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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1화
Prologue


빛이 찬란히 산란했다. 활짝 열린 창 바깥으로 안온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삶의 끝은 이토록 평안했다.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푸릇하게 질린 창백한 피부가 햇볕에 녹아들었다.
“아.”
요나스의 입에서 감탄이 터졌다. 온몸으로 쏟아지는 생의 감각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주름 하나 없는 손가락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Chapter 1. 회귀 전, 비극 (1)


이능의 제국 에오카.
천 년 전, 여신 에오카가 지상을 떠나기 전 아들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인 에오카 드 아레프를 위해 서대륙에 이능의 씨앗을 뿌렸다. 그 뒤로 대대로 번성한 제국은 현재 서쪽 대륙의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그 근간엔 다수의 이능을 보유한 황가와 매해 새로이 나타나는 이능인들의 역할이 컸다.
에오카력 999년.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에오카의 태양이 떨어졌다!”
21대 황제인 몬라드 드 아레프가 서거했다. 그의 나이 46세로 갑작스러운 변고였다.

***

비극은 예고 없이 닥친다.
“황자님…….”
요나스는 엎드려 흐느끼는 궁인들을 봐도 아무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저 멍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도, 다급하게 돌아가는 궁 내부의 상황도 마치 타인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황자님……!”
누군가가 옷깃을 붙잡았다. 요나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털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천천히 뒷걸음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난하고 평범했던 인생이 발끝부터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어서 황자님을 모셔라! 이제 제국의 태양이 되실 분이다! 어서!”
시종장 막스가 벼락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궁인들이 번쩍 고개를 들고 요나스를 쳐다봤다. 이미 그들의 눈에 요나스는 제국의 힘없는 삼황자가 아니라 태양이 되어 있었다.
먼 곳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힘이 흐르는 황궁에서 이토록 무도한 소란이 일어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요나스는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고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막스. 내가 들은 게 사실이야?”
“예. 황자님. 사실입니다.”
요나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두 형님이 죽었다. 동귀어진이었다. 황제의 국장 이후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싶더니 기어코 원치 않은 방향으로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세력이 굳건했기에 잡음이 있을지라도 무사히 황위에 오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황자 측의 세력이 강했던 모양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요나스는 방관자였다. 같은 황후 태생이자 친형제인 황태자의 편을 들었어야 했지만, 사태를 안일하게 생각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황비 태생인 이황자, 황녀와 척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이런 거였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이제 남은 황위 계승권자는 삼황자인 요나스 드 아레프와 막내이자 황녀인 나디아 드 아레프뿐이었다. 제국의 황위는 남녀를 가리지 않기에 황녀 또한 엄연히 자격이 있었다. 그녀에겐 적법한 계승권자였던 황태자가 없는 이 상황이 절호의 기회였다. 저 말발굽 소리는 이복 여동생인 나디아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소리였다. 요나스가 성년식을 맞이하기 전에 일을 끝낼 작정인 듯했다.
“서둘러라! 너희의 목숨을 바쳐라! 이 궁이 우리의 핏물로 잠길지언정 황자님만은 무사히 지켜 내야 한다!”
노시종의 고함이 사파이어 궁 구석구석을 진동시켰다. 몸을 일으킨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요나스의 눈이 천천히 젖었다. 오랜 세월 곁을 지킨 이들이었다. 제가 피하면 저들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막스. 도망가.”
목소리가 작았을까. 막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작은 기척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던 이가 마치 귀를 막은 듯 주인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챙―! 챙―!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2층까지 들렸다. 나디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던 나의 혈육. 꼭 이래야만 했던 것이냐. 요나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지만,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황위 따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그와는 맞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둘 모두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막스는 절망에 젖은 요나스의 손을 붙잡고는 천천히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황자님은 모르셨겠지만, 황녀께선 그 누구보다 황위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습니다. 기회를 놓칠 분이 아니지요.”
