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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화

Prologue




“누나만 셋.”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예쁘냐?”

“사진 있어?”

“결혼은? 소개 좀.”

“부럽다, 짜식.”

친구들이건, 군대 선임들이건, 직장 상사건, 보통은 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때마다 난 그냥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부럽긴 개뿔.’

이건 전적으로 누나가 없는 사람들이나 갖는 헛된 로망일 뿐이다. 한 명이라도 누나 밑에서 커본 사람들이라면 조금 더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인다.

“오…….”

직장 동기인 동길이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동길이는 참담함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용케 아직 살아 있구나.”

같이 사는 누나가 한 명 있다는 동길이는 내 말이 어떤 어둠 지옥을 뜻하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그래, 매일 접시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죽지 못해 여태까지 살아 있다.”

지잉. 지잉.

허허로운 표정으로 대답하던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 소리와 함께 꿈틀거렸다. 액정에 ‘악마2’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재촉 전화만 벌써 세 번째 아니냐?”

“어. 좀만 더 밟아줄래?”

“그래, 거의 다 왔어.”

동길이는 내 표정을 힐끔 보더니 속도를 올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마치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죄수 같은 표정이었다.

‘아오, 들어가기 싫어.’

차 안에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불빛들은 마치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리면 좋을 것을.’

해탈한 채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쯤, 익숙한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내려주면 되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사형 선고 같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애써 목 뒤로 삼켰다.

“어, 고맙다. 얻어 타면서 빨리 가자고 해서 미안.”

담담한 척, 벗어둔 외투를 챙기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래, 내일 기획 회의 때 보자.”

동길이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며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애써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오늘 컴퓨터 옮기는 거 도와줘서 고맙다.”

“고맙긴, 언제 술이나 한번 사라.”

장난스럽게 웃던 동길이는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차를 몰고 큰길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던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아아, 제기랄… 진짜 들어가기 싫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잉. 지잉.

네 번째 재촉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물론 받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꽂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누나들과 함께 살면서 익힌 거라곤 히스테리를 부리는 법과 사람을 공짜로 부려먹는 법, 그리고 구워삶는 법, 이 세 가지뿐이다.

‘아, 진짜 독립하고 싶다. 어딘가로 확 떠나고 싶어.’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간절히 소원을 빌고 있던 그때.

쿠궁! 쿠구궁!

“허억!”

덜컹!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자동차처럼 엘리베이터가 격하게 뒤흔들리더니, 암전까지 돼버렸다.

오, 미친.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벽에 등을 댄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단 흔들림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뒤, 침착하게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불빛을 이용해 비상벨을 찾아 눌렀다.

딸깍, 딸깍.

하지만 버튼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뭐냐.’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딸깍.

격하게 비상벨을 눌러보았으나, 반응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오! 진짜!’

쾅쾅!

주먹으로 마구 버튼을 내려쳐 보지만, 역시나 엘리베이터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거 떨어지는 거 아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쿠우웅! 쿠구구구궁!!

“으, 으아악!”

광풍에 요동치듯 엘리베이터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나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곧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간신히 눈에 힘을 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모습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몸을 조금 뒤척이자, 입에서 신음이 탄성처럼 터져 나왔다.

어지러웠다. 속이 메스껍고, 오장육부가 뒤틀린 것 같았다. 몸이 제대로 일으켜지지 않아 손을 움켜쥐자, 거슬거슬한 모래 알갱이들이 손바닥에 한 움큼 잡혔다.

‘엥?’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고 들여다보았다.

정말 흙이었다.

‘뭐지?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오, 일어난다.”

흐릿하던 시야에 초점이 잡히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난생처음 보는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들… 아니, 정확하게는 파충류와 양서류가 반씩 합쳐진 것처럼 보이는 괴물들이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초록색 피부에 이상한 돌기가 잔뜩 돋아나 있거나, 삐죽삐죽 가시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빨간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거나, 박쥐 같은 검정 날개가 달렸거나, 이마와 등에 뿔이 잔뜩 나 있는…….

