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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8화

마녀와 기사 (1)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오, 끝났다!”

쏜살같이 접속기에 들어가 헬멧을 쓰자, 자동으로 문이 닫히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꽤 익숙한 몸이 아래로 푹 가라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맘이시리네는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허공에 떠오른 푸른 문구와 마주했다.



체인지 더 월드.



문구를 가볍게 건드리자, 푸른 문구는 수많은 점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점은 가는 선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크리스탈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최근에 접속한 이력이 확인되었습니다. 기존의 데이터를 불러오시겠습니까?]

‘음, 새 계정을 만드는 것보단 아무래도 쓰던 계정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더 낫겠지?’

그러자 생각만 했을 뿐인데, 접속기가 자동으로 데이터를 동기화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동기화 중.]

[동기화 완료.]

[맘이Siri네 님, 환영합니다. 잠시 후 파라알로 이동합니다.]

공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하더니, 오색찬란한 빛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푸른 점들은 게임 속 모습이 되어 사방에서 유성우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게 정지한 화면처럼 멈추었을 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쬐는 중앙 광장에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맘이시리네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ID카드에서 수신음이 울렸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컴백 기념 선물!

칭호 ‘돌아온 헌터(유니크)’]

[출석 보상

1일차 - HP회복 포션 30개]



그 외에도 시스템에서 발송된 별 의미 없는 쪽지들이 몇 개 쌓여 있었다.

메시지를 대충 훑어본 맘이시리네가 내던지자, 카드는 푸른빛을 내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체인지 더 월드: 헌터 비긴즈’가 정식 오픈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 참여 이후, 맘이시리네는 지금까지 하고 있던 다른 게임 프로젝트들을 급히 마무리 짓느라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체월에만 방송을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렸어. 여태 한번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맘이시리네가 체월을 방송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게임의 플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팬들도 분명 있으니, 이미 벌여둔 게임들은 전부 끝내놓아야 했다.

‘와, 전보다 더 쩔어졌네.’

맘이시리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에서도 굉장한 퀄리티를 느낄 수 있었다. 클베 때도 느꼈지만, 거의 게임계의 혁신이었다.

‘다른 게임 회사들 망하는 건 이제 시간문제겠네. 미리 정리해 두길 잘했지.’

맘이시리네는 끊임없이 잘한 일이라며 되뇌었다. 그래야 남들이 신나게 플레이할 때 못했어도 덜 아쉬우니까.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저, 헌터님.”

낙타와 돼지가 섞인 듯한 모습의 여성 외계인이었다.

“혹시 기사 아니세요?”

‘기사?’

그녀는 다짜고짜 카드를 들이밀어 왔다.

삐빅!

작은 전자음이 들렸다. 카드를 확인한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스콰이어인가. 뭐 그래도 상관은 없겠죠.”

‘스콰이어?’

맘이시리네는 결국 다시 카드를 소환했다. 카드를 그녀 쪽으로 들이밀자, 정보가 조회되었다.



[NPC 정보 창

카멜꾸르그(여)

잡화점 상인.

친밀도: 0

온갖 물건들을 등에 난 혹에 보관해 두는 습관이 있다. 가끔 너무 오래돼서 썩은 음식이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하자. 좋아하는 음식은 기아스토의 생간.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귀찮게 구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기사를 찾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카멜꾸르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퀘스트?’

딱히 할 것도 없었는데 잘됐다는 생각에 맘이시리네가 씩 미소 지었다.

“좋아요. 무슨 일인가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카멜꾸르그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사실 제 남편이 파라마스타 왕국에서 제일가는 대상인이거든요.”

‘대상인?’

수많은 게임 경험을 가진 맘이시리네는 빠르게 계산을 끝냈다. 대상인 정도면 아마 기사처럼 귀족 신분으로 인정받는 위치일 터. 제대로 파내면 생각 이상의 퀘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왕궁 식당에서 남편에게 하포링포의 날개 살을 대량으로 주문을 했어요. 곧 있을 코라쿨란 대공님의 생일상을 준비 중이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그걸 구하려면 도드리온 늪지대까지 가야 하는데, 여기서 반나절이나 걸어야 나오거든요.”

