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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4화
Chapter 1. 회귀 전, 비극 (3)


스-악.
허공에 핏줄기가 튀었다. 사람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다를 것 없다지만, 동족의 것이라 그런지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검을 든 자세로 그대로 심장이 뚫린 자객이 옆으로 허물어졌다. 자연히 놈을 공격한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
요나스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졌다. 어째서 저 남자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배신했다고 믿었다. 주인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적 없다는 듯 흑기사는 요나스의 목숨을 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쓸모없는 벌레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복도에 있는 것들도 청소했으니 당분간 이 방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요나스의 눈이 잘게 떨렸다. 흑기사는 멀쩡한 몰골이 아니었다. 왼팔이 절단되었고 몸 곳곳에 검이 꽂혀 있었다. 고통 때문인지 흑기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상처가 심해.”
손을 뻗어 유일하게 멀쩡한 심장을 쓰다듬었다. 아직 힘차게 뛰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 다치시겠지만,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종장에게 말해 두었으니 그가 받아 줄 겁니다.”
“……알고 있었어?”
오늘 하려는 일은 요나스와 막스만 알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황자님의 기사인데 제가 모르는 게 있겠습니까.”
짙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던 흑기사가 고개를 내렸다. 요나스의 이마에 버석한 입술이 닿았다. 따뜻하면서도 서글픈 접촉이었다. 흑기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귓가로 입술을 내려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제 주인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절박할 정도로 애타는 시선이었다.
……아라!
……여기에 흔적이 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흑기사는 요나스의 촛대를 빼앗곤 그를 창가로 밀었다.
“황자님!”
흑기사의 말대로 막스가 밑에 있었다. 요나스는 반사적으로 기사의 손을 붙잡았다.
“가, 같이…….”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흑기사가 씩 웃었다.
“절 잊지 마십시오.”
요나스의 몸이 뒤로 밀렸다. 허공에 붕 뜬 그가 순식간에 낙하했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흑기사가 기름 줄에 불을 붙이는 게 보였다. 줄을 타고 번진 불길이 궁 곳곳에 숨겨 놓은 폭약통에 닿았다.
콰콰쾅!!

그날, 사파이어 궁이 불길에 휩싸여 폭발했다.

***

요나스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성년식 예복과 달리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어제 그토록 큰일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 일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했다. 명확한 진실이 있음에도 증거가 손쓸 새도 없이 사라진 탓이었다.
사파이어 궁의 폭발은 단순 사고로 처리되었다. 아직 권력을 쥐지 못한 결과였다.
불타 버린 궁, 저를 위해 죽은 기사, 새까맣게 탄 수많은 시신.
아직도 손이 떨렸다.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지만 살인을 한-폭발로 불타 죽은 적이 제법 많았다- 충격은 쉬이 잊어버릴 수 없었다. 저를 죽이려 한 이들이지만, 그것이 충격을 줄여 주진 못했다.
“황자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래.”
요나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지난 일은 잊어야 할 시간이었다.
어깨를 펴고.
얼굴은 치켜들어 오만하게 눈을 내리뜨고.
발 보폭은 좁지 않게.
시선은 정면으로.
나는 요나스 드 아레프다.
성년식 장소인 이름 없는 숲으로 향하는 요나스에게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안에는 감탄과 질시와 동경 등의 온갖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오직 황족만이 출입 가능한 숲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유를 맞이했다.
그는 안쪽으로 난 단 하나의 길을 천천히 걸었다. 소음이라곤 풀숲이 바람에 스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밖에 없었다. 길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작은 호수였다. 여신 에오카의 시작이자 끝인 장소였다.
요나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고했다.
“에오카에 영광을, 아레프에 축복을, 여신께 경애를.”
부디 먼저 간 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호수가 환하게 빛났다. 천천히 스며드는 이능을 느끼며 요나스는 작게 흐느꼈다.

요나스 드 아레프.
오늘로써 그는 성년이 되었다.