“아따, 이거 참말로 희한하게 생겼구만!”

빨간 비늘이 달린 악어 하나가 두 발로 선 채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으아아악!”

나는 뒤집어질 듯 놀라 후닥닥 물러났다. 그리고 침을 삼키며 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동감 넘치는 누런 눈들과 마주했다. 등줄기에 뱀을 보았을 때의 서늘한 감각까지 느껴졌다.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건 절대 꿈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 없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닥을 살펴보지만, 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흙바닥일 뿐이었다.

‘왜… 아니, 여기가 어디야?’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손가락 정도 길이의 촉수를 턱 주위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초록색 뱀이 다가왔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

배가 불뚝 튀어나와 있고, 아래쪽에는 개구리처럼 생긴 다리까지 있었다. 괴물 주제에 뒷짐까지 지고 있다.

“미안하네. 우리가 좀 놀래킨 것 같군.”

매우, 매우 징그럽다.

“으악, 너희들 뭐야! 오지 마!”

벌떡 일어나 가까이 있는 괴물들 쪽으로 팔을 홱 휘둘렀다.

“으아악!”

그러자 주위에 모여 있던 괴물들이 혼비백산하며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맨 앞에 있던 배불뚝이 초록색 뱀은 오히려 팔을 뻗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지, 진정을…….”

“야! 오지 말라니까! 아니다. 그래, 어디 한번 와 봐. 내가 죽어도 너 하나는 데리고 간다. 네놈만 겁나 팰 거야.”

“…….”

“뭐! 와 보라고!”

배불뚝이 뱀은 몇 번 눈을 굴리다 뻗고 있던 팔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분위기를 보니 앞쪽으로 나선 저놈이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이것들 겉모습에 비해 그리 위협적이진 않은 것 같은데?’

“너희들은 뭐야! 여긴 어디야!”

“지, 진정하게.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닐세.”

“…사람이라고?”

배불뚝이는 순간 멈칫했다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어, 그, 그러니까… 지구인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렇단 말일세. 미안하네. 자네는 바로 일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꽤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거든. 그동안 우리가 자네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들을 좀 뽑아냈…….”

“뽑아내?!”

자동으로 머리에 손이 올라갔다.

황급히 이곳저곳을 더듬어봤지만, 다행히 머리통이 열린 흔적이나 꿰맨 흔적은 없었다.

“상처 같은 건 안 남을 걸세. 수술 같은 게 아니니까. 멋대로 뽑아낸 건 좀 미안하지만, 자네가 일어났을 때 모르는 언어로 말을 걸면 더 무서워할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지? 여긴 오더코르트라는 곳이네. 우리는 모두 오더코르트인들이고. 음, 그래. 외계인이라고 하면 되겠군.”

“아는 말로 한다고 안 무섭겠냐! 외계인이라니, 대체…….”

미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뭐 현실감이 있어야 화를 내지.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며 경계하고 있자, 배불뚝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네 머릿속엔 우리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이 많던걸.”

배불뚝이는 내게서 뽑아낸 지식들을 떠올리는 듯 턱을 짚었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게 소름 끼친다.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악마에, 몬스터에. 지구엔 별 해괴망측한 것들이 많더군.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양반 아닌가, 껄껄껄.”

그래, 그렇긴 하지. 특히 최근에 본 ‘NARAKA: 혼돈의 시작’에 나오는 괴물들은 정말……. 아니, 잠깐만. 납득하면 어떡하냐고.

“그, 그런 건 이제 됐어. 여긴 어디야?”

“…….”

“아냐, 그것도 됐어. 됐으니까 다시 돌려보내 줘.”

배불뚝이는 입을 비죽 내밀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불가능하네.”

“뭐?”

“우리한텐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도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눈이 있으면 네가 한번 봐라. 지금 내가 누굴 돕게 생겼냐? 헛소리 그만하고,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불가능해.”

배불뚝이는 단호하게 고개까지 저었다.

“우리는 마법으로 지구에서부터 자네를 소환했네.”

