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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7화 적과의 동침(5)


“자아, 이 카샘이 판단해 드리겠습니다. 김시박 씨, 당신이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시박은 김시박 씨란 말에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김씨박 같은 욕은 아니지만 이 역시 이름이 우스워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든 탓이다.
“내가 믿고 있는 신을 말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뭔가 질문이 잘못됐군. 난 네놈이 말한 것 같이 신을 믿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예?”
“쯧쯧. 네놈이 말한 신을 믿는다는 뜻은 불확실한 증거와 강한 믿음이 결합되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믿느냐는 것, 이거 아니야.”
“그, 그렇지요.”
“그렇게 말하면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카샘은 자신이 말장난에 놀아나고 있다고 느꼈다.
자연스레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따로 모시고 있는 신이 없다는 말입니까?”
말귀 못 알아듣는 카샘에 시박은 짓궂게 말했다.
“물론 가끔 수틀리면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드는 신은 있지. 그리고 나는 네놈이 말한 것처럼 신을 믿지는 않지만 천 년 넘게 봐 왔어. 눈앞에 보이는 걸 믿고 안 믿고 할 게 어디 있나.”
카샘은 이 황당무계한 발언에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데바를 모시는 프리스트 앞에서 신을 직접 봤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미친것이라 생각하니 한결 나아지긴 했다.
카샘은 워낙 자신 있게 말하는 시박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뭐, 거창하게 이름을 말할 것까지야. 염라대왕이라고 알라나 모르겠네? 그래도 저승에서는 제법 먹혀드는 신인데.”
“푸훗!”
시박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박이를 무시한 웃음이 아닌, 카샘을 향한 엉뚱한 답변에 대한 웃음이었다.
“이이…… 그딴 신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믿음이 부족한 아이로군. 그럼 데바라는 신이 맹목적으로 있다는 증거는 또 어디 있어?”
워낙 직설적인 말투였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샘은 한계에 다다른 듯 숨을 씩씩거렸다.
김시박을 선교하여 신전으로 데리고 오라는 하이 프리스트의 말이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데바 님이 존재하시는 것에 대해 지금 증거 운운하셨습니까?”
시박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
“데바 님은 대륙이 만들어지고 나서 드래곤, 엘프, 오크, 드워프, 요정, 인간 등 종족이 만들어지시는 걸 결정하신 분입니다. 더불어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까지 운명을 결정하시고요. 그런 분에게 감히…….”
“아, 그것 참. 증거를 대라니까 잡설을 늘어놓긴.”
“네, 네 이놈! 네놈이 믿는 신은 늘어놓을 잡설이라도 있는 거냐!”
기어코 카샘의 이성의 끈을 끊어버린 시박이었다.
시박은 끝없이 반박하는 카샘에게 귀찮은 듯 말해 줬다.
“잡설이라……. 알기 쉽게 인간들이 기록한 염라대왕에 대해 말하자면, 라그베다라는 문헌에서는 최초의 인간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그곳의 신이 된 야마천이 불교에 받아들여져 지옥의 왕이 된 것이 염라대왕인데. 흐음.”
시박은 카샘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좀 더 쉽게 말해 주지. 인도 고대의 산스크리트 대서사시 바하라바타에 따르면, 피처럼 붉은 옷을 입고 왕관을 썼으며 물소를 타고 한 손으로는 곤봉을, 다른 손으로는 올가미를 잡고 있다.”
시박은 혀에 침이 마른 듯 잠시 한숨을 돌렸다.
“올가미는 죽은 이의 영혼을 묶는 포승줄이고, 곤봉은 정의로운 판정과 악을 섬멸하는 무기이다. 병(病)이라는 마차를 탄 모습으로도 그려지는데, 마차는 네 개의 눈이 달린 두 마리의 개가 이끈다고도 한다.”
“도, 도대체 뭐라고 하는…….”
막힘이 없는 시박의 설명에 카샘이 당황했다.
만약 그가 운명의 신 데바를 믿지 않았다면 필시 염라대왕을 추종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저승사자를 시켜 죽은 이의 영혼을 데려오는데 이게…… 한번 해 보니까 순 날강도나 다름없는 거야. 지는 의자에 앉아서 이상한 책이나 여인의 속곳을 보며 침이나 흘리고 있고 말이야.”
“그, 그만…….”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주지. 염라대왕은 현재 이상한 치질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는데 그 종양이 네놈 얼굴만 하다. 아, 거 생각하니까 더러워 죽겠네.”
“신, 신성 모독…….”
“아, 맞아. 네게 증거를 대라면서 정작 나는 증거를 보이지 않았구나.”
시박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카샘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시박이를 확실하게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신성 모독을 불사할 수 있다.
더불어 미친놈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시박이 찢어진 속곳을 꺼내 들었다.
“자아, 이게 바로 내가 앞서 말한 염라대왕이 애용하던 속곳이다. 북해빙궁 한비아의 속곳인데…….”
“찢, 찢어져 있어…….”
“아, 이게 왜 찢어져 있냐면 내가 염라대왕의 비밀창고를 탐험하던 도중 그만 동자귀 하나가…….”
카샘이 자신에게 내밀은 속곳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더욱 찢어진 속곳에 시박이 쌍심지를 켰는데 카샘이 악에 바친 듯 외쳤다.
“사, 사탄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시박에게 새로운 별명이 하나 더 붙는 순간이었다.



