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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3월, 씨앗의 이야기


“이런 보육 시설의 시녀 따위 그만둬.”
보육원에 들어서는 공작님의 첫마디는 항상 같았다. 물론 이어지는 말도.
“퇴직금은 넉넉히 챙겨 주라 하겠다.”
보육원 시녀인 로미는 그의 말에 대답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손을 잡고 등원한 작은 소녀에게 향할 뿐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아루!”
“안녕하시어요, 로미 씨.”
아루는 스커트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우아하게 인사했다. 과연 고위 귀족 가문의 아이답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랐다. 로미와 아루가 상냥한 아침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공작님은 포기하지 않고 두 사람을 향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모두 제대로 들어라! 이 나라의 공작이신 내가 이야기하고 있으니!”
안테 디안 공작. 어디에서도 무시받는 일이 절대 없는 행정부의 수장. 황제의 수족.
그러나 로미는 그의 지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황제의 명으로 그 어떤 작위도 인정되지 않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그가 지닌 공작이라는 신분은 어린이 청소 반장보다도 권위가 떨어졌다. 그는 철저한 무시 속에서도 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곤 했다.
“이런 보육 시설 따위 내가 문 닫게 해 주지.”
물론, 매일같이 똑같은 그의 협박은 아이들에게조차 통하지 않았다. 그의 딸은 방긋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버님, 이제 가방을 주시어요.”
아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가방을 아루의 어깨에 예쁘게 둘러 주며 그것이 삐뚤어지지 않았는지 몇 번이나 꼼꼼하게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혹여 가방의 줄이 꼬인 곳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면서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로미에게 경고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다.”
“아버님, 로미 씨에게 가정 보육 서류를 주시어요.”
그는 서류 가방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을 꺼내 로미에게 건넸다. 아이들이 보육 시설에서 집으로 돌아간 뒤 식사나 잠자리 혹은 건강 등에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정리해 놓은 서류였다. 물론 그는 서류를 건네는 짧은 순간에도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곳은 일 년 안에 문을 닫을 테니까.”
로미는 그가 작성해 온 서류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의 서류는 항상 다른 부모의 본보기가 되었다. 식사에 관해선 아루가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전부 정리되어 있었고 생활면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고 무엇에 관심을 보였는지, 잠들기 전에 읽은 책과 자리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아루의 시녀들이 보고하는 내용을 잘 정리하여 작성해 준 것이다. 정말이지 훌륭한 부모라며 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 교수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지?”
“예?”
느닷없는 그의 물음에 로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가 혼신을 바쳐 완성한 퇴사 협박은 그녀에게 제대로 들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안테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회색빛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됐다.”
로미는 이제야 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밤샘 업무 후 저택으로 돌아가 아루를 데리고 바로 나온 모양이었다. 태양 빛에 푸석푸석 바래 버린 것 같은 회색 머리카락, 뻑뻑한지 겨우겨우 끔벅이는 눈, 지저분하게 드문드문 삐져나온 턱수염, 구겨진 셔츠 깃. 거기에다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히 담배 냄새가 가득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열심히 제 몫의 일을 해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모습을 한 안테가 로미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와중에 알뜰살뜰 딸까지 챙기는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노골적인 표정에도 로미는 방긋 웃을 뿐이었지만.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다시 이야기할 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로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히 다녀오세요.”
로미의 곁에 서 있던 아루도 다시 스커트 자락을 잡아 우아하게 그를 배웅했다.
“아버님, 안녕히 다녀오시어요.”
상냥한 두 여성의 인사를 받았거늘, 안테는 그저 무성의하게 대충 손을 들었다 놓을 뿐이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유리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절로 담배에 손이 갔다. 한숨과 섞여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 모양이 그의 마음과 닮은 것 같았다.
아루는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안테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착실하게 배웅했다.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야 신발장에 구두를 집어넣은 후, 아름다운 장미 자수로 꾸민 실내용 신발로 갈아 신었다.
비슷하게 도착한 친구들과 함께 교실로 향하던 아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돌아본 곳에는 로미가 다른 부모님께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루의 작은 발이 다시 로미에게로 향했다. 작은 여자아이의 손이 로미의 옷자락을 꼬옥 잡아당겼고, 로미는 상냥한 얼굴로 아루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아루?”
“저기, 로미 씨.”
아루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로미 씨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뿐이어요.”
아루는 손을 모아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아버님을 잘 돌보아 주시어요.”