“마법이라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외계인도 받아들이기 힘든 마당에.

“그래, 마법. 많은 시전자들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마법이지.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들어줄 누군가를 우주 어딘가로부터 소환하는 마법이네.”

킥,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는 거지?”

“아, 그래. 이거 몰카구나. 어디 있어요, 카메라?”

사방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색적인 식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지구의 모습이라 하기엔 확연히 다른 풍경들이었다. 하늘도 이상했다. 보랏빛과 분홍빛에 가까운 하늘…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엔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큰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것도 세 개씩이나.

“미친, 세트장에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돈이 남아도나 보네, 아주.”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우린 거짓말 따위를 하는 게 아니네. 모두 진실이야.”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소설 그만 쓰시고요. 대체 무슨 컨셉인진 모르겠는데, 재미없으니까 이제 그만하시라고요, 아저씨. 예?”

그러나 정색을 하고 말하는데도 배불뚝이는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뭘 가만있어요? 몰카 실패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요. 저 진짜 짜증 나려고 하거든요?”

하지만 배불뚝이는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은 정상적으로 발동했어. 자네를 다시 돌려보내려면 역으로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네가 어디로 떨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랜덤으로 불러왔으니, 랜덤으로 돌아갈 거란 말이지.”

그 말에, 배불뚝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물컹거리는 촉수들이 손에 가득 잡혔다.

“이 아저씨가 진짜! 작작 하…….”

“으악!”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손에 잡힌 촉수 한 가닥이 배불뚝이의 턱주가리에서 떨어져 내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으아아, 내 촉수!”

“으악! 이게 뭐야!”

바닥에 떨어진 촉수는 마치 살아 있는 애벌레처럼 격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런 게 분장으로 가능하다고?’

“흐어어엉, 내 촉수!”

촉수 앞에 엎드려 울부짖는 배불뚝이의 턱주가리에서 보라색 체액이 몇 방울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실화냐?”

“그렇게 쥐어뜯으면 어떡하나! 새 촉수가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실화…일 리가 없잖아! 다 거짓말이야! 절대 안 속아! 솔직히 말해요, 빨리! 이거 다 주작이죠? 주작이라고 말해!”

“글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나! 무작위 소환 마법으로 자네를 이곳에 불러왔다니까! 다시 돌려보낼 방법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네! 없다구! 만에 하나 술식을 역산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자네는 우주 미아가 돼버릴 게야!”

배불뚝이는 턱을 부여잡은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 멱살을 다시 한껏 움켜쥐었다.

“이게 진짜, 좋은 말로 하려니까 어디서 큰소리야!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니 말이 맞다 치자. 그런데 뭐? 우주 미아? 지구에서 왔으면 다시 지구로 가야지, 왜 아무 데나 떨어져!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멱살을 격하게 흔들었다.

“으아악, 부, 불가능해! 믿어주게, 제발! 자네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 그래, 지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사! 용사일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조용히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용사? 용사라고? 보스 때려잡고 이쁜 여주 끼고, 떼부자가 되는 그 용사? 수많은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마다 강렬한 대리 만족을 안겨주던 그 용사?

“내가 용사?”

“아니, 내 말은, 잘하면… 앞으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배불뚝이는 자신감을 잃고 어물거렸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

조금 설레어하며 나도 모르게 물었다가, 즉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서라, 정신 차려라! 난 그저 일개 직장인일 뿐! 어떻게 갑자기 용사가 되냐. 이건 게임이 아니라고!

“지구에는 ‘게임’이란 것이 있더군.”

“어? 게임?”

“우리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일세. 게임! 이 세상을 게임으로 만들어주게!”

시방, 뭐라 씨부렁대고 있는 거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잊고 있자, 배불뚝이는 더욱 강조했다.

“물론 실제로 만드는 건 우리일세. 자네는 그저 우리를 지도해 주면 되네. 이곳 오더코르트가 지구인들이 열광할 만큼 재미난 게임이 되도록 말이야. 말하자면, 감독 같은 거지. 그래, 프로듀서!”

