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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8화 데바의 팔찌(3)


카샘과 하이 프리스트는 로난드란 말에 눈빛을 날카롭게 하며 위치를 파악했다.
수련생들이 뒤늦게 나서 사람들을 말려 봤지만 모두 헛수고일 뿐이었다.
“시박이 오빠!”
시박은 놀란 눈으로 아미를 바라봤다.
요놈의 꼬맹이가 장사나 하고 있지,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온 것인가.
운디네들도 사람들 사이에 찡겨 허우적대다 간신히 시박이 곁으로 다가왔다.
“넌 여기 왜 온 거야?”
“왜 오기는! 오빠가 신전에 불 지르는 거 아니었어?”
운명의 신 데바가 들었다면 뒤로 넘어졌을 법한 말을 겁도 없이 하는 아미였다.
카샘은 처음 겪는 상황에 마음이 불안한 듯 하이 프리스트에게 귓속말로 계속해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 모든 게 로난드 그놈의 수작 같습니다.”
“…….”
“생각해 보세요. 로난드가 왔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 저 시박이란 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게 다…….”
하이 프리스트가 양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신전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난 지금 김시박이란 허무맹랑한 거짓말쟁이, 아니 사이비 신도를 문책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박이 거짓말쟁이 아냐!”
아미의 말대꾸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근육이 꿈틀거렸다.
감히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천한 존재 주제에 자신의 말을 끊다니.
사람들 역시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토를 달았다는 것에 놀란 듯 아무런 변호도 해 주지 못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다시 말했다.
“오엔트 제국에 종교의 자유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의 손가락이 시박이를 가리켰다.
“저 자는 염라대왕이란 허무맹랑한 신을 믿으며 여러분에게 접근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배후에는…….”
“너 이 돈에 환장한 늙은이야!”
두 번째였다. 하이 프리스트의 입이 다물어진 것은.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로난드였다.
로난드는 씩씩거리며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맨 앞으로 나섰다.
“오오, 괴팍한 정령사 로난드 님 아니십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조우한 것처럼 말했다.
로난드가 그에 가증스럽다는 듯 몸서리쳤다.
“어디서 괴짜, 말짜 하는 거냐!”
“허허. 체통을 지키시오, 로난드.”
익숙한 장면이라도 본 듯 딱딱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로난드는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듯 고함쳤다.
“체통? 지금 체통이라고 했냐!”
“자고로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말을 가려…….”
“흥. 도둑놈 주제에 체통은 개뿔. 난 꼭 네놈보다 오래 살아 네놈 족보에 빨간 줄을 칠 것이다!”
“빨, 빨간 줄?”
하이 프리스트의 인내심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명색이 신을 모시는 자신의 족보에 빨간 줄을 긋는다고 협박하다니.
그건 자신을 공식적으로 나쁜 놈을 만들겠단 것 아닌가?
로난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이익! 이 수염도 없는 늙은이가!”
“뭐, 뭐야?!”
하이 프리스트의 결정적 한마디였다.
사람들 얼굴에 기대감과 동시에 한 가지 아쉬움이 어렸다.
이번에도 난투극을 벌일 것인가, 로난드의 수염이 존재했다면 필시 서로의 수염을 잡아당겼을 텐데.
두 인물의 다툼은 스프링필드에서 최고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실제 밑바탕에 깔린 갈등은 제법 무거웠지만.
은퇴와 동시에 여유를 즐기려 이곳에 정착한 로난드는 스프링필드가 앓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부패한 데바 신전의 영향력이었다.
오엔트 제국의 종교 세력이 위세를 떨치며 지방 곳곳에서 비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있는 스프링필드만은 그것을 없애려 했는데, 이곳 하이 프리스트 역시 왕년에 이름 꽤나 있던 자인 것이다.
실제로 그 역시 수도의 총본산에 있던 적이 있었다.
늙어서도 밝히는 돈 문제 때문에 여기저기 쫓겨나기를 수십 번,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스프링필드였다.
하지만 돈 귀신이 붙은 건 여전했다.
“흥, 이 간사한 늙은이 마침 잘 나타났다.”
하이 프리스트는 지금만큼 로난드의 등장이 반가울 때도 없었다.
“여러분 모두 잘 들으시오!”