“저한테 그걸 구해다 달라는 건가요?”

“아니에요. 하포링포들은 잡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제 남편이 직접 잡아야 하거든요. 문제는 남편 혼자서는 수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상인 조합에 속해 있는 주민들은 반드시 기사들을 고용해야 길을 나설 수 있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 기사님께서 동행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대상인 카밀리온과의 동행(E등급)

파라알 광장의 잡화점 상인 카멜꾸르그가 도드리온 늪지대까지 남편인 카밀리온과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카멜꾸르그는 당신을 그다지 믿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성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카밀리온과 도드리온 늪지대까지 동행하라.

퀘스트 조건: 기사 계열 성향 한정, 15일 이상 장기 미접속한 F랭크 이하 플레이어]



“흐음.”

더 파볼 구석이 없을까?

맘이시리네는 슬쩍 카멜꾸르그를 떠보았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 알아보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전 아직 제대로 된 기사 훈련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아마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네? 그럴 리가요. 실례지만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카멜꾸르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신분증이요?”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맘이시리네는 반신반의하며 그녀에게 ID카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카멜꾸르그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ID카드를 뒤적거려 보더니, 이내 돌려주었다.

“이거면 됐어요, 꾸륵.”

“엥?”



[기사 작위 증명서

맘이Siri네(한국)

소속: 파라마스타

성향: 팔라딘

작위: 13급 ― 스콰이어(평민 기사)]



‘이상하네. 이런 건 갑자기 어디서 난 거지? 만든 기억이 없는데.’

클로즈 베타 당시 팔라딘 성향을 얻으면서 자동으로 발급된 증명서였다. 물론 그 이후 한 번도 접속하지 못한 맘이시리네는 당연히 본 적이 없었다.

“어때요, 꾸륵? 같이 동행해 주시겠어요?”

카멜꾸르그가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뭐 굳이 데려가시겠다니까 갈게요, 그럼.”

띠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목표: 카밀리온과 함께 도드리온 늪지대까지 이동하시오.]

“앗, 마침 저기 오네요, 꾸륵.”

카멜꾸르그가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고개를 돌리자, 사자 갈기가 달린 카멜레온 인간이 짐을 양손 가득 든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붉은 로브를 몸에 두른 갈색 웨이브 머리의 여성 플레이어도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여보?”

가까이서 본 카밀리온은 눈알이 생각보다 더욱 커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혀가 어찌나 긴지, 입으로 모두 말려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으로 툭 튀어나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정말 고맙게도 여기 이 기사님께서 같이 동행해 주신대요.”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마땅한 기사님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던 참입니다.”

어눌한 말투였다. 카밀리온이 입을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의 기다란 혀가 덜렁거렸다.

‘나도 딱히 마땅한 기사님은 아닌데.’

맘이시리네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혀 좀 집어넣으면 안 되냐고 할 순 없으니.

카밀리온의 뒤를 따라 성문 근처까지 갔을 때였다.

도시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길을 막으며 멈춰 세웠다.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각자 ID카드를 꺼내 제출했다.

“카밀리온 님께서는 상인 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는군요. 죄송하지만, 기사의 동반 없이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이 카밀리온에게 ID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러자 카밀리온이 툭 튀어나온 눈을 맘이시리네 쪽으로 향했다.

“이분이 바로 기사님입니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꽂혔다.

“정말입니까? 근데 복장이 왜 이래요?”

“…….”

“그, 그건…….”

카밀리온이 예상치 못한 그들의 질문에 당황하며 우물쭈물 댔다.

“정말 기사가 맞다면 기사증을 보여주십시오.”

맘이시리네는 조용히 ID카드에서 기사 작위 증명서를 찾아 내밀었다.

“준기사네.”

“스콰이어였어? 난 또 뭐라고.”

‘다 들려, 이 자식들아!’

맘이시리네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문지기 주제에.”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자, 경비병들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비켜섰다.

“크흠, 저, 정상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안전한 여행길 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