“막스. 제발 도망가.”
“3일입니다. 3일만 견디시면 됩니다. 네페스하임 공작이 군을 이끌고 올 겁니다. 그는 용의 힘을 지닌 자. 규칙을 중시하기도 하지만 황태자의 세력이기도 하니 다음 황위 계승권자로 유력한 황자님을 도우러 올 겁니다. 그래서 황녀께서 이토록 서두르는 것입니다.”
맥없이 끌려가던 요나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아늑했던 그의 공간이 불온한 공기로 가득했다. 스쳐 지나는 수많은 궁인이 무릎을 꿇고 마지막 예를 올렸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일어선 이들이 각자 무기를 빼 들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요나스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도망쳐……!”
적막한 복도에 부딪힌 목소리에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그를 스친 후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막스! 저들을, 저들을 막아!”
“그들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러 간 겁니다. 사랑하는 황자님을 위해서.”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요나스의 몸이 연신 휘청거렸다. 안타까운 모습에도 막스는 애써 외면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요나스는 아직도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 달 사이에 아비와 두 형제가 죽고 자신과 여동생만 남은 상황에서 이젠 동생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씨앗을 틔운 비극은 끝을 모르고 황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황가를 수호하는 에오카 여신이 황자님을 지켜 드릴 겁니다. 성년식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곧 있을 의식에서 이능이 택하는 건 황자님일 터.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황자님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단언하는 막스를 올려다보며 요나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될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인가. 그도 확신할 순 없을 것이다.
정처 없이 이끄는 듯하던 막스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 내음이 가장 먼저 그들을 반겼다. 요나스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냈던 휴식처가 이젠 도피처가 되어 버렸다.
막스는 구석진 책장에서 책 십여 권을 규칙적으로 빼기 시작했다. 마지막 책을 꺼내자 달칵 소리와 함께 책장이 옆으로 움직였다. 무저갱 같은 어둠 아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사파이어 궁의 비밀 피난소입니다.”
요나스는 반사적으로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막스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주인의 애달픈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노시종은 망설임 없이 요나스를 안으로 밀어 넣고 손을 놓았다.
“싫어. 막스, 싫어!”
떨어진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요나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살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만 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속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막스는 검은 공간으로 그를 밀어 넣기에 바빴다. 어린애처럼 붙잡고 늘어지던 요나스가 목멘 신음을 내뱉었다.
“같이…….”
나를 혼자 두지 말아 줘.
소리 없는 애원에 더는 못 이긴 막스의 주름진 눈가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따스한 손바닥이 요나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디마다 굳은살이 자리하고 오래된 책처럼 자연히 주름진, 자신만을 위한 손이었다. 절대 놓을 수 없는 체온이었다.
“나와 있자, 막스.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어. 응?”
“가엾은 황자님. 행복한 일생을 보내시기만을 바랐습니다.”
“막스!”
“사랑하는 황자님. 부디…….”
손이 떨어져 나갔다. 차가운 물방울이 툭 하고 볼에 떨어졌다. 동시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이러지 마. 나에게 이러지 마!”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비명을 질러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빛이 사라진 공간에서 아픈 가슴을 붙잡고 바닥에 웅크렸다. 절망이었다.

