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올림피언 1화
01. 선수촌 (1)


태극 마크를 달게 된 건 우연이었다.
3년 전 올림픽에서 1,500미터 은메달을 획득했던 선배가 월드컵 1차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뒤를 이은 연맹의 어이없는 실수가 아니었다면 기회가 내게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실력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부상이 잦았고, 이렇다 할 기록을 세운 적도 없다.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8위를 한 것이 시니어 이래 최고 성적이었다. 최고 성적이 8위. 원래대로라면 올림픽 문턱도 밟지 못했다. 하필 이번 시즌에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고, 또 하필 이번 시즌에 선수들이 줄줄이 징계를 받은 것이 내겐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이런 내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어쩌다 국대.’ 선수촌 정문을 넘는 걸음걸음 부담이 어깨를 눌렀다. 부상, 기량, 군 면제……. 복잡한 문제들이 미리 지급받은 단복과 함께 캐리어 안에서 덜그럭거렸다.
짐도 풀지 않고 감독님부터 찾아 인사를 드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감독님은 화랑관에 들어오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푹 한숨을 쉬었다. 코치진들도 말은 않지만 착잡한 얼굴이다.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러는 게 당연했다. 별다른 메달도 기록도 없는 선수가 단지 선발전에서 깜짝 8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대타가 되었다. 심지어 이렇게 갑자기.
동계 올림픽 최고의 효자 종목에서 카드 한 장은 버리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앞으로 묵을 숙소의 동과 호수를 알려 주는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나 역시 긴장해 룸메이트가 누구인지는 듣지도 못했다.
“인사 잘하고.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
“네.”
‘선호가 룸메이트였다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연세대 동기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덟 개 동이 늘어선 사이를 걸어 쇼트트랙 선수들이 쓰는 건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휴게실을 지났다. 처음 와 보는 선수촌 내부에 정신을 놓고 걷다 방문 앞에 놓인 빨래 건조대에 옆구리를 부딪혔다.
“아.”
양말이 엄청 컸다. 나 때문에 떨어진 양말을 주워 도로 올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룸메이트는 방 안에 있었다.
진심으로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문 오른쪽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습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던 남자가 노크도 없이 들어온 나를 흘긋 보았다. 젖은 머리칼이 멋대로 이마에 들러붙어 있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뭐지. 몰래카메라인가. 아니지. 저 사람이 왜 나를 놀려. 상대의 눈매가 좁아졌을 즈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절로 사과하는 말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거둔 남자가 뒤돌아 걸어간다. 남자는 검은 트레이닝 바지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물기 젖은 상체에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커다란 맨발이 바닥에 물 자국을 만들었다. 그가 남긴 수분기와 바디 워시 냄새가 훅 얼굴을 덮쳤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시선으로 남자를 따라갔다. 맞은편 사각형 창문으로 남자의 앞모습이 비쳤다.
은반처럼 하얀 피부, 스케이트 날처럼 날카로운 눈매, 그것보다 더 예리한 턱선. 매끄러운 왼뺨에 살짝 남은 흉터, 쇼트트랙 선수답지 않은 늘씬한 키. 올라오면서 본 빙상 훈련장 입구에 사진이 걸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동계 올림픽이 낳은 최고의 스타.
남지훈이었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을 닫는 것도 잊고.
허벅지 부상으로 나를 진천에 넣어 준 선배가 1,500미터 은메달리스트였다면, 금메달은 남지훈이었다. 3년 전, 남지훈은 1,500미터와 계주를 포함한 쇼트트랙 남자부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석권해 대한민국에 총 네 개의 금메달을 가져다주었다.
