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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21화

고정 관념 비틀기 (3)





개인 작업실로 돌아온 나를 반긴 것은 깰룩이였다.

“오셨습니까, 깰룩?”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깰룩?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 레이자냐는 좀 어때?”

다시 떠올리기 싫어 말을 돌리자, 깰룩이는 금세 넘어가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전보다 더 악화됐습니다. 하지코 말로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대요, 깰룩.”

“이런, 조만간 한번 찾아가 봐야겠네.”

“저랑 같이 가시죠, 깰룩.”

깰룩이는 구슬픈 표정으로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아, 방어전 이벤트 보상 반응은 살펴봤어?”

“코스튬 박스요? 폭발적이에요, 깰룩. 여기 커피요.”

“땡큐.”

나는 곧바로 커피를 목구멍에 때려 넣었다. 깰룩이가 기겁을 하며 바라보았다.

“마르디노 님! 그, 그거 뜨거운 건데…….”

“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그 미친놈 때문에 계속 머리통 굴리느라 당 떨어지는 느낌이었는데. 역시 커피는 믹스가 최고지.

“괘,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닙니다. 그래서 새 던전은 어떠셨습니까, 깰룩.”

컵을 돌려주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한 번 더 패치를 해야 할 것 같아.”

“예? 몬스터 노조원들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던데요? 유저 이용률도 높고.”

“그, 그냥 간단한 구조 조정이야.”

애써 눈길을 피하며 펜을 집어 들자, 깰룩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피 잔을 치웠다.

“깰룩아, 혹시 플레이어가 올라타지 못할 법한 오더코르트인들 알고 있냐? 하늘 날 줄 아는 녀석들로.”

“많지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고냐스카족, 기아스토족, 미엘라족, 위코르프족…….”

“위꼴? 걔네 24시간 활활 불타는 녀석들이지?”

“맞습니다, 깰룩.”

재빨리 기획안을 다시 수정했다.

“비룡이들 대신 그 녀석들 넣으면 되겠다.”

“깰룩?”

“아, 제작 팀 쪽에 연락해서 다음 패치 때 신규 던전들 스테이지 변경 있을 거라고 스케줄 비워두라고 좀 해줘.”

“알겠습니다, 깰룩.”

깰룩이는 현명하게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서 메시지 마법의 수식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똑똑.

작업실 문밖에서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술술 써 내려가던 마당에 또 누구야.

짜증을 담아 손짓하자, 깰룩이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뛰어갔다.

“누구십니까, 깰룩?”

“나네, 드라비라.”

그 소리에 깰룩이는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았다.

“열어주지 마.”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차단 마법을 걸었다.

깰룩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똑똑.

“사긱 군,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네. 문 열게나.”

나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아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문밖에서 다시 배불뚝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깰룩이 자네, 회장을 이렇게 문전박대할 셈인가?”

깰룩이는 울상이 되어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절대, 절대로 열어주지 마.”

“깨, 깰룩.”

깰룩이는 구석에서 흰 머리털을 움켜쥔 채 쪼그려 앉았다.

역시 깰룩이는 내 최고의 조수다.

문 너머는 곧 조용해졌다. 차단 마법에 의해 포탈도, 이동 마법도 먹히지 않아서인지 배불뚝이는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잘했어.”

하지만 어쩐지 깰룩이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너 어째 칭찬을 해주는데도 기쁘지 않은 것 같다?”

“아, 아닙니다, 깰룩! 아주 기쁩니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깰룩이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

나와 깰룩이는 동시에 눈을 맞추고 숨을 죽였다.

“저, 마르디노 님? 안에 계세요?”

퍼롱이의 목소리였다.

“면접이 끝난 건가?”

“끝날 시간이긴 합니다, 깰룩.”

“하긴, 배불뚝이가 온 걸 보면 끝난 거겠지.”

조용히 다가가 문을 잡아당겨 열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퍼롱이가 보였다.

“마르디노 님! 저 면접 붙었어요!”

퍼롱이는 팔을 번쩍 치켜든 채 폴짝폴짝 뛰었다.

“그랬겠지. 내가 붙을 거라 했잖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업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붙였다네. 자네의 부탁대로, 시나리오 작가로 말일세.”