***

“에오카에 영광을. 삼황자님을 뵙습니다.”
예를 푼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그를 보던 요나스가 눈을 꾹 감았다. 갑자기 들이친 빛에 눈이 아프게 시렸다. 주춤거리는 그의 몸을 공작이 단번에 끌어당기자 등 뒤로 책장 문이 서서히 닫혔다.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빛에 적응하려 애쓰던 요나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갇혀 있는 동안 매일 불안에 떨었다. 황족의 피난처답게 내부엔 장기간 지내도 무리 없을 만큼 모든 게 구비되어 있었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다른 통로를 찾았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불안뿐이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막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인들은 무사할까.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멀쩡한 게 이상했다.
“모시겠습니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무심한 음성에 요나스가 고개를 들었다. 기다린 건 막스였지만, 그를 구한 건 눈앞의 네페스하임 공작이었다. 제국 삼공작 중 하나이며 교체계열의 이능을 가져 ‘용공작’으로도 불리는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나디아가 실패했다는 걸 의미했다.
요나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분명 막스가 살아 있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저를 보러 왔을 것이다. 위대한 태양의 핏줄이지만 그를 가장 사랑하는 건 황제도, 형제도 아닌 노시종이었다. 황후는 난산으로 요나스를 낳다 죽었으며 황제는 자식의 아비보단 제국의 아버지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형제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심약한 요나스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막스뿐이었다.
“……막스는?”
“사파이어 궁의 시종장이라면 살아 있습니다.”
“……!”
아. 아아!
안도로 요나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어, 어디에 있소?”
네페스하임 공작이 옆으로 물러났다. 재촉하는 눈짓에 요나스가 주춤거리며 앞섰다. 그 뒤를 공작과 기사들이 뒤따랐다.
적막한 복도를 걷는 요나스의 눈이 살짝 떨렸다. 분명 평생을 살아온 곳인데 낯설기 그지없었다.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과 벽에 난 흠집이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그 상흔이 망막에 고스란히 맺혔다.
“이곳입니다.”
시종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도착한 곳은 연회장이었다. 폐쇄적인 성격 탓에 제대로 써 본 적도 없는 곳이 원치 않게 쓰이고 있었다.
요나스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진한 피비린내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아수라장 속에서 막스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였다.
“아!”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구석진 곳에 반백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요나스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달리는 내내 쇳소리 같은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드디어 보고 싶은 이의 곁에 도착했을 땐 가쁜 숨으로 가슴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막스였다. 젊은 날의 미형을 짐작하게 할 만큼 고운 얼굴이 죽을 날 받아 놓은 것처럼 창백했다.
겨우 나 하나 지키자고.
요나스는 채 나오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족이라도 있었다면 달랐을까. 그를 돌보느라 혼인도 하지 않고 청춘을 흘려보낸 사람이었다. 막스마저 떠나면 앞으로 누굴 의지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삭막한 궁에서, 핏줄마저 저를 죽이려 한 이 냉혹한 황궁에서 대체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막스…….”
“……황자님?”
“막스!”
눈을 뜬 막스의 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시야가 흐린지 허공을 더듬는 막스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왜 울고 계십니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허허. 이거 민망합니다. 죽을 것처럼 굴어 놓고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으니…….”
요나스가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달래려고 한 말이겠지만 그에겐 무서운 농담이나 다름없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흐물흐물 무너지는 몸을 주체 못하고 침상 한쪽에 주저앉았다.
“하아…….”
막스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요나스는 천천히 부상자들을 훑었다. 모두 낯익은 이들이었다. 살아남은 궁인과 기사들 사이로 황궁의와 신관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
요나스는 제 시선에 다정히 미소 짓는 그들에게 차마 웃음으로 답할 수 없었다. 모두 몸이 성치 않았다. 멀쩡한 사람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웃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하는 황궁에서 불구인 자가 남을 순 없었다. 엄청난 보상금이 주어지겠지만, 그게 완벽한 보상이 될 순 없었다.
황위가 뭐라고. 내가 대체 뭐라고.
혼란스러움에 그들을 외면하는 요나스에게 막스가 다정히 말을 건넸다.
“모두 원해서 한 일입니다.”
“…….”
“마음을 굳게 다잡으십시오. 이제 황위를 이어받을 분은 황자님뿐입니다.”
“……난 자신 없어.”
“하셔야 합니다. 황가가 무너지면 에오카 제국은 갈가리 찢어집니다. 이리의 발톱과 하이에나의 먹성을 가진 귀족들이 호시탐탐 황가의 권위를 추락시키려 할 것이고 삼공작이 가진 거대한 세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 될 겁니다. 그것을 황자님은 황권으로 적절히 제어해야 합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리해서 말하지 마.”
요나스는 점차 흥분하는 막스를 진정시켰다. 아직 다 낫지 않았음에도 주인을 걱정해 편히 쉬지도 못하는 인사였다. 이런 이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인 게 실수였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재차 단언했다.
“노력할게.”
“힘들고 어렵겠지만 성년식에서 이능을 받으면 대부분 해결될 겁니다. 황가의 이능은 제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그 어떤 이리와 승냥이라도 절대 범접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시면 됩니다.”
황가의 이능.
원래라면 요나스에게 오지 않을 힘이었다. 대부분 일황자나 일황녀, 즉 가장 먼저 태어난 황족이 이능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황가의 이능은 깃든 대상이 사라지면 황실의 비처인 ‘이름 없는 숲’에 잠들어 있다가 다음으로 성년이 되는 황자나 황녀의 몸에 깃든다. 절대 명제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디아가 요나스의 성년식 전에 그를 치려 한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네페스하임 공작이 설명할 겁니다. 그는 삼공작 중 가장 인간사에 관심이 없는 자이니 기울임 없이 황자님을 대할 겁니다. 북부 귀족들 또한 황태자의 세력이었으니 이제는 황자님을 지지할 테고요.”
“나는…….”
“황자님.”
무언의 재촉에 요나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그리 걱정인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읊조리듯 조언을 하던 막스는 피로에 못 이겨 이내 잠들고 말았다. 하염없이 주름진 손등만 쓰다듬는 요나스에게 시종이 다가왔다.
“황자님. 각하께서 접견을 청하십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네페스하임 공작이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는 준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황가의 혼란은 제국의 혼란. 각오는 되셨습니까.”
무거운 중압감이 요나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차가운 시선에 숨통이 막혔다. 냉혹하게 빛나는 눈은 사신과도 같았고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비인간적이었다.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불안에 떨고 있을 제국민의 눈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없었다. 요나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 그의 반응에도 상대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굳은 의지를 내비칠 뿐이었다.
요나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나디아…….