유난히 고전하던 지난 올림픽, 남지훈이 가져다준 메달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전체 순위에서 일본에 밀릴 수도 있었다. 메달을 맡겨 놓은 양 생각되던 종목인 쇼트에서도 이런 선수는 귀했다. 올림픽 첫 출전에 혜성처럼 나타난 괴물. 아직 대학도 정해지지 않은 고등학생 선수. 앞으로 세계 대회를 몇 번이나 더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남지훈의 재능과 어린 나이에 열광했고, 그가 헬멧을 벗는 순간 숨을 죽였다. 붉은 헬멧을 벗고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흩트리며 드러난 앳되고 깨끗한 얼굴. 지금 당장 오디션 프로그램에 내보내도 거기서도 금메달을 따 올 것 같은. 빙상 아이돌. 그런 별명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전국 동계체육대회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유난히 근력이 떨어졌고 몸싸움에 약했다. 나보다 작은 선수와도 스치기만 하면 속절없이 밀려 나가떨어졌다. 틈만 나면 처박히는 통에 부상도 잦았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몸이 밖으로 튕겨지는 바람에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경기는 계속되고, 패배자에게 돌아올 관심은 없다.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내게 나를 인솔해 온 코치님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홀로 가운데서 벗어나 벤치에 앉았다. 무리해서 중심을 잡은 발목이 시큰거렸다. 환호도 함성도 전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발에서 벗겨 낸 스케이트화를 만지며 몇 분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주저앉아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쳤니?”
동시에 하얀 손가락이 내 발목을 감았다.
놀라 얼굴을 들었다. 트리코를 입은 누군가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신중하게 발목을 살피고 있었다. 딱 붙는 트리코 아래 젊은 여자의 허리만 한 허벅지가 종아리에 눌려 있다. 벗어 둔 장갑이 내 것보다 훨씬 컸다. 헬멧을 쓰고 있어 보이는 거라곤 베일 듯한 턱선과 붉은 입술뿐이었다. 막 경기를 끝마친 게 분명한데도 숨차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놀라 쳐다보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
“…….”
일순 감각을 잃었다.
중등부 시절 스케이트 날에 스쳐 생겼다는 흉터가 청결한 왼쪽 뺨에 희미하다. 얼빠져 바라만 보는데도 무심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도 단박에 상대의 이름이 떠올랐다. 남지훈. 배경으로 설치된 전광판 맨 위에 그의 이름이 빛난다. 지금 한창 세리머니를 해야 할 우승자가 왜 여기 있지? 난데없는 등장에 나는 말도 잊고 멍청히 눈만 끔벅였다.
그가 물었다.
“부은 것 같은데.”
“…….”
“허벅지는 안 아파?”
“…….”
“말 못 해?”
그러면서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가로로 찢어진 눈이 빤히 나를 보았다.
“대답. 듣고 싶은데.”
그제야 나는 여기가 경기장이고, 방금 전 나를 추월한 선수가 남지훈이며, 그가 자기 때문에-엄밀히 말하면 나 혼자 휘청했으니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발목을 다친 나를 친히 와서 살펴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위를 했기에 지금 바로 가 봐야 한다는 것도. 허둥지둥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느리고 벙벙한 대답이 내가 들어도 아둔하게 느껴졌다.
남지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긴 손가락이 발목의 굳은살 위에서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눈을 내리깐 그가 장갑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잊지 말고 의무실 가 봐.”
그리고 뒤돌았다.
딱 붙어 불편한 트리코를 입고도 그는 허리를 펴고 걸었다. 달려온 그의 코치가 그에게 재킷을 걸쳐 주었다. 나는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갑자기 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이상한 비유만 자꾸 생각났다. 왕족의 행차에서 군중에 떠밀려 쓰러진 거지를 친히 말에서 내려 일으켜 주는 왕자라든지, 미국 고등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소년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는 풋볼팀 주장이라든지…… 뭐 그런 상황들.
“…….”
아래로 손을 내렸다. 복사뼈를 매만졌다. 그 위의 딱딱한 살도 만졌다. 잡혔던 발목이 타는 것 같았다. 진짜 부상은 그의 손가락이 입힌 양.