***

이십여 년이 지났다. 요나스는 중년의 사내가 되었고 제국은 겨우 안정되었다. 미숙한 청년이었던 황자가 어엿한 황제의 권력을 가지기까지 많은 풍파가 있었다. 어느 때는 빼앗기고 어느 때는 빼앗았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들여라.”
문이 열리고 요나스와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강건해 보이는 청년이 들어왔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과 별처럼 빛나는 청안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아직도 심장에 아픈 가시로 남아 있는 제 형제였다. 요나스는 아들을 볼 때마다 먼저 떠난 여동생을 떠올렸다.
“아레프에 축복을. 폐하를 뵙습니다.”
약식으로 예를 취한 황태자의 눈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또 밤을 새우신 것입니까.”
“음.”
요나스가 머쓱한 얼굴로 미간을 긁적였다. 황태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와 달리 병을 달고 사는 아비를 아는 탓이었다. 몸이 약한 요나스와 달리 황태자는 건강하게 태어나 황궁 기사 못지않은 검술을 익혀서 벌써 귀족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 건강은 황궁의가 잘 살피고 있단다. 그래. 이번 사냥 대회 때문에 찾아온 것일 테지?”
“예. 올해는 제가 주관하고 싶습니다.”
스스럼없는 요구에 웃음이 나왔다. 아아. 정말 나디아 같구나. 무척 빛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그런지 요나스도 황태자에게는 무른 경향이 있었다.
“그래. 이번엔 네게 맡기마.”
“예!”
황태자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요나스는 그 속을 짐작했다. 이제 막 성년을 넘긴 황태자가 사냥 대회에서 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성년식 때 얻은 이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일 테지. 황족의 이능은 권력의 핵심이니 이번 사냥 대회에서 권력을 공고히 할 생각인 듯했다.
“사냥 대회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능 인명록 작성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대부분이 국가 등록을 마쳤지만 못 찾은 자들도 몇 됩니다.”
“천리안으로도?”
“방어 계열이라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사원까지 파견했지만 엉뚱한 소리만 들고 오는지라…….”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매해 등록을 거부하는 이능인이 발생했다. 국가 등록을 마치면 매달 생활보조금 지원, 교육비 무료, 의료비 무료 등의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지는데도 그랬다. 그중엔 제힘만 믿고 멋대로 날뛰는 이들도 있었다.
“어디 들어나 보자.”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는 보고가 제국 최대 규모의 정보 길드 수장이 이능인이라는 것입니다. 출신이나 주거지는 알 수 없으나 워낙 비밀에 휩싸인 인물이니 마냥 거짓은 아닐 듯합니다. 반대로 가장 허무맹랑한 보고는 북부의 거울 호수란 곳에 영생의 공주가 사는데 그녀가 이능인이라는 겁니다.”
“영생의 공주?”
“예. 호수 밑에 살면서 수백 년간 사람을 유혹해서 죽였다는데, 조사해 보니 그냥 일반 호수였습니다.”
“그런 전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황태자 말대로 썩 가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요나스가 손을 뻗었다. 아들이 손을 잡자 가까이 끌어당겼다.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 내 대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네 대에서 해결하면 될 일.”
그는 무릎 꿇고 앉은 황태자의 청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순종적인 자세와 달리 그 안에 숨겨진 야심이 얼마나 거대한지 요나스는 알고 있었다.
“곧 네게 이 자리를 물려주마.”
“……폐하!”
“쉿. 조용히. 이만하면 오래 버틴 게 아니냐. 너도 알겠지. 나는 이제 얼마 견디지 못한다.”
이건 예감이고 확신이었다. 요나스는 요즘 제 몸이 점차 무너지는 걸 느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피로가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네 것이다.”
황태자의 눈이 굳건하게 빛났다. 이번 대의 단 하나뿐인 황족으로서 제 위치에 자부심을 느끼는 아이였다. 이 아이라면 아비와 같은 고난은 겪지 않을 터였다.
“많은 갈등이 있을 것이다. 너를 누르려는 자들과 일평생 힘겨루기도 해야 할 테고. 하지만 해낼 거라고 믿는다.”
“예. 아버님. 에오카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제국민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사랑하며 자신의 타락을 경계하며 살겠습니다.”
“그래. 나의 아들.”
요나스가 고개 숙여 황태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시간 속에서 그나마 웃음을 잃지 않았던 건 모두 이 아이 때문이었다.
“이제 가 보거라.”
“아레프에 축복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가 몸을 돌렸다. 당당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요나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바람이었다. 그는 고개 돌려 창밖으로 서서히 낙하하는 가을 낙엽을 쳐다보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옛 잔재는 저 낙엽처럼 스러질 때였다.