* * *

세상이 변했다. 노동의 가치가 증명되면서, 곧 작위가 없는 이들도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살기 좋은 세상이,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고귀한 신분의 벽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또 한 발짝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
오직 남성의 것으로 여겨졌던 직업이라는 개념이 이제 여성들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것은 그 어떤 변화보다도 많은 사회적 제도의 변화를 촉구했다.
많은 사람의 요구에 대응하여 살 만한 국가로 만들어 가는 것은 곧,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황제의 일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다양한 탄원서와 온갖 교육학자들이 보내온 논문 등이 난잡하게 어질려져 있었다.
‘일단, 행정부를 주축으로 국가 보육 시설을 시범 운영…….’
황제의 제안에 안테의 얼굴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황제의 일 처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일단 행정부로 미루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테는 더는 일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황제의 손과 발이 되는 충성심은 아름다운 것이나, 지금은 눈 밑이 시커멓게 되도록 일하는 부하들과의 의리가 더 중했다. 결혼하고도 아이를 만들 시간이 없다고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보육 시설 프로젝트를 맡으라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거절하리라. 그는 굳게 마음먹었다.
‘공작.’
‘안 합니다.’
‘자네 딸이자 나의 미래의 며느리를 입학시키게.’
‘입학도, 결혼도 거절합니다.’
‘최고의 교수를 준비해 주지.’
‘저는 지금 명을 거절하는 중입니다. 분명히 지난번에도 일을 떠맡기시면서 앞으로 세 번 거절권을 준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공작.’
황제는 고민했다. 오랜만에 공작이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러나 황제에게 있어서 그의 반항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연례행사에 불과한 일이다. 그의 기분을 살살 풀어서 가만가만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약한 공작은 또 넙죽 일을 받아들일 것이다.
잠시 후,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안테의 손에는 보육원 프로젝트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일이 더 늘었다고 부하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얇은 서류가 그저 무겁게만 느껴졌다.
‘저기, 오랜만에 회식이라도 하면 어떨까?’
안테는 사비로 부하들에게 고기와 술을 사 주었다. 본인도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신 뒤에야 겨우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겨났다. 그제야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어쨌든 새로운 일을 더 맡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안테는 부하들을 위해 작은 계획을 세웠다.
임시 운영이라는 정당한 이유로 인원을 엄격히 제한했고, 나라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서 입학을 허가하도록 했다. 물론 이 ‘기준’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서류가 요구된 것은 당연했다.
일단 한 부모 가정일 경우 나라에서 발급한 서류만 있다면 누구보다도 우선권을 주었다. 하지만 그 서류는 오직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기관을 직접 방문해야만 발급받을 수 있었다. 평범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서류를 준비하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2순위인 맞벌이 가정은 양쪽 부모가 모두 일을 하고 있다는 증명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일자리가 체계적인 서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회사일수록 그런 일을 처리할 담당 직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이 좋아 서류들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고비는 그다음이었다. 아이의 나이를 증명하기 위한 출생 신고 서류와 위생적인 단체 생활을 위한 의사의 건강확인서를 함께 제출해야만 했다.
출생 신고 서류는 본래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만이 쓸 수 있었다. 그러니 해당 의사가 일을 그만두거나 하여, 연락이 닿지 않으면 서류를 받을 수 없었다.
의사의 건강확인서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부모가 하루 일을 쉬고 온종일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보낼 수 있다면 말이다.
안테는 잘 만들어진 서류의 목록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서류 하나하나가 참 정당하면서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그는 가능한 한 보육원의 홍보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입학 서류는 복잡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누가 입학원서를 넣겠는가? 아이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보육원 사업은 시작도 전에 완벽하게 망하는 것이 아닌가. 공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정원이 다 채워졌다.
공작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적은 내부에 있다더니 알고 보니 행정부 안에도 일하는 여성이 많은 탓이었다. 그녀들 사이에서 소문은 무서울 정도로 빨리 퍼져 나갔다.
게다가 모든 입학원서에는 그 복잡한 서류들도 완벽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2년 전쯤에 일하는 사람들이 어디서도 원하는 서류를 신청할 수 있도록 ‘서류 우편 신청’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류 발급 절차를 간소화한 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다니! 그냥 복잡하고 까다롭게 두었어야 했는데!
정원이 채워졌으니 안테는 이제 개원을 준비해야 했다. 보육원 주변에 교수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과 면담하여 필요한 도구를 사는 일부터, 일손을 거드는 시녀를 뽑는 일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렇게 날씨가 좋은 어느 3월. 행정부 산하의 보육원이 무사히 개원하게 되었다. 공작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랑하는 딸까지 그곳에 보내야 했다. 가능하면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도 있었고 한 부모 가정이라 우선순위마저 높았다.
안테가 바라는 것은 이제 단 한 가지였다. 어쨌든 향후 1년 동안은 손 가는 일 없이, 조용히 프로젝트가 끝나고, 완전히 종료되는 것. 그러나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보육원 사업은 거의 매일같이 안테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오늘도 그런 듯했다. 아루를 데려다준 후 집무실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일렬로 놓인 기묘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유였다.
살균된 유리병에 들어 있는 우유라니, 얼마 만일까? 그 통통한 라인이며, 촌스러운 로고며 안테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도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우유였다.
“이건 뭐지?”
안테는 마침 결재 서류를 꾸역꾸역 들고 들어오는 중급 관리에게 물었다.
“보육원의 긴급 요청입니다.”
아, 역시 그 귀찮은 사업. 어쨌든 어린이의 성장에는 우유가 필수였으니, 안테는 ‘과연!’이라고 외쳤다. 우유를 사 주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다.
“그러면 이것들을 여기에 둘 것이 아니라 보육원으로 가져다주도록 해라.”
“공작님, 송구스럽습니다만 보육원의 요청은 ‘빈 우유병’입니다.”
“……쓰레기를 뭐에 쓰나?”
“어린이들의 미술 활동에 필요하다고 합니다.”
중급 관리는 설명을 마친 후, 끙 소리와 함께 두꺼운 서류들을 안테의 책상 위로 올려 두었다. 둔탁한 소리가 책상을 울리고, 우유병이 조금 흔들렸다.
안테는 일단 우유병을 하나 집어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주어진 일은 가능한 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병을 집어 마침 서류를 가져다준 중급 관리에게도 내밀었다.
“빨리 마셔라.”
안테가 재촉했지만,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도리질을 쳤다.
“저, 저는 우유 알레르기가 있단 말입니다!”
진실을 알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는 뒷걸음질 쳤다. 알레르기라는 말에 안테가 강하게 권하지 않자, 얼른 문을 열고 나가며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는 빠르게 도망갔다.
“오늘 점심시간쯤에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안테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오전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집중할 시간에 이런 귀찮은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그는 10병의 우유를 바구니에 담아 들었다. 배달 아주머니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이든 일이 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법이다. 그는 당당하게 직원들 사이를 누비며 우유를 하나씩 권했다. 좋아서 마신 사람도 있었지만, 성인이 되어서까지 흰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우유를 마시게 되었다. 다행히 우유는 15분 만에 모두 제거되었다. 공작은 자신의 신속한 대응에 뿌듯해하며 빈 병을 바라보았다.
……우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봐라, 솔! 유리병 닦는 솔은 어디 있나? 솔!”
그는 유리병을 하나하나 뽀각뽀각 닦아 내고, 햇빛에 살짝 말린 후에야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유리병이 햇빛에 반짝이고,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며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나라의 공작에게 이런 사소한 일을 시키다니, 역시 몹쓸 보육원이다. 하루빨리 문을 닫게 해야겠어.
그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우유병을 가져다주러 갈 시간이 되었다.