고개를 들었다. 목을 뺐다. 저 멀리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남지훈을 바라보았다. 전광판에 흐르는 그의 이름과 번갈아 나오는 클로즈업 화면도 보았다. 하얀 얼굴, 얼음 같은 무표정. 하지만 저 손의 온도를 알고 있다. 열기라고 불러도 좋을 뜨거움.
그렇게 주제에 맞지 않는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겪는 짝사랑은 굉장했다. 며칠에 한 번씩은 그가 꿈에 나왔다. 그가 나온 방송, 잡지, 경기는 수백 번씩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훈련을 할 때도 그가 생각났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선수촌 빙상장에 있을 남지훈을 떠올렸다. 언젠가 진천에 입소해 그와 같은 훈련장을 쓰고, 친한 선후배가 되어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선수촌 입소는 대한민국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주제넘는 건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그와 나 사이의 어마어마한 기량 차이에도 감히.
짝사랑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열 같은 감정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다가도 때론 일부러 신경을 끄려 노력했다. 내 분야의 일인자이니 안 볼 수는 없었지만 절대 필요한 양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다. 좋아하는데 따라갈 수 없음에 좀먹히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생각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나 자신의 경기력에만 집중하며, 그렇게 운동을 계속하려고. 상대방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왔다 갔다, 관심을 켰다 껐다, 변덕을 죽 끓이듯 하며.
입촌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단연 남지훈 선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어물어물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지훈은, 선배는 내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자기 할 일만 했다. 수건을 책상 위에 던지고 티셔츠를 꿰어 입는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티가 남았던 얼굴이 그새 남자가 되어 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머릿속으로 수천 번 연습했던 첫인사를 마침내 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여준이라고 합니다.”
“알아.”
“네?”
“안다고.”
“어…… 아.”
어떻게 알지. 슥 나를 쳐다본 선배가 침대를 가리켰다.
“이쪽 써.”
“네에…….”
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오기 전까지 선배 혼자 쓰고 있었던 듯 다른 이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열린 옷장엔 운동복뿐이고, 책상 위엔 방금 내려놓은 수건과 장비와 노트북뿐이다. 그 외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두 침대 사이가 생각보다 가까워 조금 당황스러웠다. 베개는 각각 두 개씩. 혹시 침대가 구겨질까 조심조심 걸터앉아 얌전히 다리를 붙였다.
그런 내 맞은편에 선배가 앉아 턱을 괴었다.
선배는 내게 뭘 묻지도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정말 이미 다 아는 것처럼. 그저 턱을 괴고 빤히 나를 보기만 했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봤다. 대놓고 나를 관찰하는 선배 앞에서 나는 눈만 굴렸다. 내가 먼저 말을 붙여야 하나. ‘만나서 영광입니다’ 혹은 ‘왜 쳐다보세요?’ 나는 아직 메고 있던 가방을 내리지도 않은 채였다. 땀이 났다.
“저…… 짐 풀어도 되나요.”
“맘대로 해.”
“네에…….”
어깨만 움직여 가방끈을 내렸다. 내가 장비를 넣어 다니는 백팩은 선배가 지난 세계선수권에 들고 나온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스케이트화와 옷가지, 개인 소지품을 꺼내는 동안 계속 응시당하는 통에 몇 분이 몇십 분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선배가 일어섰다. 덩달아 나까지 벌떡 일어났다.
선배가 물었다.
“밥 안 먹어?”
“밥이요?”
“응.”
그가 시계 옆에 붙은 일과표를 향해 턱짓했다. 지금 시간에 노란색 형광펜으로 별이 그려져 있었다. 식사 시간이다.
“아…… 전 괜찮아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내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속눈썹이 뺨의 흉터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화보에서 본 표정이다. 턱을 들고 눈만 내리깔아 쳐다보는 표정. 얼굴이 새빨개졌다.
“짐부터 풀고 먹을게요.”
“그러든지.”
장비가 든 가방을 챙긴 선배가 인사도 없이 문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방 안의 공기가 제대로 느껴졌다. 내내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배가 나가고서야 알았다.
