 생길 판국이다. 무심한 하준의 성격에 여학생들만 신이 났지, 남학생들은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첫날이니까 출석은 건너뛴다. OT 때 교수가 자기애 과시하면서 세 시간 꽉 채우면 뒤에서 신랄하게 까고 놀 거 다 아니까 이쯤하고 끝낼 생각인데, 질문 있어?”

“교수님 휴대폰 번호요!”

“내 번호 비싸. 전달 사항 있으면 조교 통해서 할 거야. 강의 제끼는 사유도 조교한테 보고해.”

“조교님 안 그래도 교수님들이 못살게 군다고 불만 엄청나던데요?”

“그래? 그럼 대표 한 명 정해서 연구실로 보내.”

겸임 교수는 연구실이 없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어렵게 모셔 온 인물이다 보니 하준에게만 특별히 제공되었다. 한 번을 물러서지 않고 대응하는 하준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철벽도 저런 철벽이 없다.

“질문 없으면 끝. 그만 사라져.”

마지막 인사마저 쿨내가 철철 넘친다.



*



CF 광고, 화보 포스터 촬영이 주 업무인 <오브> 스튜디오는 색다른 촬영 기법과 출중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어, 이 바닥에선 꽤 인정받고 있는 업체였다.

스튜디오 직원들은 대부분 해외 촬영 때문에 자릴 비우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일정 오프로 당첨된 단영과 그녀의 대학 동문 후배인 은효 단둘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여유였다. 물론, 다음 주부턴 꽉 채워진 일정 때문에 숨 쉴 틈조차 없이 바빠지겠지만, 단영은 지금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싶었다.

“아…… 비 오네.”

힐끔 날씨를 확인한 단영이 중얼거렸다.

출근할 때부터 우중충한 날씨가 어째 위태롭다 했더니, 이내 떨어진 빗방울이 토옥, 톡 창문을 두드렸다. 반가운 봄비가 찾아왔다.

“선배.”

자리로 다가온 은효를 발견한 단영이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을 슬쩍 떼어 냈다.

은효는 단영의 밑에서 포토그래퍼 일을 배우고 있는 남자 후배였다. 그를 볼 때마다 남동생 단태가 생각나, 부쩍 정을 주게 됐다.

“응?”

“저, 작업 다 끝나서 먼저 퇴근해 볼게요.”

“벌써?”

그 말에 억울하다는 듯, 은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라뇨. 밤샘 작업 하느라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갔는데.”

정말이었다. 그의 눈 밑으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하며, 어제와 같은 옷차림, 부스스한 머리가 작업 과정이 얼마나 고됐는지를 대신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일 때문에 정신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러냐.”

일은 무슨. 남자한테 대차게 차이고 다니느라 정신없었지.

바늘로 양심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 들었으나, 굳이 후배에게 치부를 드러낼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한 단영은 급히 화두를 돌렸다.

“……어쨌든 수고 많았어. 아, 그리고 이번에 네가 작업한 그 여배우 있잖아. 누구였지?”

“서윤지요?”

“응. 퇴근하는 길에 서윤지 씨 매니저한테 작업 끝났다고 문자 하나 넣어 줘. 안 받으면 엔터로 직접 해 주고. 오늘까지 확답받아야 돼.”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은효는 대답 대신 깊은숨을 푸욱 내쉬었다.

“선배. 저 다음부턴 서윤지 씨 일 또 들어오면 작업 패스하면 안 될까요?”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세요. 다짜고짜 없는 가슴을 D컵으로 만들어 달라고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 기껏 키워 줬더니 뭐라는지 압니까?”

“뭐라는데?”

단영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그건 D컵이 아니라, B 85거든요? 여자 가슴 안 만져 봤어요? 이래요.”