***

나디아 드 아레프.
그녀는 이번 대 황가의 하나뿐인 황녀이자 남기사들의 꽃이며 여기사들의 우상으로 꼽히는 황실의 보물이었다. 혹자는 그녀야말로 제국의 심장이라 칭했다.
요나스는 첨탑을 오르며 지난날을 반추했다. 과거의 추억과 현재 상황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섞였다. 과거의 행복이 현재의 고통으로 바뀌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시든 잎처럼 쓸쓸하게 죽어 갔다.
황궁의 감옥은 지하에 있는 일반 감옥과 달리 지상, 그것도 10층이 넘는 첨탑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편의를 봐줘도 그곳은 죄인의 공간이었다. 삭막하면서도 음침한 회벽 돌, 녹이 슨 철장, 고문 기구를 들고 배회하는 간수장까지.
그곳에 나디아가 있었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요나스는 한동안 말을 걸지 못했다. 지금도 황궁 밖에선 나디아를 죽이라는 수많은 제국민의 음성이 밤낮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칭송하던 황녀였음에도. 이토록 사람 마음이 간사했다.
요나스는 주변을 물리고 하염없이 나디아를 응시했다.
토바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햇살처럼 웃던 너. 말에 올라 제 상체만 한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제압하던 너. 모든 기사가 기꺼이 제 검을 바치고 싶어 했던, 제국의 찬란한 보물. 차가운 지성과 냉혹한 바람만이 맴도는 궁에서 너만이 아름답게 빛났다.
“오라버니.”
기척을 느꼈는지 나디아가 고개를 돌렸다. 요나스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창살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차마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그에게 나디아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몸도 약한 사람이 여기까지 어인 발걸음이세요.”
다정한 음색이었다. 죽이려던 사람이 눈앞에 있음에도 나디아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나스에게 다가갔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남매의 눈이 올곧이 맞닿았다.
“황제의 행렬을 본 적 있으신가요.”
삭막한 감옥 안에서도 보석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녀의 음색은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 같았다.
“어린 시절, 높은 성벽에 올라 궁으로 귀환하는 폐하의 행렬을 처음 봤을 때였어요. 끝없이 도열한 기사와 병사, 하늘을 찌를 듯한 제국민의 함성, 허공에 흩날리는 꽃, 그리고…….”
나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고요히 흔들렸다.
“백마를 탄 위대한 태양.”
가느다란 손가락이 요나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힘 하나 없는 가냘픈 손엔 굳은살이 곳곳에 박여 있었다. 요나스는 저항하지 않고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만약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형제에게 맞섰더라면 서로의 상황이 반대였을지도 몰랐다.
“전 죽어서도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오라버니를 죽이려 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조일 것처럼 힘을 주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올곧게 응시하는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말대로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신념에 찬 눈이었다.
“불쌍한 오라버니. 이제 황궁에 남은 이는 오라버니뿐이군요.”
요나스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외로움이 사무치게 몰려왔다.
너마저 가면. 너마저 이리 가면…….
“눈물을 보이지 마세요. 제 선택에 후회는 없답니다. 죽이지 못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권력 다툼의 이치. 그 비참한 눈물을 동정에 녹여 저에게 보이지 마세요.”
나디아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이 가늘게 떨렸다.
“나디아.”
너는 마녀다. 제국의 보물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 황제를 독살하고 형제를 죽인 마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명예가 훼손되고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 되어도 좋아요.”
요나스는 무너지려는 몸을 창살을 붙잡고 버텼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돌렸다. 비틀거리며 계단에 올라선 그의 뒤로 물기 어린 목소리가 닿았다.
“오라버니.”
전에 없이 연약한 소리였다. 발에 족쇄라도 채운 듯 내딛는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또 만나요. 다음 생에서.”

다음 날, 제국의 태양을 떨어뜨리고 반역을 도모한 마녀 나디아 드 아레프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