“응?”

퍼롱이의 뒤에서 배불뚝이가 히죽거리며 징그러운 얼굴을 내밀었다.

“잘 있었나, 사긱 군.”

“…이 새끼, 페이크냐?”

“사긱 군, 자네 날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닌가?”

배불뚝이는 턱에 붙은 촉수를 짤막한 손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직원들이 날 싫어하는데, 명색이 비즈니스 파트너인 자네까지도 날 싫어하면 어찌 되겠나.”

“파트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회사에 너 좋아하는 녀석이 있는 게 이상하지.”

그러자 배불뚝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꺽꺽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인기 스타였다네.”

“인기 스타가 다 뒈졌다. 이번엔 또 뭔 거지 같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용건이나 빨리 말하고 사라져.”

“껄껄, 별다른 게 아니라 자네가 파라알의 이상 현상을 해결했다는 소릴 듣고 왔네.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해.”

“하, 자네는 역시 오더코르트를 구할 영웅이 확실해.”

애써 홱 돌아섰지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자네는 진정한 용사야. 우리들을 구원하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용사.”

“…….”

정신 차려라, 나석익. 여기서 넘어가면 지는 거다.

“자, 우리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나! 우주가 선택한 용사인 자네가 오더코르트의 천재지변을 어떻게 막아냈는지!”

나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멍청한 새끼, 알랑방귀도 못 껴요.”

배때기를 퍽 밀치자, 배불뚝이는 컥!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배가 남산만 한 탓에 아랫배까지 팔이 닿지 않았다.

그대로 그를 지나쳐 의자에 돌아가 앉았다.

“내,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응? 뭘 해주면 알려줄 건가!”

배불뚝이는 급기야 개구리 뒷다리처럼 생긴 두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저렇게까지 안달이 난 모습은 처음 본다.

또다시 쓸데없이 잔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책상 서랍을 열고 종이와 잉크를 꺼냈다.

“지금 뭐 하는 겐가?”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지. 내 머리 열어놓고 그런 것도 안 배웠냐?”

“열지는 않았네만.”

빈 종이 위에 부지런히 붉은 잉크로 글을 써 내려갔다.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서 가만있었는데, 전부터 원하는 것이 있긴 했다.

다 쓴 종이를 배불뚝이에게 건네자, 멀뚱히 쳐다보다가 그것을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을은 갑에게 오더코르트에 발생하는 마나 폭주와 관련된 중대한 비밀을 듣는 조건으로, 갑에게 지구 접속기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제공해야만 한다…….”

배불뚝이는 다시 눈을 들어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구 접속기가 뭔가?”

“말 그대로지, 뭐. 지구인들이 오더코르트에 접속하듯, 여기에서 지구로 접속할 수 있는 접속기를 설치해 달라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 되는데 못하는 척 하는 거 다 알아.”

“흐으음…….”

배불뚝이는 터질 듯 빵빵한 배 위에 양팔을 얹은 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촉수를 쥐었다가 하며 한참 동안 고민을 했다.

‘쪼끔 더 당겨야겠군.’

슬쩍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안 할 거냐? 아쉽네. 수천 년간 풀리지 않은 절대 불가사의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데. 배불뚝이 너라면 좀 진지하게 들어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야 물론 궁금하네만.”

“아마 들으면 놀라 뒤집어질걸? 행여나 꿈속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을 엄청난 발견이니까.”

“끄으으으응.”

“어쩔 수 없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면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역시 이건 나만 알고 있어야…….”

“이잇! 계, 계약하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선의로 포장하며 배불뚝이가 들고 있는 계약서를 툭툭 쳤다.

“그래, 잘 생각했어. 후회하지 않을 거야. 어서 서명해.”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배불뚝이가 재빨리 계약서를 든 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계약서에서 피어오른 마나가 나와 배불뚝이에게로 흡수되었다.

마나가 완전히 흡수되자, 배불뚝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일로 와 봐.”

손짓을 하자, 배불뚝이는 신이 나서 바늘구멍 같은 귓구멍을 내게 바짝 가져다 댔다.

속삭이듯 한 설명은 굉장히 길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배불뚝이의 표정은 점점 이상해졌다.