서윤지의 새침한 말투를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은효가 우스워, 단영은 그만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배, 이건 웃을 일이 아니에요. B 85. 와, 나 진짜. 한 소리 하려다가 찡찡거리는 거 듣기 싫어서 대충 알겠다 했거든요? 근데 이번엔 축 처졌다고 다시 줄여 달라잖아요. 지가 원하는 모양은 이게 아니라면서. 뭐라더라, 물방울 모양?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어요.”

“…….”

“대체 가슴 수정만 몇 번을 했는지 몰라요. 뭣보다 매번 새벽 시간대만 골라서 연락하는데, 기본 매너가 없는 건지, 대놓고 엿 먹이겠단 의도인 건지…….”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는 은효 앞에서 단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참아. 연예인들 까탈스러운 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

“거기서 끝났으면 말도 안 해요. 허벅지 줄여 달라, 턱 깎아 달라, 눈 키워 달라. 심지어는 발목까지 얇게 해 달라잖아요. 저 무슨 성형외과 의사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요.”

은효의 불만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뒀다간 주야장천 밤새도록 신세 한탄할 게 뻔했다.

단영은 우쭈쭈, 그랬어? 내 새끼, 수고 많았어. 하며 어화둥둥 은효를 달래 주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화기가 가라앉은 모양이다. 은효는 그만 가 보겠단 말을 끝으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어휴…….”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된 단영은 기지개를 쭉 켰다. 때마침,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웬일이야?”

발신자는 하나뿐인 막둥이 혈육, 단태였다.

― 멀쩡한 집 버려두고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건데.

퉁명스러웠지만 꼴에 하나뿐인 남동생이라고, 외박한 누나가 걱정은 됐나 보다.

“아, 미안. 나 어제 술 많이 마셔서 도하준 집에서 잤는데, 말해 주는 걸 깜빡했다.”

― 하준이 형이 누나 술 취한 거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

“말도 마. 안 그래도 출근할 때까지 주야장천 잔소리 들었으니까. 귀 떨어지는 줄 알았어.”

― 잘하는 짓이다.

어째, 누군가를 절로 생각나게 할 법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단태는 유독 하준을 잘 따랐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라며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준의 모교에 입학하고 말겠다며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되겠어? 무려 한국대야.’ 단영은 코웃음 쳤지만 그녀를 대놓고 비웃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한국대 수시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기어코 하준의 대학 후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민재는 뜻밖의 쾌거에 단태를 업고 방방 뛰었었다. 집안 경사가 났다면서. 물론, 무뚝뚝한 세훈과 하준은 수고 많았다며 단태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단영이 컴퓨터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2시 30분.

“학교야? 밥은?”

― 먹었어.

“군대는 언제쯤 갈 생각인데? 우편물 보니까 병무청에서 온 거 있더라.”

― 1학년 종강하면 바로 갈 거야. 하준이 형 말로는 그때가 시기적으로 제일 좋댔어.

단영이 열여섯 살이었을 때, 단태는 고작 코찔찔이 아홉 살 난 초등학생이었다. 그 초딩이 언제 이렇게 커서……. 그녀는 새삼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체감했다.

하준이 자신을 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째 기분이 묘하다.

― 누나.

대뜸 단태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가라앉았다.

“왜?”

― 엄마랑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단영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 누나 일 바쁜 거 알고 입장도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연락은 자주 좀 해. 미우나 고우나 엄마잖아. 하준이 형한테 미안해 죽겠어.

“네가 도하준한테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는데.”

순간, 단영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단태가 한숨을 밀어 내며 말을 이었다.

― 엄마가 통화하면서 말해 줬는데, 하준이 형이 우리 대신 꼬박꼬박 잊지 않고 부산 다녀갔었대.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많이 나눴다더라. 솔직히 누나보단 형이 훨씬 더 바쁜 사람이잖아. 미안하지도 않아?

아, 도하준 진짜. 그는 매번 이런 식으로 뒤에서 자신을 나쁜 년, 불효녀 만드는 데 선수였다. 단영은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 용돈도 드렸다는데, 워낙 큰돈이라 받기가 너무 미안해서, 엄마가 어쩔 줄 몰…….