8화 데바의 팔찌(1)


“큰일 났군. 시박이도 필시 신의 분노를 살 게 틀림없어.”
“에이, 이 사람아. 설마 수비대장 로난드의 손님을 함부로 대하겠어?”
사람들은 저마다 카샘을 따라 신전으로 간 시박이를 걱정했다.
“역시 나도 따라가야겠어.”
운디네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아미를 만류했다.
“괜찮아. 시박이 오빠는 얼간이긴 해도 악마도 혼내 준 사람이야.”
악마란 단어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아까는 프리스트인 카샘을 괜히 겁주려고 한 말인 줄 알았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하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저기, 아미야. 악마를 혼내 줬다는 게 무슨…….”
“오늘 장사 안 해요!”
아미는 사람들의 질문을 못 들은 체하며 신전으로 달음박질했다. 텅 비어 버린 시박마차를 보며 사람들은 뭔가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나도 신전으로 가야겠어!”
“나도 갑세! 잘하면 로난드가 하이 프리스트랑 멱살 쥐어 잡고 싸우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잘하면 시박이가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저마다 가장 통쾌할 법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썰물처럼 시장통을 빠져나갔다. 필시 신전으로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 북적거림에 골목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드였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게 꼭 떫은 감을 억지로 입에 넣은 것처럼 복잡 미묘했다.
‘대체 내가 왜 연관된 거지?’
멀리서 김시박을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도 들려왔다.
환호를 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토록 부담스럽기도 처음이다.
‘것 참, 신전과 관련된 인물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김시박이라…… 우욱.’
시박이의 정령술이 생각난 로난드였다.
노움의 야릇한 표정, 마치 소변을 보듯 부르르 떠는 몸뚱아리.
그날 이후로 시박이에 대한 감정은 호감보다는 경계심이 앞섰다.
‘그건 악마의 묘약이야.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단순히 마시는 것만으로 친화력이 짙어지다니. 그런 게 함부로 세상에 드러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시박이를 잡아다 정체를 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으로 해결하자니 스프링필드 영지민을 비롯해 수하들까지 시박이 자신과 깊은 관계라 생각했다.
애써 무시한다 쳐도 그가 끼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카샘의 성정으로 보아 분명 사달이 나도 크게 날 텐데.’
시박이 데바를 모독하는 발언은 로난드조차 가슴 떨리게 했다.
‘역시…… 나도 신전으로 가 봐야겠어.’
막상 마음을 먹었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쯤 되었을까?
건물 지붕에서 그런 로난드를 쳐다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빈센트였다.
그는 갈피를 못 잡고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로난드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쳤다.
‘쯧쯧. 늙은이가 실성한 모양이군.’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 그런지 괜히 눈길이 갔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빈센트는 시박이가 사라진 곳을 멀리 응시했다.
난생처음 겪어 본 굴욕. 그날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나도, 아니 관 뚜껑을 덮는 그날이 오더라도 그 일을 생각한다면 벌떡 일어설 것만 같았다.
‘네 이놈 김시박. 네놈 명줄은 반드시 이 빈센트가 끊어 주마!’
마침 로난드가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었다.
그 뒤를 이어 빈센트 역시 신전으로 몸을 날렸다.

***

시박은 신전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끝없이 카샘을 자극했다.
바로 그간 자신이 잡아들인 혼백들의 일화담 때문이었다.
시박은 그저 혼자 흥이 나 얘기한 것인데 우습게도 운명의 신 데바를 모시는 카샘에게는 하나하나가 신성 모독으로 들리기만 했다.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
“정말 네놈들 소굴에 가면 신이란 것과 얘기할 수 있냐?”
“이익! 소굴이 아니라 신전입니다!”
“아, 소굴이나 신전이나 그게 그거지. 뭐, 복잡하게 따지고 있어 따지긴. 자꾸 그러면 네놈 저승길 평탄치 않을 수 있다?”
카샘이 끔찍한 잇소리를 냈다.
필시 아랫니 중 하나가 무사치 못했을 법한 소리였다.
‘네놈이 이렇게 기고만장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카샘의 속마음을 알아주듯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신전이란 곳인가.”
시박은 눈앞에 보이는 신전을 바라봤다.
영지와 어울리지 않는 신전 크기에 이질직인 느낌이 들었다.
위치 역시 밭이 있어야 할 곳에 커다란 바위를 꽂아 놓은 형태다.
외관 역시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대리석 기둥과 나무와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뤘지만 시박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못 줬다.
더불어 보란 듯이 휘날리는 저 깃발은 무엇인가.
마치 나라를 뜻하는 국기인 마냥 오만하기까지 했다.
“하하. 놀라는 기색은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스프링필드에 처음 온 여행자는 신전을 보고 놀라기로 유명하니까.”
카샘의 허풍 아닌 허풍에 시박은 코웃음을 쳤다.
“찐빵이네.”
“예? 찐빵?”
“들판에 찐빵 하나가 놓여 있는 것 같군.”
카샘은 찐빵이란 단어에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뭔가에 빗대어 말한 것 같기는 한데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찐빵이 뭡니까?”
“있어. 맛있는 거.”