“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웃긴 표정이었다. 마치 물에 퉁퉁 불어터진 오징어 같은 얼굴에, 나는 이를 악물고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그냥 마나가 폭주하는 곳에 지구인들을 잔뜩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배불뚝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글쎄, 그렇다니까. 가능하면 많을수록 좋아.”

“이 말이 나만 이상하게 들리는 건가?”

배불뚝이가 혼란스러워하며 퍼롱이와 깰룩이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퍼롱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깰룩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상하게 들립니다, 깰룩.”

“아,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냐. 몇 번을 말해야 돼.”

“말이 안 되지 않나. 마나가 폭주하는 지역은 온갖 천재지변들이 발생하거나 마나 차단 현상이 일어나는 곳들이란 말이지. 근데 그 해결 방법이 단지 거기에 지구인들을 가능한 많이 보내는 거라고?”

“그래, 아이러니하겠지만 바로 그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거긴 들어가는 순간 마법도 쓰지 못하는 데다, 아주 위험천만한 곳들이라 쉽게 들어갈 수조차 없단 말일세.”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배불뚝이의 표정에 참지 못한 웃음이 조금씩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큭, 흐흑… 크흠. 파라알을 봐. 지금 거긴 어떤데?”

“음, 아주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더군.”

“그렇지? 너희들이 수천 년을 고치지 못하고 있던 현상을 난 단 며칠 만에 고쳤어. 못 믿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문이 막히자, 배불뚝이의 촉수들이 돌돌 말려 들어가 쭈그러졌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해결책은 아주 단순하다고. 그냥 이 행성 곳곳에 지구인들을 데려와서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게 놔두면 돼.”

“그러니까 자네 말은, 오더코르트의 멸망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많은 수의 지구인들을 이곳으로 유입시키는 것이다, 이건가?”

“빙고.”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이자, 배불뚝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난 날부터 했던 말이잖나.”

“뭐라고? 하, 참나. 그게 무슨 지나가던 깰룩이가 웃을 소리야? 니 말 하고 내가 제시한 방법이 어떻게 같냐? 천지차이라고!”

와락 인상을 쓰자, 배불뚝이는 흠칫 놀라 뒤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이 촉수를 잡힐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깰룩이는 괜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됐다고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잘 봐. 넌 어떤 원리로 오더코르트가 안정화되는지는 전혀 몰랐지. 그냥 막연히 지구인들을 데려오면 되려니 한 거였잖아? 하지만 난 어떠냐? 데리고 온 지구인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오더코르트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증명하기까지 했지.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같은 소리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깰룩.”

깰룩이가 박수를 쳤다. 퍼롱이는 날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기도 하군.”

멍청한 배불뚝이도 엉겁결에 따라 박수를 쳤다.

“그런데 자네, 도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건가?”

“후후후.”



“그런데 아까 그린 그 표는 도대체 뭐였어요?”

파라알 광장에 나갔다 돌아가는 길, 아즈칸의 등 뒤에 올라타 있던 까나리가 물어왔다.

“응? 무슨 표?”

슬며시 뒤로 돌아 앉아, 까나리의 북실북실한 꼬리털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부들부들한 게 은근 중독적이다.

“아까 광장 바닥에 그리신 거요.”

“아, 그거?”

우리 집, 그러니까 지구에서 내가 살던 집은 툭하면 정전이 일어났다.

원인은 오래된 컴퓨터의 합선으로 인한 쇼트 현상이었다.

오더코르트에 온 그날도 컴퓨터 수리점에 본체를 맡겼으니, 정말 뻔질나게 경험해 본 일이었다.

그리고 오더코르트의 상황은 우리 집과 굉장히 비슷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기라고 들어본 적 있어?”

“예, 들어봤습니다. 지구에서 쓰는 에너지라고 하셨죠.”

“맞아. 지구에서는 모든 게 다 전기로 돌아간다고 해도 될 정도로 보편적인 자원이야. 오더코르트의 마나처럼.”

나를 등에 태운 아즈칸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는 잘못 사용하면 지구인들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아주 강력한 에너지야. 그래서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들은 보통,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변압기나 트랜지스터 같은 것으로 ‘저항’을 줘서 조절해. 너무 높아지지 않게 말이지.”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그런데 그 저항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뭔가 결함이 있거나, 노후되어 합선이 되는 경우 쇼트 현상이라는 게 발생해.”