***

수많은 진통을 낳았으나 황위를 물려주는 건 결국 요나스의 뜻대로 이뤄졌다. 황태자의 대관식은 수많은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진행되었다. 아레프 황가를 상징하는 검을 차고 태양만이 쓸 수 있는 황관을 쓴 새로운 제국의 주인을 향해 기쁨의 환호성이 터졌다. 요나스는 요란한 함성을 뒤로하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가시나요.”
“황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황후가 다가왔다. 그녀는 서글픈 눈으로 요나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함께하고 싶다고 해도 폐하께선 거절하실 테지요.”
“아직 당신은 살아갈 날이 많지 않소.”
“본심은 그게 아니면서.”
쓴웃음을 지은 황후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요나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의 앞날에 에오카 여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당신의 앞날에 에오카 여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예의를 다했지만, 사랑이 없었기에 많이 외로워한 여인이었다. 이젠 황제의 모후로, 제국의 황태후로서 새로운 기쁨을 찾았으면 했다. 덤덤히 돌아서는 요나스의 뒤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가 끝내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요나스는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오늘따라 황궁이 참으로 적막했다. 평생 나고 자란 곳이었다. 황위와는 먼 황자로 태어났으나 황제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어린 날의 그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요나스가 몸을 돌렸다. 조용히 그를 따르던 궁인들이 서글픈 얼굴로 눈가를 훔쳤다.
“너희도 이만 돌아가라.”
“폐하.”
“오랜 세월 수고 많았구나.”
“……사랑스러운 황자님을 위해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요나스와 세월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그의 눈이 한껏 휘어졌다.
“이만하면 잘한 거겠지?”
“예. 폐하. 막스 시종장님이 계셨다면 매일, 매 순간 자랑하셨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런 사람이지.”
3년 전 먼저 곁을 떠난 노시종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요나스는 궁인들의 어깨를 차례로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야겠구나.”
“곧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궁인들을 뒤로하고 요나스는 이름 없는 숲으로 들어섰다. 지금의 행보에 미련은 필요 없었다.
숲 안쪽은 성년식 때와 별다르지 않았다. 적막했고 평화로웠다. 요나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호수 근처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역대 황제들이 종종 들르곤 했던 이 작은 휴식처는 답지 않게 단출한 내부를 자랑했다. 요나스는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았다. 담요로 무릎을 덮고 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이젠 읽어도 되겠지.”
품에서 빛바랜 편지 봉투를 꺼냈다. ‘사랑하는 황자님께’로 시작하는 편지는 막스가 죽기 전 그에게 남긴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서글픔과 먼저 간 이들을 향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차마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요나스는 편지를 읽는 내내 울고 웃었다. 막스의 편지엔 그를 향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슬픈 내용이 아니지만 눈물이 나는 건 노시종 생전에 마음 놓고 함께 웃지 못했던 지난 세월이 아쉬워서였다. 좀 더 잘해 줄걸. 좀 더 웃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그는 편지를 접어 창턱에 올려놓았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심장이 천천히 멎었다.
“아…….”
이제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래전 죽은 가족과 막스와 그리고……. 그를 지키고 죽은 기사와.
궁금했다. 왜 내게 그렇게 잘해 줬는지. 단순한 충심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은 또 뭐였는지. 하지만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요나스는 눈을 감았다. 서서히 세상이 암전되었다.

「사랑하는 황자님께.

황제가 되셨지만, 제겐 항상 어린 황자님이라 입에 붙는 말로 부르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발견하셨을 때 저는 황자님의 곁에 없겠지요. 끝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자연의 흐름은 피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황제로 우뚝 선 모습을 볼 때마다 이 막스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속에 담은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긴 세월에 점차 무뎌지긴 했겠지요.
죽을 때가 되니 많은 생각이 듭니다. 황자님껜 지나간 시간은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셔야 한다고 항상 조언했지만, 오히려 간간이 그 세월을 추억한 건 저였는지도 모릅니다.
처음 황궁에 들어온 기억, 몬라드 선황제 폐하를 모셨던 기억, 갓 태어난 황자님을 맡게 되어 어쩔 줄 몰랐던 기억…….
좋았던 추억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행복한 기억은 황자님과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황자님은 황후 폐하의 난산으로 몸집이 참으로 작으셨습니다. 작은 손으로 제 손가락을 꼭 붙잡는데 마치 영혼을 빼앗기는 기분이었습니다.
조그만 부리 같은 입술로 제가 주는 걸 넙죽넙죽 받아 드시던 황자님, 오동통한 다리로 처음 걸으시던 황자님, 폐하보다 저에게 먼저 말문을 트신 황자님 등 모든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황자님.
제게 황자님은 하나뿐인 주인이면서도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닥친 비극에 더욱 냉정하게 굴었는지도 모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세상의 풍파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니 후회되더군요. 진작 황자님을 궁에서 빼돌렸어야 하진 않았나, 하는 후회가 말입니다. 이 삭막한 궁에서 나가 작은 영지를 얻어 황자님께선 책을 읽고 저는 차를 준비하는 그런 일상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황자님. 황자님을 만난 이후로 저에겐 다른 어떤 이보다 당신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것만은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세월, 잘 견뎌 주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황자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또 만날 것입니다.
다음 생에서.

당신의 늙은 시종 막스가.」

***

추신. 황자님께서 종종 사파이어 궁이 있던 자리를 보는 건 그 죽은 기사 때문이겠지요?
이 늙은이, 아직 눈치는 살아 있습니다.
황자님의 첫사랑이 시커먼 사내놈이라니 기가 막히지만, 이미 죽은 자라 욕도 못 하겠습니다. 부디 오래 기억하진 마십시오. 질투 납니다.