“무슨 소리야. 엄마 용돈은 내가 매달 보내 주고 있는데. 도하준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사람 몹쓸 년으로 만들고 있어.”

― 오버하지 마. 그런 거 가지고 누나 몹쓸 년이라 생각할 사람 한 명도 없으니까.

단영이 입술을 꽉 물었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준이었다. 너 두고 보자. 단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최단태. 잠깐 전화 끊지 말고 기다려. 양반 되기 글러 먹은 인간한테 전화 왔어.”

― 그냥 끊고 형 전화 받아. 누나가 그렇게 반응할 거 예상하고 형이 절대 말하지 말라 했는데……. 어쨌든 형한텐 뭐라 하지 마. 내 입장만 난감해지니까.

단영은 전화를 끊자마자 부재중으로 떠오른 하준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

그 당시의 엄마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한 상태였다. 음주, 도박을 일삼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와, 24시간 식당 주방 일을 해야 했던 엄마의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도박에 필요한 밑돈이 부족해질 때면, 그는 매번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돈을 갈취해 갔고, 엄마가 절대 안 된다며 극구 거절하기라도 하는 날엔, 온갖 가전제품과 물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어려서부터 제법 눈치가 빨랐던 단영은 그런 상황이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애써 의연한 척 굴며 저보다 어린 단태를 옆집에 맡겨 놓곤 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빈집을 치우는 건, 늘 단영의 몫이었다.

“이해는 한다고, 나도…….”

머리로는 알겠다. 엄마이기 이전에 지아비에게 맘껏 사랑받고 싶은 여자일 테고,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란 걸. 그래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도중에 도망친 그녀를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용서하고 이해하려 노력은 해 봤지만,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큰 숨을 들이마셨다.

때마침 하준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다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도하준은 잘못한 게 없어. 단영은 마음을 다잡으며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어.”

― 전화받는 태도 봐라.

낮은 음성이 단영의 고막을 울렸다.

“새삼스럽게 무슨.”

― 흘려듣지 말고, 고칠 생각부터 해.

누가 교수 아니랄까 봐.

단태와의 통화로 진작 예민해진 상태에서 호통까지 듣게 되니 단영은 더 삐뚤어졌다. 짜증도 났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고맙기도 했다. 이 감정은 대체 뭔지.

3분쯤 흘렀을까. 지금처럼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침묵이 단영은 싫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정적을 깨려 하지 않았고, 하준 역시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며 닦달하거나 추궁한 적 없이 차분히 기다려 주곤 했는데, 그게 참 편안했다.

한 가지 주제를 두고 토론 아닌 토론이 벌어지거나, 미묘한 감정의 골 때문에 다툴 위기가 되면 이 방법이 명약이었다. 어느 정도 침착함이 찾아오자, 먼저 말문을 튼 쪽은 단영이었다.

“비 온다.”

― 그러네.

다소 뜬금없는 말에도 하준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었다.

― 화는. 다 풀렸고?

“화난 적 없거든.”

― 그래, 그렇다 쳐.

싱겁긴. 금방 포기할 거면서 묻긴 또 왜 물어봐. 단영은 괜히 궁금해졌다.

“궁금하지도 않아?”

― 앞으로 배고프면 말로 해. 짜증 부리지 말고.

“야.”

― 오빠.

됐다. 말을 말자.

“학교는 어때? 애들이 짓궂게 굴거나 하진 않았어? 최소한 멘탈 정돈 나갔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다?”

― 내가 너냐.

하여간, 뭔 말을 못 해요. 단영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욕했다.

― 최단영. 너 지금 내 욕 했지.

귀신이 따로 없다. 괜히 덜미 잡혔다간 앞으로 지겹도록 휘둘려야 했기에, 하준의 질문을 무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