“아직도 그 가방 쓰시는구나…… 나랑 똑같네.”
똑같은 가방. 헷갈리지 않게 잘 챙겨 다녀야지.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호텔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선배의 침대는 그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자리만 살짝 주름이 가 있다. 방문을 나서 확인하니 문 왼쪽으로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패가 보였다.
407호
쇼트
남지훈┃이여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손등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렇게 8월 28일, 동계 올림픽을 166일 앞둔 여름. 나는 금메달리스트 남지훈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

기록적인 성과를 낸 스포츠 스타에게는 별명이 붙는다. 빙속 여제, 스켈레톤 황제. 주로 왕족이나 황족이다. 반면 남지훈 선배의 별명은 아이돌이었다. 내 생각에 그건 전적으로 외모 때문이었다.
하얗고, 서늘한. 어느 시대에 태어나도 인기 있었을 것 같은. 왼뺨에 남은 흉터도 선배의 준수함을 가리진 못했다. ‘오히려 그 흉터 때문에 더 유니크해 보여.’ 내 동생이 매일 하는 말이었다.-걔는 자기 오빠가 선수인데도 나한텐 관심조차 없이 남지훈 선배만 쫓아다녔다-
팬들은 선배 특유의 영리한 이미지를 좋아했다. 소년 시절부터 기자들이 무슨 질문을 던지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술술 답변하는 말솜씨나 안 그렇게 생겨선 빼지 않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모습 등. 별명처럼 연예인을 했어도 잘했을 거라고, 선배를 만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확실히 선배에겐 관심을 갖게 하고 사랑을 쏟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까칠하고, 기자가 이상한 질문을 하면 무시하고, 대놓고 금메달 밑으론 취급조차 안 하는데도 수긍이 갈 만큼.
가까이서 겪은 선배는 정말 운동만 아는 사람이었다. 시즌이 아닐 때에도 각종 방송과 광고에 꾸준히 출연하며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는데도 붕 뜨는 기미가 없었다. 그 흔한 여자 연예인이나 스포츠 아나운서와의 염문조차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지도 않았다. 성실하고,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스케이팅만 생각하는 사람. 저렇게 잘생기고 섹시한데도 선배가 누구를 만나 연애를 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예 그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감히 후배가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게 죄송할 정도였다.
“선배님, 물…….”
고된 훈련을 마친 직후에도 한숨 한 번 쉬지 않는 선배에게 다가가 물병을 내밀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트랙에서 진행되는 체력 훈련은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받으며 쇼트트랙 주행 동작 다섯 가지를 번갈아 하는 동안에는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죽고 싶다.’ 생각한다고 죽지는 않으니까 버티고는 있지만…….
온몸이 소금기로 버석버석했다. 우리가 흘린 땀으로 지상 트랙이 수영장으로 변할 지경이다. 선배 역시 더운지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운동복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붙이고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던 그가 물병을 내미는 나를 흘긋 보았다.
“형.”
“네?”
“형이라고 해.”
여기서 너만 선배라고 하잖아. 내 손에 든 생수병을 채 가며 선배가 덧붙였다. 힘이 좋아서, 가볍게 쥐었는데도 병에서 아그작 소리가 났다.
“차갑네.”
“네…….”
아이스박스에서 가장 차가운 물을 골라 왔으니까. 반쯤 언 물은 정말로 차가워서, 그 물을 채 가는 선배의 손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뜨겁고 끈적한 살이 내 손등에 쩍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트랙으로 쏟아지는 햇볕에 선배의 어깨에 난 솜털과 그 위로 번들거리는 땀까지 그대로 보였다. 밝게, 너무나 환하게. 눈을 찡그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한 번 쥐었다 놓아 준다. 내 살갗에 있던 열기가 선배의 손바닥으로 옮겨 갔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찬란한 여름 햇살 아래 열 오른 두 살이 붙었다 떨어지고, 이내 다시 다가와 붙었다.