Chapter 2. 회귀, 다시 시작된 세계 (1)


기적이란 인간의 가장 큰 염원과 신의 장난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요나스는 날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어리둥절했다.
“황자님?”
차를 따르던 막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요나스는 눈을 피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왜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는지 의아했다.
숨이 멎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젊은 막스가 잠에서 깨워 주고 린다가 식사를 내왔다. 사파이어 궁은 멀쩡했으며 그를 지키다 죽은 이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녔다.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했고 고생한 후손을 위해 여신이 안배한 축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꿈이 너무 길었다. 시야가 또렷했다. 피부에 닿은 감촉도 생생했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으며 매일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아. 괜……찮아.”
무심코 나온 말투에 요나스는 혀를 깨물었다. 황제였을 때의 버릇이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오늘 오찬 약속은 못 간다고 전할까요?”
“오찬?”
“예. 카르스 황자님께서 오랜만에 형제들과 식사를 하고 싶다고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설마 잊으신 겁니까?”
“아. 아……니. 기억나.”
요나스는 눈을 내리깔아 떨리는 동공을 감췄다. 오래전 잃어버린 형제들 얘기에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들도 살아 있었다. 가장 황위에 어울리지 않는 형제를 놔두고 죽어 버린 이들이.
그는 가만히 막스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메려 해 침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 모습이 한없이 늙은, 스러진 낙엽 같던 이였다. 조용히 숨을 다한 노시종을 보며 얼마나 비탄에 빠졌던가. 꿈이면 어떻고, 현실이면 어떤가. 소중한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것에 감사했다.
“갈게. 준비해 줘.”
“예. 마차를 대기해 놓겠습니다.”
요나스는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자신이 막스의 어린 황자님이었던 시절로 돌아왔다는 걸 서서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황제였던 시절이 꿈이었는지도 몰랐다. 무척 생생하고 또렷한 일생이었기에 쉬이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다른 용건은 없겠지?”
“글쎄요. 곧 두 황자님의 성년식이 있을 테니 그것에 관해 얘기할지도 모르지요.”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부딪혔다. 요나스는 급히 헛기침하며 동요를 감췄다. 어느 시기인가 했더니 두 황자가 성년식을 치르기 전인 듯했다.
“황자님? 오늘따라 이상하십니다.”
“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어디 불편하시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응.”
요나스는 찻물을 머금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형제들의 생존만큼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폐하께선 괜찮으시지?”
“……? 아주 괜찮으십니다. 황자님보다 더 건강하신 분이잖습니까.”
“그래. 그렇지…….”
이토록 평화로운 분위기이니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곤 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 습관으로 짐작을 확실시했을 뿐이다.
그가 황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조사한 게 선황제의 죽음이었다. 모든 기록을 살피고 검시관을 수차례 불러 확인했지만 명확한 원인은 밝혀낼 수 없었다. 황제의 죽음은 병사에 가까운 자연사였다. 갑자기 쓰러져 수일간 혼수상태였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황궁의로도 모자라 신관까지 동원했지만, 원인을 몰라 고치지 못했다.
그 모든 일이 꿈이라면 어쩌면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확신하진 않았다. 수십, 수백 번 조사하고 검토하고 결론을 내린 후에도 다시 한번 살피는 게 황제의 일이었다. 방관하다 또다시 뒤통수를 맞느니 철저히 대비하는 게 나았다.
“막스.”
“예. 황자님.”
“짐……이 아니, 내가 좋아하는 거 잘 알지? 막스를 아버지같이 생각한다는 것도.”
“기분은 좋지만 그런 과분한 말은 넣어 두십시오. 폐하께서 우십니다.”
“설마.”
자식들의 아버지보다는 제국의 황제이기를 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정이 없는 건 아니나 막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무엇보다 가족의 정을 구걸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요나스는 막스의 손을 잡고 체온을 음미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이 손이 그리웠다. 어린 육체보다도, 익숙한 사파이어 궁보다도, 막스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머리 위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직도 이리 어리광을 부리시니 제가 마음을 못 놓는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막스는 다른 손으로 요나스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어린 낯과 달리 속엔 중년의 세월을 간직한 요나스의 얼굴이 머쓱함으로 달아올랐다.
“자.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린다!”
손이 떨어져 나갔다. 요나스는 아쉬움을 갈무리했다. 막스와 있는 것도 좋지만, 형제들도 빨리 만나 보고 싶었다. 황제였을 시절엔 가슴이 먹먹해질까 그들의 초상화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웠지만, 그만큼 원망스러웠다. 현재를 살기에도 벅차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요나스는 다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천천히 토닥였다. 이젠 젊은 나이에 멈춰 버린 형제들의 시간을 다시 마주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