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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6화

저항은 발전을 만든다 (1)





사아아아악!

강력한 냉기가 광장을 해일처럼 뒤덮었다. 거대한 얼음의 파도는 달려오던 코봉이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광장 여기저기에 푸르고 투명한 얼음 기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광장의 절반 이상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었다.

‘이걸로 코봉이들은 대충 처리했고.’

허공에서 몸을 세우며 곁눈질로 슬쩍 랭커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딱 다섯 사람, 랭커 중에서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는 이들이 있었다. 상위 랭커들이었다.

‘이 정돈 예상했다 이건가? 하긴, 겨우 이런 거로 놀라면 곤란하지. 명색이 랭커들인데.’

그 뒤를 돌아보니, 일반 유저들이 모두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놀란 것은 비단 유저들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아란탈인 깰룩이나 배불뚝이 정도가 아니고서야 웬만한 오더코르트인들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고급 마법이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썰렁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대단하네요.”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약간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던 라라크였다.

“대단은 무슨. 관종이라니깐.”

“큭, 푸하하하! 관종이래!”

필이 말하자, 라라크가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던가.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다면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게 상책이다.

나중에 두고 보자, 저 보라돌이 놈!

“뭐 해요. 안 잡을 거예요?”

그냥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토록 많은 수의 코봉이들을 혼자 처리해 버리면 내 실력이 너무 드러나게 될 터. 나머지는 유저들에게 맡기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내 말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고작 랭커들 중 몇몇뿐이었다.

“좋았어, 오랜만에 고기 좀 썰어볼까?”

“전 여기서도 충분합니다.”

칭다오가 자기 몸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말하자, ‘내글라스’라는 닉네임의 유저도 나섰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활을 들고 있었다.

“나 잡는다, 모든.”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쓴 ‘Leo’가 어눌하게 말했다.

‘뭐야, 말투가 왜 저래?’

하지만 그는 랭커들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때, 시야 한편에 떠 있던 빙결 표시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유저들의 의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러 지정해 둔 지속 시간이었다.

“빙결, 30초 후에 풀립니다. 지금 때리셔야 돼요.”

시계탑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제야 유저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오의 뒤를 쫓아 앞으로 튀어 나가자, 뒤에서 귀청을 울리는 함성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내가 불친절한 성격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몬스터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이다. 유저들을 속여 넘기려면 이 방어전 아닌 방어전에서 승리해야 하니까.

‘칼립테타이 메 토 포스.’

허공에 마법진이 번쩍이며 양손에 찬란한 빛이 어렸다. 동시에 갑옷에 흰 문자들이 떠올랐다.

마법이 발동되자, 빛은 곧 서늘한 바람으로 변했다. 바람에 감싸인 손날로 눈앞에 있는 코봉이의 뒷목을 정확하게 노려 쳤다.

쏴악!

윈드 블레이드에서 매서운 바람이 뿜어져 나오더니, 커다란 머리통을 단번에 잘라냈다. 잘려 나간 단면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깔끔했다.

뒤에서 달려오던 유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근처에 있는 코봉이들에게 들러붙어 얼음 기둥의 윗부분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얼음을 깬 유저들은 즉시 코봉이의 목뒤를 날카로운 무기들로 쑤셔 댔다.

광장엔 수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난잡하게 뒤얽혀 얼어붙은 코봉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장에는 프로즌 웨이브에 얼어붙지 않은 몬스터들도 많았다. 남은 몬스터들이 유저들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콰앙! 콰아앙!

그 순간 수많은 스킬들이 쏟아졌다.

뒤를 돌아보자, 라라크와 내글라스를 필두로 한 몇몇 유저들이 원거리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잖아 광장 곳곳에서 번개와 불길이 솟구쳤다.

‘좋아, 슬슬 빠져도 되려나.’

유저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음?”

동분서주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유독 느긋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필이었다.

‘쟨 저기서 뭐 한다냐?’

필은 얼어붙어 있는 코봉이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노크하듯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다음이었다. 곧 팔을 뒤로 빼더니 코봉이를 겨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힘들게 시범까지 보여줬더니만 저게 뭐 하는 짓이래?’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세요?”

오지랖을 참지 못하고 그만 참견해 버렸다.

하지만 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설마 주먹으로 치려는 건 아니죠? 쓸데없는 짓이니까 그냥…….”

쿵!

역시 그뿐이었다. 얼음 기둥이 부서져 내렸을 뿐, 코봉이에겐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내가 이런 놈에게 관종 소릴 들었다니.

“흠…….”

필은 조용히 턱을 어루만지며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코봉이를 살펴보더니, ID카드를 불러내 무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람.”

쿠웅! 쿵! 쿠구궁!

주변에선 코봉이를 쓰러뜨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7초.’

빙결의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ID카드를 내려놓은 필이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기요, 암만 주먹으로 쳐 봤자 안 된다니까요. 귓구멍이 막혔…….”

필은 정직하게 코봉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별다른 준비 동작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쩌저적!

마법 지속 시간이 다 되어 빙결이 풀림과 동시에, 필의 주먹이 코봉이를 강타했다.

그러자 코봉이의 딱딱한 갑각이 알루미늄 호일처럼 맥없이 구겨지며, 물 풍선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거대한 몸통이 터져 나갔고, 코봉이는 볼품없이 찌그러진 그대로 수십 미터나 날아갔다.

빠르게 날아간 코봉이는 궤도에 서 있던 유저들을 볼링 핀처럼 휩쓸며 끌고 가, 무너진 회랑 벽에 함께 처박히며 죽어버렸다. 유저들도 회색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아무래도 코봉이가 플레이어들을 공격한 것으로 판정된 모양이었다.

“흠, 그럭저럭 쓸 만하네.”