“그게 뭔 개소리야…….”

입으로는 부정하면서도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긴 하지만, 진짜 그게 가능하다면… 이곳을 게임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게임 제작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까지 꼈다.

“내가 왜?”

“엉?”

“보니까 그 무작위 소환 마법인지, 뭔지를 다시 할 수도 없는 거 같고. 굳이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걸 보면 나한테서 뽑아간 지식만으로 너네들끼리 할 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아예 못한단 소리잖아.”

정곡을 찔렀는지, 배불뚝이의 얼굴에 달려 있는 촉수가 움찔거렸다. 징그러움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막말로 내가 너희들 말대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지구로 돌려보내 주는 건 불가능하다며.”

“…….”

배불뚝이는 비늘로 덮인 얼굴로도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자네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오더코르트는 곧 멸망할 것이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아까부터 계속 미친 소리만 듣고 있어서 조만간 나까지도 미쳐 버릴 것 같다!

“멸망을 한다고?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닐세. 오래전부터 서서히 마나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지. 지구에는 마나가 없는 모양이니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미친 소리가 범람하고 있다.

“뭐, 마나가 어째? 그 마나가 내가 아는 그 마나냐? 게임에서 스킬 쓰는 데 드는 Magic Point? MP?”

배불뚝이는 한참 내 얼굴을 보며 뭔가 생각하더니, ‘엄밀히 말해 다르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머릿속 지식을 빼갔다지만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오더코르트는 마나가 고농도로 농축되어 있는 행성이네. 마나는 지구에서 쓰는 전기라든가 그런 것보다 훨씬 효율도 좋고, 활용성이 무궁무진해. 자네가 아는 게임이나 소설, 그런 데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지구에서는 불가능한 일도 마나로 이룰 수 있네.”

“근데 뭐가 문제야? 좋은 거 아냐? 많을수록 더 좋은 거잖아.”

“마나는 어떤 특정한 물질이라기보다 본질 그 자체나 다름없다네. 그 마나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배불뚝이는 허공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선명한 화면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나타났다.

어디선가 빔 프로젝트로 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지역은 원래 바다였다네. 그런데 마나 폭주로 수분이 전부 증발해 버리고 말았네. 근처에 접근할 수조차 없어.”

“이게 바다라고?”

화면 속에는 말라비틀어진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이라기엔 조금 이상한 풍경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배불뚝이가 손을 내젓자, 이번에는 불바다가 나타났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큰불. 산맥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이쪽은 수백 개의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치고 있지.”

“다른 곳도 다 이런 상황인 거야?”

“그렇지. 아무리 마법을 써도 더 이상의 피해를 막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네. 우리가 있는 여기나, 몇몇 곳은 아직 안전하지만…….”

배불뚝이는 말끝을 흐렸다. 주변에 있는 다른 외계인들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파충류 얼굴로 그래봤자 별로 불쌍하지 않다.

“아깐 여기를 게임으로 만들어달라며, 그거랑 이 재앙이 무슨 상관인데?”

“우린 이렇게 될 거라는 징조를 감지한 순간, 곧바로 우주중앙청에 지원 요청을 보냈네.”

배불뚝이는 마침 잘 물어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주중앙청이라니, 어째 질문을 할수록 모르겠는 것만 늘어난다.

“우주중앙청은 범람하는 마나를 모두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인구를 늘려 더욱 빠르게 마나를 소모하면 된다고 답변했네.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서 말이지. 오더코르트의 인구가 적은 건 아니네만, 문제는 인구가 절대 불변인 데 비해, 이곳의 마나가 오더코르트 인구를 쌈 싸먹을 수 있을 정도로 폭주하고 있다는 데에 있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들, 나한테서 빼간 지식으로 아주 찰지게 지구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행성을 게임으로 만든 다음 지구인 유저들을 데려와서 인구를 늘리자?”

“빙고.”

나는 하늘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배불뚝이의 멱살을 아까보다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악, 내 촉수! 촉수 뽑힌다!”