“쇼트 현상? 그게 뭐죠?”

퍼롱이가 물었다.

“전기 저항이 0이 된다는 의미야. 아까 전기는 위험한 거라 했지? 일부러 변압기나 저항을 써서 낮춰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위험해지겠죠.”

까나리가 더듬이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래. 저항이 0이 돼버리기 때문에 모든 전류가 그리로 향해. 마치 마나가 폭주하는 것처럼, 전기도 과부하가 걸리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아크’라고 하는 플라즈마 방출 현상이 일어나고, 아주 뜨거운 열이 발생되면서 불이 나기도 하지.”

“끄, 끔찍해요, 깰룩.”

깰룩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막을 방법은 없는 건가요?”

아즈칸이 날개를 펄럭이며 물었다.

“당연히 있지. 그걸 막기 위해 설치된 게 바로 누전 차단기야. 만약 쇼트 현상이 일어나면 누전 차단기가 집 안의 전기를 모두 끊어버리거든. 그렇게 되면 정전이라고 해서, 전기가 흐르지 않는 상태가 돼버려.”

“어라? 그거 꼭 마나 차단 현상 같네요.”

퍼롱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바로 그거야. 내가 아까 그린 표가 뭐냐고 물었지? 그건 오더코르트의 마나와 지구의 전기를 대조하는 표였어.”

“마나와 전기를요?”

“가설이긴 하지만… 만약 마나를 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마나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오더코르트인들은 마치 전자 제품들과 같아. 근데 오더코르트에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저항이 사라지고, 쇼트 현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마나가 폭주하겠군요, 깰룩.”

깰룩이가 작은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 마나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하면서 각종 천재지변들이 들끓게 되는 거야. 마치 아크와 열이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 마나 차단 현상은…….”

“누전 차단기 같은 거군요, 깰룩!”

나는 씩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엄청난 건 따로 있어.”

“뭐죠?”

“지구인들이 바로 그 저항의 역할을 한다는 거야.”

“헉!”

이건 조금 전에 광장에서 아즈칸과의 방어전 이벤트를 되짚어보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분명 아까 광장에 플레이어들이 많았을 때는 암만 대규모 마법을 써도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야. 근데 아즈칸에 의해 유저들이 잔뜩 죽고 난 뒤에 쓰니까 갑자기 마나 폭주가 일어났어. 마나 차단까지 일어나고.”

“아, 기억납니다.”

생각해 보면 클로즈 베타 때도 그랬고, 히드라 동굴 때도 그랬다.

“그러니까 게임을 통해 접속한, 가상의 몸 자체가 마나로 이루어진 지구인 유저들이 마치 저항 같은 역할을 하는 거야. 그저 접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마나를 잔뜩 잡아먹는 저항 말이야. 차단 현상도 마찬가지야. 마나가 차단된 곳에 마나 덩어리로 이루어진 지구인들이 잔뜩 몰려왔다고 생각해 봐. 자연스레 폭주와 결핍 사이의 균형이 잡히는 거지. 말하자면 지구인들 자체가 오더코르트의 변압기 같은 거라고. 지구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마나의 과부하가 급감하고, 마나 폭주와 차단 현상이 조절되는 거지. 반대로 그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마나가 과부하되기 쉬워지고.”

결론적으로, 주변에 지구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더코르트인들이 강한 마법을 사용해도 될 정도로 마나가 안정된다는 거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결론에 조금 더 빨리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나는 지구에서 쓰는 전기 같은 것과는 다르다’는 배불뚝이의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 말의 함정에 빠져, 미처 마나를 전기에 대입해 볼 생각을 못했다. 스스로 고정 관념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고정 관념이 생기게 한 것도, 그리고 그 고정 관념을 깨뜨린 것도 배불뚝이의 말이었다는 거다.

순간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무 인생을 곧이곧대로 살지 말란 소리야. 넌 좀 더 고정 관념을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어.”



파쿠르 던전에서 필이 한 말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날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던 배불뚝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고정 관념 비틀기.”

“뭐?”

“새로 배운 마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