하이 프리스트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 모습이 평상시와 다른 게 뭔가 사단이 나도 틀림없이 날 태세였다.
“로난드! 네놈은 과거 염의 정령사라는 영광에 먹칠을 했다!”
“감, 감히 너 따위가 그 칭호를 입에 올리다…….”
하이 프리스트는 로난드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마!”
“…….”
“첫째! 이방인을 끌어들여 신성한 데바 신전을 혼란스럽게 한 것도 모자라 이 소란을 일으켰다.”
“흥, 네놈들의 악덕, 횡포보다는 조용하지.”
“둘째! 그 이방인이 데바 신전을 음모에 빠트리기 위한 너의 끄나풀이라는 것!”
로난드가 착잡한 얼굴을 지었다.
역시 신전 측은 자신과 시박이를 한통속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 못하겠지! 김시박이란 저자 역시 정령을 다룰 줄 아니까!”
아니, 로난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신전을 메운 사람들 모두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시골 영지에 정령을 부리는 자가 나타났다는 건 자연스레 로난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시박이 자신을 존경하고 찾아온 자인 줄 알고 시박마차에 출입한 로난드 아니었던가.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 봐라! 네놈은 그동안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을 착취라 왜곡하여 우릴 여러 번 모함하지 않았더냐!”
성금이란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분명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말 못할 불만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이왕 이렇게 된 바에 다 들어 보기로 마음먹은 로난드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늙은이가 다른 때와 달리 불의 정령을 불러내 위협을 가하거나 무력시위를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바로 네놈의 끄나풀이 염라대왕이란 사이비 종교…….”
하이 프리스트는 하루에 세 번이나 자신의 말씀이 끊기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는 시박을 잡아먹을 듯 바라봤다.
저놈의 천인공노할 놈이 이제껏 가만히 있다 난데없이 왜 손을 드는 것인가.
시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승차사에게 인도된 사람의 령(靈)이 12대문을 지나면 10개의 지옥을 거쳐 49일간의 형벌을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십대지옥(十大地獄)이라 부른다.”
지옥이란 말에 신전 안의 모든 이들의 행동이 멈췄다.
시박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계속해 말했다.
“도산지옥(刀山地獄), 산에서 떨어지는 지옥으로 온 산에 날카로운 칼이 박혀 있다. 지옥의 옥졸들은 죄인을 끌고 산의 능선을 넘는데 발등까지 날카로운 칼날이 파고든다.”
“이, 이놈!”
“가다가 엎어지면 칼날이 온몸을 찌른다. 지옥의 옥졸들은 죄인의 신음 소리를 노랫소리 삼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지.”
“감히 데바 신전의 하이 프리스트를 겁박하는 것이냐!”
시박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죄를 못 깨우치는 놈이 있다면 칼날이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알몸의 죄인을 눕힌다. 옥졸들은 그 위로 커다란 칼을 고기 다지듯 다루지.”
“그것이 네놈이 믿는 사이비 종교의 허무맹랑한 교리…….”
“죄인이 실신해 평상에서 떨어지면!”
시박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평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형을 집행한다. 이것이 십대지옥(十大地獄) 중 하나인 도산지옥(刀山地獄)이다.”
“…….”
하이 프리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데바의 성경에도 지옥에 관련된 것은 있지만 시박이 말한 것과는 천지차이로 구체적이지 않았다.
“화탕지옥(火蕩地獄), 한빙지옥(寒氷地獄), 검수지옥(劍樹地獄), 발설지옥(拔舌地獄), 독사지옥(毒蛇地獄), 거해지옥(鋸骸地獄), 철상지옥(鐵床地獄), 풍도지옥(風塗地獄), 흑암지옥(黑闇地獄).”
시박은 십대지옥을 모두 말했다.
도산지옥(刀山地獄) 같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네놈은 어느 지옥으로 가고 싶냐?”
모든 이의 시선이 하이 프리스트에게 집중됐다.
하이 프리스트는 등줄기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던 수련생들의 눈빛도 부담스러웠다.
“하, 하이 프리스트님.”
카샘은 불안한 듯 하이 프리스트를 불렀다.
“더, 더 이상 말로 할 단계는 지났다. 아득…… 그들을 불러와라. 더불어 신전에 안치된 데바의 팔찌도.”