* * *

따듯한 봄 햇살이 시작의 기운을 발하는 3월. 추운 겨울 동안 혹독했던 준비 과정을 거쳐 낡은 회색빛 건물 바로 옆에 새로운 국가 기관이 설립되었다.
이 나라의 공작님보다 어린이 청소 반장의 권력이 더욱 강력한 이곳은 그 어떤 신분 차이도 인정되지 않는 곳. 바로, 어린이들을 위한 보육원이었다. 최고의 교수진과 귀여운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에는 황실에서 파견된 단 한 명의 시녀가 모두의 시중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미 보’. 로미의 하루는 현관에서 학부모와 아이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청소, 정리와 심부름으로 꼬박 채워졌다.
오늘은 아이들의 미술 활동이 있었다. 안테가 깔끔하게 씻어서 말린 우유병을 가져다준 덕분에 로미의 일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예쁜 모양의 유리병에 사람 모양의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까지 꼬물꼬물 열심히 꾸며 붙였다.
“다 만들었어요!”
아이들은 뽐내는 얼굴로 칭찬을 기다렸다. 교수와 로미는 아이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삐뚤삐뚤해도 제 손으로 끝까지 만들어 낸 것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 주기를 바랐다.
“열심히 했네. 멋지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자기 작품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형편없는 모양이 된 것이어요.”
아루는 제 앞에 놓여 있는 작품을 보고 울상을 했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아루이지만 미술에는 영 재주가 없어 보였다.
“아루, 그래도 멋지게 해냈어. 정말 대단해.”
아이들의 작품은 교실 뒤편에 올망졸망 놓였다. 모두가 다른 모양과 색으로 만들었지만 한데 모아 두니 알록달록 귀여운 조화가 보기에 좋았다. 아루는 교수들 몰래 자기 작품을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살짝 밀어 두었다. 그 모습을 본 로미는 굳이 아루에게 무어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미술 활동 이후 아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교실을 정리하고 치웠지만, 그 작은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았다. 결국, 그것을 치우는 일은 아이들이 모두 하원하고 난 뒤 로미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