“이게 지금 어디서 구라를 쳐. 너 아깐 나 하나 불러오는 것도 힘들었다며! 근데 지구인들을 어떻게 데려와! 나랑 장난 까냐? 그럴 기술 있으면 나부터 다시 돌려보내 줘야 할 거 아냐!”

“그, 그야 우리 기술력으론 당연히 불가능하지. 그 문제는 우주중앙청에서 도와주기로 했네. 그래서 게임 방식으로……. 거짓말이 아닐세! 물론 이 일이 끝나면 자네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켜 줌세. 지금이야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막느라고 다들 정신없지만, 마나가 안정되면 자네 한 명 정도는 지구로 보낼 수 있어! 악! 진짜 다 뽑히겠네, 이러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저렇게 엉성하고 다급해 보이는 걸 보니 속이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마나고, 우주중앙청이고, 당장 내 상황이 가장 참담했다. 만약 저 녀석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일 테니까.

내팽개치듯 거칠게 멱살을 놓아주자, 배불뚝이가 눈물을 머금고 촉수를 문질렀다.

“망할.”

욕이 절로 나왔다. 진짜로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놈들은 다 죽는 것이다. 물론 나도 죽을 거고.

그때,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배불뚝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서로 목숨 줄을 잡고 있는 거네. 말하자면 동료, 비즈니스 파트너일세.”

“비즈니스 파트너는 얼어 죽을.”

“자, 서명하게.”

배불뚝이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동업 계약서.



“이게 뭐야.”

“뭘, 자네 세계에선 다 이렇게 하잖나. 물론 이건 마법이 깃들어 있는 계약서일세. 절대 조항을 어길 수 없도록 하는 마법이지.”

별걸 다 배우는구나, 내 머릿속 지식에서.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서명은 간단해, 그냥 자네 이름이 있는 곳에 손을 대고 ‘계약하겠다’라고 말하면 새겨질걸세.”

배불뚝이는 옆에서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렸다.

이윽고 조용히 읽고 있던 계약서를 덮었다.

역시 안 하는 게 낫겠다. 너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고, 한마디로 그냥 무리다.

게임 회사 직원이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학생이니까 공부를 잘하지 않을까?’와 같은 소리다. 아무리 내가 게임을 만들 줄 안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외계인들을 데리고 혼자 행성 스케일의 게임을 어떻게 만드느냔 말이다!

“안 할래.”

계약서를 다시 배불뚝이에게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배불뚝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가, 이내 간절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이 걸린 일일세. 자네가 지구로 돌아가길 바라는 만큼 우리도 절실하다는 걸 알아주게. 며칠간 시간을 주겠네. 그래, 갑자기 결정하기란 힘들겠지.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주게나. 여기서 지내면서, 우리가 믿을 만한지도 좀 보면서, 마법이 어떤 건지도 좀 보고 말일세. 아니, 아예 마법을 좀 배워보면 어떤가? 지금은 감이 잘 안 오겠지만, 마법을 좀 배우다 보면 어떻게 하면 될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겠나. 응?”

“…….”

아아, 큰일이다. 저 말에 다시 혹하기 시작했다.

‘사실 돌아가도 그리 좋을 게 없긴 한데.’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떠나고 싶어 했던 나다. 돌아가 봤자 또 누나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될 뿐이다.

그동안 얼마나 독립을 꿈꿔왔던가. 이건 독립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탈행성급 독립이라서 그렇지.

“가능한 긍정적으로 검토 부탁하네. 자, 이 계약서는 들고 가서 고민해 봐도 되니까, 응?”

배불뚝이가 내 손에 억지로 계약서를 쥐어주었다.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생각해 볼 테니까.”

손에 쥐여진 계약서를 흘끔 바라보았다. 배불뚝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알겠네, 천천히 생각해 보게! 분명 하고 싶어질 걸세!”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지금 생각 중이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나는 그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동업 계약서’라고 쓰고 ‘노예 계약서’라고 읽는 그 계약서에.

내 이름은 나석익.

지구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