빙결이 풀린 코봉이를 피해 달아나던 유저들이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필이 주먹을 휙휙 털며 제자리에서 뒤로 돌자, 머리 위에 자주색 문구가 번쩍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핵펀맨]



‘자주색이면 레전드 칭호?’

서둘러 게임마스터용 메뉴를 켰다.



[칭호 정보

‘핵펀맨’(레전드)

장착 시 액티브 스킬 ‘핵펀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물리 공격력과 물리 방어력을 합산한 수치를 공격력으로 하는 일격을 날린다.

파이터 성향 한정.

습득 조건: 자신보다 높은 랭크의 몬스터를 맨손 공격으로 1,000회 이상 원킬 시 획득.]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습득 조건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막노동하듯이 근력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얻어보라고 만들어놓은 칭호였으니까. 그저 습득하기가 매우, 매우 고단할 뿐이다.

“뭐라고?”

방심하고 있는 찰나, 필이 퉁명스럽게 물어왔다.

“네?”

“아까부터 뭐라 시끄럽게 중얼거렸잖아. 뭐라 한 거냐고.”

“예?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아닌데.”

침착하게 시치미를 뗐다.

“너 아까 무슨 귓구멍이 어쩌구 하지 않았어?”

“제가요? 그런 적 없는데? 지금까지 계속 조용히 있었는데요?”

“내가 귓구멍이 막힌 것도 아니고, 그걸 못 들었겠냐?”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참에 고객 센터에다가 보청기 좀 만들어달라고 건의하면 되겠네.”

깔깔거리며 웃자, 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노답이네. 관종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그러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유유히 플레이어들 사이로 사라졌다.

“…….”

어쩌다가 내가 관심 종자가 돼버린 걸까.

그러는 동안에도 코봉이 떼는 플레이어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빠져나가자.’

유저들 몰래 회랑 사이로 몸을 숨기고, 광장 뒤편으로 나와 재빨리 변신 마법을 사용했다.

빛이 사라지고 난 뒤 나타난 내 모습은 흰 털이 복슬복슬한 개구리, 깰룩이와 같았다.

‘오케이, 이대로…….’

ID카드로 잘 바뀌었는지 확인한 뒤, 재빨리 몬스터 노동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수도 남쪽의 외벽으로 달려갔다. 호르핌들과 유저들로 그야말로 난리라, 갑자기 나타난 내가 전투에 합류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호르핌들이 불타는 화살에 쑤셔 박혔고, 플레이어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검에 목이 날아갔다. 급히 몸을 빼려는 몬스터들의 위로 마법이 쏟아졌다.

“뒤, 뒤로 빠져! 끄아아악!”

급박하게 소리치는 순간, 날아오는 화살이 가슴을 꿰뚫었다. 소리치던 몬스터는 맥없이 털썩 쓰러졌다.

끔찍함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도망치는 척 무리의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충분히 깊숙이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 호르핌들을 향해 외쳤다.

“지구인들이 너무 강력하다! 일단 후퇴하라!”

“후, 후퇴하라!”

그러자 휩쓸린 호르핌들이 따라 소리치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에 섞여 달리며 계속 외쳤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그러나 유저들은 제 발로 찾아온 경험치와 아이템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도망친다!”

“몰아, 몰아!”

나는 호르핌들과 함께 득달같이 달려드는 유저들을 뒤에 매단 채 계속해서 도망쳤다.

그대로 성벽을 넘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도망치는 몬스터들과 그들을 쫓는 유저 무리가 고스란히 따라왔다.

‘이 정도면 됐겠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슬그머니 변신 마법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나는 몬스터들을 쫓는 유저들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가 소리쳤다.

“마황군이 도망친다! 쫓아가 없애 버리자!”

“저기 있다! 잡아라!”

“와아아아!”

조금씩 속도를 줄여 뒤로 처지면서 두세 번 외쳤을 뿐이건만, 분위기에 취한 유저들은 모두 신이 나서 도망치는 호르핌들을 쫓아 수도 바깥의 언덕 너머까지 몰려갔다. 곳곳에서 호기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면 녀석들도 정신 차렸겠지.’

그렇게 양쪽을 다 선동한 뒤, 나는 슬쩍 뒤로 빠져서 광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방어 성공 멘트 띄우라고 할까나.

“저기 한 마리 더 넘어온다!”

광장으로 막 돌아온 그때, 어떤 유저가 회랑과 회랑 사이의 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직 도망치지 않은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몇몇 플레이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음?”

회랑 사이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다소 왜소한 체구에, 파란 피부를 가진 도마뱀이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크로키리?”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불현듯, 아까 전에 면접장을 착각하여 내 개인 작업실에 찾아왔던 녀석이 떠올랐다.

“내가 잡을게!”

내 옆에 있던 녹색 겉옷을 걸친 플레이어가 검을 뽑아 들더니 달려갔다.

‘저 멍청이가!’

순간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던 나는 곧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왜 구해줘, 지 팔자인데.’

면접을 보지도 못하고 떨어졌으니 계약을 하진 않았겠지만, 면접을 보러 왔다는 데서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계약도 안 한 오더코르트인이 죽으면 문제가 생기긴 하겠지만, 본인 과실이 제일 크다. 더욱이 내가 굳이 나서서 구해줘야 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오더코르트인은 죽는다고 해도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죽는 게 저 녀석의 운명이라면, 불쌍해도 어쩔 수 없다.

‘제기랄.’

분명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계속 발을 움찔거리며 앞으로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신경 끄자. 저딴 녀석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 순간.

그의 바로 뒤까지 다가간 유저가 검을 머리 위로 한껏 추켜올렸다.

파란 도마뱀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복면인에게 잡혀 사라지던 크로키리와 겹쳐 보였다.

‘망할!’

결국 나는 이를 갈아붙이며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