덥고, 덥고, 덥고…….
체취까지 보이는 것 같고.
선배는 한 손으론 물을 마시고 한 손으론 허리에 차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풀어 뒤로 던졌다. 반은 마시고 반은 머리에 뿌린다. 그렇게 500밀리리터 생수병 한 통을 끝까지 비운 그가 습관처럼 플라스틱 병을 구겼다.
“그래서, 싫어?”
“네?”
“형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요…… 좋아요.”
“그럼 됐어.”
그러곤 자신을 호출하는 코치님에게로 가 버렸다.
선배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그 사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코치님은 태블릿 PC와 펜을 들고 있었다. 선배가 붙자 코치님의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겼다. 두툼한 손바닥이 태블릿의 화면을 선배 쪽으로 기울였다. 방금 촬영한 선배의 동작을 보여 주며 열심히 무어라 설명한다. 선배 역시 자신의 스마트폰에 뭔가를 기록하며 코치님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 선배 정도면 교정할 자세나 바꿀 주행 방법이 없을 텐데도 그랬다.
집중하는 옆모습을 바라보다 뒷목을 쓸었다. 선배가 버리고 간 모래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떨어질 때 되게 묵직한 소리가 났는데. 나도 저걸 찰까. 고민하는 뒤통수로 별안간 충격이 닥쳤다. 나는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놀라 뒤돌아보니 감독님이다. 그가 치켜 올린 주먹을 흔들었다.
“뭘 멍하니 있어? 이여준, 한가해?”
“아닙니다.”
“기량이 달리면 노력으로 승부해야지. 아무리 시대가 변했대도 은메달 따면 아쉬운 은메달 소리 듣는 게 현실이야. 특히 우리 종목에서는. 네가 어쩌다 국대라고 국민들이 너 빌빌거리는 꼴 봐줄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정신 차려!”
한 번 더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엔 관자놀이를 맞았다. 옆통수가 화끈하며 머리가 핑 돈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감독님은 비틀거리는 내게 기어이 꿀밤까지 놓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쾅. 주변 사람들 모두가 어느새 입을 다문 상태였다. 트랙 전체가 조용했다. 감독님 뒤로 눈이 마주친 선호가 입모양으로 물었다. ‘괜찮냐?’ 무안하게 고개만 주억거리며 몸을 돌렸다. 지훈 선배까지 이쪽을 보고 있는 걸 알았을 땐 얼굴이 화끈했다. 죽을까……? 다행히 곧장 다음 훈련이 시작되어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도구함으로 달려간 코치님이 노란 벨트 한 묶음을 가져왔다.
“으. 제일 싫어.”
선호가 뇌까렸다. 각종 방송과 인터뷰에서 많이 언급되어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코너 벨트 훈련이었다.
쇼트트랙의 순위는 코너링에서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 코너를 돌 때 밖으로 튕겨 나가려는 원심력을 얼마나 잘 이겨 내는가가 승부의 대부분을 좌우했다. 그 원심력을 버텨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코너 벨트 훈련이었다.
벨트의 한쪽 끝은 코치의 몸에, 반대쪽 끝은 선수의 허리에 묶고 최대한 앉은 자세로 옆으로 걸어가게 한다. 키가 큰 남지훈 선배에게는 특히 중요한 훈련이었다. 키가 클수록 코너를 돌 때 밖으로 튕겨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쇼트트랙을 하려면 키가 큰 게 좋나요?’라는 질문에 ‘적당한 게 좋습니다. 저처럼’ 하던 선수 출신 해설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우리 종목에서 지나친 장신은 단점이다. 선배는 코너링에 불리한 큰 키를 탁월한 기량과 경기력으로 커버하는 선수였다. 키도 크고 체력도 좋으니 롱트랙으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도 많았으나, 성적이 압도적이니 코치진도 강요하지는 못했다.
“이여준 먼저 해. 정신 팔고 있던 거 보니까 자신 있나 본데.”
“네에…….”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