데바의 팔찌란 말에 카샘의 얼굴이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카샘이 신전 안으로 들어가고 하이 프리스트는 시간을 끌어볼 요량인지 시박과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법 그럴듯한 얘기구나!”
“어디 한번 네놈이 믿는 데바라는 애의 지옥도 말해 봐라.”
시박의 말투에 로난드가 그만 웃어 버렸다.
스프링필드에서 자신 말고 누가 감히 하이 프리스트를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방금 전 시박이 말한 지옥에 대한 것 같은 설명은 자신도 할 수가 없었다.
‘데바라는 애라니. 큭큭. 도대체 저놈의 정체가 뭐지?’
시박이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지는 로난드였다.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세 치 혀를 놀린다 한들 소용없다!”
“미치겠군. 너 같은 애가 정말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애인 거 맞아? 이거 신뢰감이 떨어지는데.”
시박은 신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울해졌다.
신탁을 받아 일 좀 쉽게 풀어 나가려 했더니만 하이 프리스트란 놈이 여간 덜떨어진 게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고얀 놈 같으니라구! 네놈의 그 오만방자함도 이제 끝이다. 데바의 팔찌로 모든 걸 종결시켜 주마!”
데바의 팔찌란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로난드 역시 올 것이 왔다는 듯 다급히 시박에게 다가갔다.
“정, 정말 염라대왕이란 게 있는 건가?”
“속은 괜찮더냐?”
“으, 으응?”
시박은 짓궂게 웃었다.
“노움 목욕물 먹고 토 한 바가지 했잖냐.”
“……지금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야! 하이 프리스트는 빌어먹을 성직자치고 하는 짓이 변태 같아도 데바의 팔찌는 진짜일세. 신의 힘이 깃든 물건이란 말이야!”
“신의 힘?”
“그거 무지 비싼 거야!”
아미가 로난드에게 동조하듯 말했다.
“그래,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이지.”
시박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말이야. 그 힘이란 게…… 집 나간 용을 불러낸다거나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건가?”
로난드와 아미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꼭 이런 순간까지 농담을 하고 싶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데바의 팔찌는 일종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물건이라 할 수 있네. 쉽게 말해 거짓말탐지기라 할 수 있지. 신전의 모든 악행이 정당화될 수 있던 것도 어쩌면 데바의 팔지 때문이야.”
로난드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사람들은 신의 권능을 원하는 반면 두려워하기도 하지.”
“시박 오빠 빨리 노움 불러내!”
아미의 말에 로난드는 그만 너털웃음이 났다.
어린 나이에 운디네들을 부리는 걸 보고 높게 평가했는데 역시 아직 꼬마는 꼬마일 뿐이었다.
고작 상황을 타계해 보려 생각한 것이 하찮은 땅의 하급 정령이라니.
“데바의 팔찌를 차고 거짓을 말하면 자네의 팔이 잘려…….”
“그만.”
시박은 데바의 팔찌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애초에 순순히 카샘을 따라 신전에 온 것도 청룡의 행방에 대해 신탁을 받아 볼까 해서였다.
“후후.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가 보구나!”
하이 프리스트는 신이 나 소리쳤다.
상황이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다면 굳이 그들을 나서게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끝을 맺음이 신전과 자신을 위해 좋았다.
“어디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여 보거라. 그래, 이번에는 프리스트가 자신의 신을 섬기는 증표를 보여 봐라! 데바의 팔찌가 모든 걸 증명할 테니!”
시박은 하이 프리스트가 사람을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다 생각했다. 자연스레 자신에게 모이는 사람들의 시선.
생각해 보니 꼭 말로 해결할 필요도 없었다.
“왜 아무 반응이 없냐! 네놈이 판다는 떡갈비라도 내놓지 그러더냐!”
시박은 허리춤을 매만졌다.
허리띠로 변해 편히 잠을 자던 살라만다가 잠에서 덜 깨 비몽사몽했다.
“그럼 데바라는 애의 증표는 뭐냐, 네가 한 금목걸이냐?”
“이, 이거는…….”
하이 프리스트는 뻔뻔하게 말했다.
“개인 취향이다.”
시박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너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재미…… 아!”
시박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품속을 뒤적였다.
하이 프리스트 말대로 신이 있다는 증표로 내세울 만한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